나의 외가 파평윤씨(2) 윤관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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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3-21 18:54 조회1,942회 댓글0건본문
파평윤씨는 시조 윤신달에서부터 5세손 윤관장군까지는 외아들로 이어저서 파평윤씨는 모두 윤관장군의 후손이다. 우리 안동김문의 충렬공 할아버님같이 파평윤씨의 중시조이다.
윤관장군은 고려 4대명장(강감찬,윤관,김방경,최영)중에 한분으로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개척하였다고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다.
여기에 윤관장군의 업적을 다시한번 공부하는 자세로 옮겨본다.
윤관 장군의 생애
윤관 장군은 태어날 때 아버지가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일찍이 학문에 눈이 트여 잠시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특히 오경을 즐겨 봤다.
일곱 살 되던 해는 뽕나무를 소재로 하여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073년(문종 2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친 다음 1104년 2월 동북면 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여진 정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북쪽 국경인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경계로 그 위쪽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상국 혹은 모국이라 하여
조공도 바치고 더러는 귀화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점차 국경 일대에 새롭게 일어난 동여진이 그 세력을 확대하고 고려의 국경 요새 등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103년 부족장에 우야소가 그 자리에 올랐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일촉즉발의 충돌
상태에 놓였으며, 1104년 초 완안부의 기병이 먼저 정주관 밖에 쳐들어왔다. 이에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 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려 하였으나 오
히려 여진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윤관은 이때부터 왕명을 받고 여진 정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추밀원사로 있던 2월 21일
정벌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전장에 나가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이번에도 여진의 강한
기병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아군의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의 장수가 되었다.
결국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 뒤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같은 해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신기군, 신보군, 강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와 같이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양곡을 비축하여 여진 정벌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1107년(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변방의 긴급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 원수가
되어 왕으로부터 지휘관을 상징하는 부월을 하사 받고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휘하에 5만 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육지와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이같이 기세 등등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군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을 공격하여 적의 태반을 섬멸시켰다. 이 전투에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점령하였고, 적의 전사자 4,940명, 그리고 생포 130명이라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즉시 조정에 승전보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확정하고
그 주변에 9성을 축조하였다. 이어 남쪽에 사는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 시켜 남도 지방민들이
국경지방 일대에 개척하며 살게 하였다.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렇게 고려군이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는
1108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윤관의 일사분란한 지휘와 부하인 척준경의 용맹과
지략으로 이를 완전히 패주(敗走)시켰다. 그는 개선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한편 전투에 패한 여진은 서쪽으로 강력한 요나라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조공을 바치고 끝까지 배반하지 않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애원하였다. 여진이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나오자 당시
고려왕인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 환부를 논의하였다.
예부낭중 한상이 반대하였으나 나머지 28명이 환부에 찬성하는 등 육부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화평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여진을 공략할 때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다는 점,
둘째 개척한 땅이 수도에서 너무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셋째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결국 자신이 장병들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회복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이 아무 의미 없이 다시
여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더욱이 여진정벌에 대한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 당하였다. 아무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였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었고,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하지 못한 채 사저로 돌아갔다.
반대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상소를 올려 그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윤관의 관직과 공신의 호를 빼앗기에 이르렀다. 이후 예종이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비호해 준 덕으로, 1110년 다시 시호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말년을 우울한 심정으로 서재에 파묻혀 평소 좋아하던 경서를 읽으며 지냈다.
그러다 1111년 5월 "호국일념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끝까지 분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쓸슬히 눈을 감았다.
윤관은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어진 성품과 학식을 겸비했다고 전한다.
1130년 예종의 묘정과 조선 문종대에 이르러 왕의 명으로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파주 여충사에
봉사하고 청원의 호남사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이었으나 후에 문숙으로 고쳐졌다. 척지대업을 이룩한 해동명장이라
는 명성으로 지금까지 후대에 널리 추앙 받고 있다.
▣ 김재원 - 윤관장군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감사합니다.
윤관장군은 고려 4대명장(강감찬,윤관,김방경,최영)중에 한분으로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개척하였다고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다.
여기에 윤관장군의 업적을 다시한번 공부하는 자세로 옮겨본다.
윤관 장군의 생애
윤관 장군은 태어날 때 아버지가 용마를 타고 하늘을 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일찍이 학문에 눈이 트여 잠시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특히 오경을 즐겨 봤다.
