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캠프자료---김흔 장군 06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5-06-29 20:21 조회1,588회 댓글2건본문
12) 아버지와 함께 중국의 고승 몽산덕이에게 배움을 청하다.
(김흔 47세) 1296년(충렬왕22) 겨울, 원나라 中吳의 休休庵이라는 작은 庵子에 머물고 있던 고승 蒙山德異(1232-?1298)에게 고려의 萬壽上人이 찾아가서, 고려국 내원당대선사 混丘(*일연의 고제), 정녕원공주 왕씨 妙智(*충렬왕 공주), 명순원공주 왕씨 妙惠(*충렬왕 공주), 전 도원수 상락공 金方慶, 시중 韓康, 재상 廉承益, 재상 金昕, 재상 李混, 상무 朴卿, 상무 柳(옷의변居) 등 여러 사람이 재삼 만나고자 하는 뜻을 전하였다.
충렬왕은 1296년 9월부터 1297년 5월까지의 8개월간 공주와 從臣 243인 총 590인을 데리고 세자의 결혼참석과 하정을 목적으로 하여 원나라에 갔다. 즉 1296년 겨울에 몽산에게 고려의 열 사람이 뵙기를 청하였으니 바로 충렬왕의 入元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다만 당시 金方慶이나 염승익 등이 元에 간 것은 다른 史料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이들은 현실정치를 떠난 상태로 있었으나 김방경의 아들인 金昕은 당시 이미 세력가가 되어 있었으므로 父子가 같이 몽산을 만나는 행적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위 내용이 기록된 <法門景致법문경치>는 <諸經撮要제경촬요>내에 있는 것으로, 남권희 교수(경북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조교수)가 1994년 봄 시중의 서점에서 일단의 불교자료를 살피던 중에 일부가 낱장으로 체계가 없이 흩어져 있는 필사본 하나를 보게 되어 구입하여 정리복원한 것이다.
蒙山德異(1232-?1298)는 13세기 후반에 활동한 중국의 고승이다. 임제종 양기파에 속한 그는 고려에 다녀가지 않았으나 그의 저술이 조선시대까지 유행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불교계에 끼친 그의 영향은 매우 컸다. 그의 제자인 鐵山紹瓊(철산소경)이 몽산의 死後에 고려에 3년간 머물렀는데, [고려국대장이안기]에 의하면 철산은 당시 고려사람들에게 “부처를 맞이한 듯 온 나라가 존숭하였고 머무는 곳마다 4부대중이 구름처럼 모였다.” 고 한다. 고려말의 고승들도 몽산의 유적을 탐방할 정도로 깊이 기억되고 있었다. 그가 고려의 動安居士 李承休에게 간접적으로 감화를 주었고, 이승휴의 문집 <동안거사집>에 “金方慶이 滿月峯 了了庵 信和尙에게 답한 글”이 실려 있다.
수선사 만항에 이어 원명국사 충감은 몽산 선풍을 수용하였는데, 그는 1304년 몽산의 제자 철산 소경을 고려에 초빙하여 3년간 모시기도 하였다.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鐵山(紹)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 그 내용을 1306년 (충렬왕26, 대덕10) 9월에 閔漬가 撰하고 봉익대부밀직사부사 判비서寺事문한학사 金恂이 書하여 [高麗國大藏移安記 (고려국대장이안기)에 적어 강원도 회양부(淮陽府) (금강산 ?유점사)에 세웠다.
몽산덕이의 제자 철산소경은 우리나라 불교사에 특기될 정도로 고려의 불교계는 물론 조선을 거쳐 오늘날의 불교계에도 그의 영향은 적지 않다. 그는 국어학계와 서지학계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국사학계의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 도서관학논집 제21집 (1994.12, 한국도서관 정보학회)
●몽산 덕이와 고려 인물들과의 교류 -필사본 <諸經撮要>의 수록내용을 중심으로- (남권희/ 경북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조교수)
-----
필자가 이 자료를 구하게 된 것은 1994년 봄 시중의 서점에서 일단의 불교자료를 살피던 중에 일부가 낱장으로 체계가 없이 흩어져 있는 필사본 하나를 보게 되어 구입하게 되었다. 그후 자세히 살펴보니 어느 정도의 연결과 복원이 가능하여 정리를 마쳤으며 표지의 서명은 <諸經撮要>였다.
-----
蒙山은 丁丑(1277)년 여름부터 澱山의 일을 마치고 中吳의 休休庵이라는 작은 庵子에 머물러 쉬고 있었다. 그가 63세 되던 고려 충렬왕21년(1295) 겨울에 고려에서 了庵元明 長老와 覺圓上人, 覺性上人, 妙孚上人 등 8사람이 찾아가 같이 지내다가 충렬왕22년(1296) 여름에 仲孚上人 등 4사람은 돌아 갔다.
그해 겨울 萬壽上人이 몽산에게 가서 전하기를 고려국 내원당대선사 混丘, 정녕원공주왕씨 妙智, 명순원공주왕씨 妙惠, 전 도원수 상락공 金方慶, 시중 韓공康, 재상 廉공承益, 재상 金공昕, 재상 李공混, 상무 朴공卿, 상무 柳공(옷의변居) 등 여러 사람이 재삼 만나고자 하는 뜻을 전하여 오므로 休休長老가 멀리 上庵에서 安居하고 있을 때라 나누어 施를 베풀었다. 몽산은 답을 하지 않고 만수상인을 청하여 요암장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
<法門景致>와 관련이 있어서 이때는 충렬왕22년(1296) 9월부터 동왕23년(1297) 5월까지의 8개월간 공주와 從臣 243인 총 590인을 데리고 세자의 결혼참석과 하정을 목적으로 하여 실제로는 元의 강압을 완화시키고 고종46년(1259) 이후의 포로를 송환받았다. 回賜品으로는 여러 것이 있었으나 왕과 공주는 金?衣를 받았다.
