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캠프자료---김흔 장군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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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6-26 10:59 조회1,524회 댓글3건본문
김 흔(金 小斤)
1) 음서로 산정도감 판관을 거쳐 장군
명장이며 명재상이었던 김방경(金方慶)의 둘째아들로 1250년(고종36, *충선왕원년 1308년에 59세로 별세하였다는 고려사 기록을 근거로 역산) 태어났다. 초명은 수(綬)이며, 음서(蔭敍)로 산정도감 판관(刪定都監 判官)을 거쳐 장군이 되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방경의 아들들로 김선, 김흔, 김순(金恂)이 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흔열전
김흔은 문음(門蔭)으로 산정도감(刪定都監)의 판관으로 임명되었는데 세 번 조동되어 장군이 되었으며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흔열전
충선왕 원년에 나이 59세로 죽었다. 김흔은 성품이 활달하고 인자하였으며 특히 친척 가운데 곤궁한 자를 잘 구제하여 주었다.
2) 아버지 따라 삼별초 토벌, 대장군, 사재경
(24세) 1273년(원종14) 아버지를 따라 탐라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고 대장군이 된 뒤, 곧 사재경(司宰卿)에 올랐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이에 흔도는 몽고 군사 5백 명을 남겨 두고, 김방경 역시 장군 송보연(宋甫演)과 중랑장 강사신(康社臣), 윤형(尹衡)으로 하여금 경군(京軍) 8백 명과 외별초(外別抄) 2백 명을 영솔하고 탐라에 남아서 평온한 질서를 유지하게 하였다.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다가 나주 땅에 와서 사로잡아 왔던 친당(親黨)들을 베어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 어떠한 죄과도 추궁하지 않았다. 또 크게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그의 아들 김수(綬) 및 지후(祗候) 김감(金憾),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 승리를 보고케 하였다.
왕은 김수를 대장군으로, 김감을 공부 낭중으로, 유보를 중랑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또 고세화가 맨먼저 올라가서 적진을 함락시켰다 하여 그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고 그 밖의 인원들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주었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흔열전
아버지를 따라 탐라적(耽羅賊-삼별초 폭동군)을 토벌하여 승리하게 되자 대장군으로 임명받았다. 얼마 후에 사재경(司宰卿)으로 고쳐 임명되고
3) 아버지 따라 일본원정 종군, 지병마사, 진주목사
(25세) 1274년(충렬왕1) 일본원정 때는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참가하였고, 귀환한 후에 진주목사를 지냈다. 이때 수(綬)에서 흔(小斤)으로 개명한 듯하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15년(원종)에 황제는 일본을 정벌코자 글을 보내 김방경과 홍다구에게 전함을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이 전함 건조를 중국 남방에서 하는 방식대로 진행한다면 비용이 많이 들 뿐더러 장차 제 기한 내에 완공하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근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김방경은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되어 먼저 전라도에 가서 사람을 파견하여 중서성(원나라의)의 공문을 받아다가 우리 나라에서 만드는 방식대로 전선들을 건조하게 독려하였다.
이 해에 원종이 죽고 충렬왕이 즉위하였다. 김방경은 홍다구와 더불어 단신으로 와서 위로의 인사를 드리고 합포로 돌아왔다. 거기서 도원수 홀돈(忽敦) 및 부원수 홍다구, 유복형(劉復亨)과 함께 전함을 검열하였다.
김방경은 중군을 통솔하고 (즉 중군사로 되고) 박지량(朴之亮), 김흔은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임개(任愷)는 부사(副使)로 되었으며 추밀원 부사 김선(金侁)은 좌군사(左軍使)로, 위득유(韋得儒)는 지병마사로, 손세정(孫世貞)은 부사로 되었으며, 상장군 김문비(金文庇)는 우군사로, 나우(羅佑), 박보(朴保)는 지병마사로, 반부(潘阜)는 부사로 되었는데 이를 3익군(三翼軍)이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김흔은 곧 김수(綬)이다.
그리하여 몽고군 및 한군(漢軍-한족 출신 군대) 2만 5천 명, 우리 나라의 군대 8천 명, 초공(梢工-키잡이), 인해(引海-해상 안내자), 수수(水手-뱃군)를 합하여 6천7백 명과 전함 9백여 척을 거느리고 합포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진군이 오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여진군이 제 기한에 도착하지 못하였으므로 곧 출발하여 대마도(對馬島)에 들어가 싸워서 쳐 죽인 수효가 대단히 많았다. 일기도에 이르니 왜군이 해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박지량과 김방경의 사위인 조변이 그들을 쫓으니 왜인들이 항복하기를 요청하다가 나중에는 와서 싸웠다. 홍다구와 박지량, 조변이 1천여 명을 쳐 죽였다. 그리고 삼랑포(三郞浦)에 배를 남겨 두고 길을 갈라서 진격하여 적군을 죽인 것이 아주 많았다. 왜군이 돌격해 와서 중군을 치게 되자 장검(長劒)이 바로 좌우에서 번득였으나 김방경은 심어 놓은 나무마냥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으며 도리어 효시(嚆矢-전투 신호 용 화살)를 하나 뽑아 쏘고 소리를 높여 크게 외치니 왜군들이 놀라 기가 죽어서 그만 달아났다. 박지량, 김흔, 조변, 이당공(李唐公), 김천록(金天祿), 신혁(申奕) 등이 힘써 싸우니 왜군이 대패하고 엎드러진 시체가 삼을 베어 눕힌 듯이 많았다.
홀돈이 말하기를 ꡒ몽고 사람들이 비록 전투에 익숙하다 하지마는 어찌 이보다 더 하겠는가?ꡓ라고 하였다. 여러 군들이 왜군과 싸워서 날이 저물어서야 전투를 중지하였다.
《고려사》 제104권 - 열전 제17 > 김흔열전
또 일본 정벌에 종군하였다가 귀환한 후에 진주(晋州)목사가 되었었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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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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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충렬공 둘째아들 김흔 장군은 (기록상) 여러 아들 중에서도 특히 아버지의 최측근에서 평생을 군사활동 뿐만 아니라 정치적 역정을 아버지와 함께 한 아들이었습니다. 아들 하나(김승고)를 두었는데 무후하여 후손이 이어지지 못한 관계로 우리 문중에서도 소홀한 감이 없지 않았습니다. 최근 1997년이후 연기군 지역에서 (안동김씨 종친회 주도로) 연기대첩에 대한 새로운 조명으로 김흔 장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점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번 제4회 안동김씨 여름캠프를 통해 김흔 장군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봅니다. 1580년 경진보 중에서 김흔 장군 부분을 보고 싶습니다. 답변으로 달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중국 하얼빈에서...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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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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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님, 그렇잖아도 시간 때문에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염치 없지만 여름캠프 자료 부탁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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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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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에 감사합니다. 참여 못하시는 몸을 대싱하여 자료 제공으로 참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