일곱 살 되던 해는 뽕나무를 소재로 하여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술에도 일찍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073년(문종 2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을 거친 다음 1104년 2월 동북면 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여진 정벌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북쪽 국경인 압록강에서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경계로 그 위쪽 지역에 살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를 상국 혹은 모국이라 하여
조공도 바치고 더러는 귀화도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점차 국경 일대에 새롭게 일어난 동여진이 그 세력을 확대하고 고려의 국경 요새 등을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103년 부족장에 우야소가 그 자리에 올랐을 때에는 그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들어와 주둔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고려군과 우야소의 여진군은 일촉즉발의 충돌
상태에 놓였으며, 1104년 초 완안부의 기병이 먼저 정주관 밖에 쳐들어왔다. 이에 숙종은
무력으로 여진 정벌을 결심하고 문하 시랑평장사 임간을 시켜 이를 평정하려 하였으나 오
히려 여진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
윤관은 이때부터 왕명을 받고 여진 정벌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추밀원사로 있던 2월 21일
정벌의 책임자로 임명받고 전장에 나가 3월에 여진과 싸웠으나, 이번에도 여진의 강한
기병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아군의 태반이 죽고 적진에 함몰되는 패전의 장수가 되었다.
결국 임기응변으로 화약을 맺고 일단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패전 뒤 왕에게 전투력의 증강과
기병의 조련을 진언하여 같은 해 12월부터 여진 토벌을 위한 준비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 결과 신기군, 신보군, 강마군으로 구성된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와 같이
군제를 개편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킴과 동시에 양곡을 비축하여 여진 정벌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1107년(예종 2) 여진족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변방의 긴급보고를 접하게 되었다. 이때 원수가
되어 왕으로부터 지휘관을 상징하는 부월을 하사 받고 17만 대군을 이끌고 정주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휘하에 5만 3,000명을 거느리고 정주에 도착한 뒤 육지와 바다로부터 공격하였다.
이같이 기세 등등한 고려군의 위세에 눌린 여진군이 동음성으로 숨자 정예부대를 동원해서
이를 격파하였으며, 여진군이 숨은 석성을 공격하여 적의 태반을 섬멸시켰다. 이 전투에 135개
처에 달하는 적의 전략적인 거점을 점령하였고, 적의 전사자 4,940명, 그리고 생포 130명이라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즉시 조정에 승전보를 올리고 탈환한 각지에 장수를 보내 국토를 확정하고
그 주변에 9성을 축조하였다. 이어 남쪽에 사는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 시켜 남도 지방민들이
국경지방 일대에 개척하며 살게 하였다.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사방 700여 리에 달했고,
선춘령에 경계비를 세워 고려의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이렇게 고려군이 함경도 일대를 석권하게 되자, 그곳을 근거지로 웅거하던 완안부의 우야소는
1108년 다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왔다. 윤관의 일사분란한 지휘와 부하인 척준경의 용맹과
지략으로 이를 완전히 패주(敗走)시켰다. 그는 개선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한편 전투에 패한 여진은 서쪽으로 강력한 요나라와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와 평화를
회복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여진족은 조공을 바치고 끝까지 배반하지 않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애원하였다. 여진이 적극적으로 강화교섭에 나오자 당시
고려왕인 예종은 육부를 소집하고 9성 환부를 논의하였다.
예부낭중 한상이 반대하였으나 나머지 28명이 환부에 찬성하는 등 육부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대신들은 화평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여진을 공략할 때
당초에 한 통로만 막으면 여진의 침입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고려의 예측이 맞지 않았다는 점,
둘째 개척한 땅이 수도에서 너무 멀어 안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점, 셋째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의
보복이 두려웠다는 점, 마지막으로는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일어나리라는
점등이었다.
그리하여 다음해 7월 3일 회의를 열고 9성 환부를 결의하여 7월 18일부터 9성 철수가 시작되었다.
결국 자신이 장병들과 더불어 목숨을 걸고 회복하였던 9성 일대의 땅이 아무 의미 없이 다시
여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더욱이 여진정벌에 대한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조차 삭탈 당하였다. 아무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하였다 하여 처벌하자는
주장까지 대두되었고,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하지 못한 채 사저로 돌아갔다.
반대파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상소를 올려 그의 사형을 주장하였다. 임금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윤관의 관직과 공신의 호를 빼앗기에 이르렀다. 이후 예종이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비호해 준 덕으로, 1110년 다시 시호가 내려졌으나 사의를 표하였다.
말년을 우울한 심정으로 서재에 파묻혀 평소 좋아하던 경서를 읽으며 지냈다.
그러다 1111년 5월 "호국일념의 뜻을 받들어 나라를 위해 끝까지 분투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쓸슬히 눈을 감았다.
윤관은 많은 선비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정도로 어진 성품과 학식을 겸비했다고 전한다.
1130년 예종의 묘정과 조선 문종대에 이르러 왕의 명으로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파주 여충사에
봉사하고 청원의 호남사 등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이었으나 후에 문숙으로 고쳐졌다. 척지대업을 이룩한 해동명장이라
는 명성으로 지금까지 후대에 널리 추앙 받고 있다.
▣ 김재원 - 윤관장군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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