즉 1296년 겨울에 몽산에게 몽산화상이 와서 고려의 열 사람이 뵙기를 청하였으니 바로 충렬왕의 入元시기와 완전히 일치한다. 또 몽산이 十松頌과 序와 後序를 쓴 시기가 1297년 2월이니 역시 충렬왕과 공주 두 사람이 돌아가기 전과 일치하므로 이때 몽산의 글을 받아 왔으며 이때 了庵元明이 跋을 붙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당시 金方慶이나 염승익 등이 元에 간 것은 다른 史料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이들은 현실정치를 떠난 상태로 있었으나 김방경의 아들인 金昕은 당시 이미 세력가가 되어 있었으므로 父子가 같이 몽산을 만나는 행적에 참여할 수가 있었다. 이들의 행적에서 공주, 대신, 명사 등이 몽산을 모두 만나라 간 배경에는 이미 고려에서 몽산의 임제선이 지속적으로 알려져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
(4) 전 도원수 상락공 金方慶 (1212-1300)
본관은 안동, 16세에 산원으로 출발하여 감찰어사, 1263년에 지어사대사, 1269년에 元에 사신으로 갔다. 1270년과 1273년에 삼별초를 진압하여 개부의동삼사의 작위를 받고 1274년 일본정벌에서 실패하였다. 1281년의 일본정벌에도 실패한 이후 추충정난정원공신, 삼중대광첨의중찬판전리사사세자사를 지냈으며 1295년 84세로 상락군개국공에 봉해졌다.
특히 그는 入元의 행적이 많아서 1265(1차), 1269(2차), 1273(3차), 1274(4차), 1276(5차), 1280(6차)년의 기록이 있으나 본 연구자료에 의하면 1296년 즉 전해인 1295년에 상락공의 직위를 받고 이듬해에 충렬왕, 공주와 함께 제7차로 入元하였음이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
(7) 재상 金昕(炘) (1251-1309)
김방경의 아들이며 1279년 독로화로서 元에 갔으며 후에 첨의평리가 되었다. 1290년 합단의 침입을 물리친 공로로 판밀직사사를 거쳐 지도첨의사사에 올랐다. 元에서 7년간 있다가 韓希愈(?-1306)가 죽자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 삼중대광이 되고 상락공에 襲封된 뒤에 귀국하였다.
■ 고려후기 조선초 불교사 연구 (2003, 황인규 혜안)
이렇듯 충지를 전후하여 수선사의 사주에 대하여 별로 알려진 사실이 없을 정도로 그 사세가 쇠락해 갈 때 선종계는 가지산문의 고승인 보각국사 일연이 등장하여 수선사 지눌의 유풍을 진작시켰던 것으로 여겨져 주목된다.
일연(1206-1289)은 1219년 14세에 가지산문의 설악산 진전사에서 대웅에게 득도하고 구족계를 받은 뒤 1246년(고종33)에 당시 재상이었던 정안의 초빙을 받아 세운 정림사의 주지가 되었으며, 여기서 대장경판을 조성하는데 참여하였다. 1261년(원종2)에 왕의 부름을 받고 선월사에 머물면서 목우자의 법을 이었다고 하였다. 이는 일연의 혜심의 제자 몽여에게 [조동오위]를 증편하여 그에게 점검을 받았던 사실과 궤를 같이 한다. 이렇듯 자신이 가지산문이면서 사굴산문인 지눌의 법을 계승했다는 것은 두 산문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지눌의 선교융화적이며 포용적 노력의 한 사례라 생각된다.
한편 유생들에게도 지눌의 선풍이 유통된 사례가 동안거사 이승휴(1224-1300)에서 찾아지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번 보내준 양측의 법어를 항상 牧牛子私記 위에 놓아두고 서로 바꿔 가며 보면서 보고 음미하여 싫어함이 없었으나 근기가 낮고 용렬해서 아득히 내 코를 찾아도 이해가 닿지 않았습니다. <전 중봉대부 도원수 추충정난정원공신 광정대부 삼중대광 첨의중찬 상장군 판전리판사 세자사로 치사한 상락군개국공 식읍일천호 식실삼백호 金方慶이 滿月峯 了了庵 信和尙에게 답한 글> [동안거사집] 잡저 일부
일연은 임제종뿐만 아니라 조동종이나 우리나라의 고유의 민간신앙을 존중하는 등 다양한 사상을 수용하고자 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선풍이 그의 제자인 혼구에게 이르러서는 몽산의 선풍까지 수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296년) 겨울에 고려의 萬壽上人이 와서 말하기를 고려국 내원당 대선사 混丘, 靖寧院 公主 王氏 妙智, 明順院 公主 王氏 妙惠, 前都元帥 上洛公 金方慶, 侍中 韓康, 宰相 廉承益, --- 등 여러분이 재삼 편지를 보내서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法門景致>
*남권희, ‘필사본 제경촬요에 수록된 몽산 덕이와 고려인물들의 교류’ [도서관학논집]21, 1994
위의 글에서 나타나고 있는 만수상인에 대해서 알려진 바 없으나 그는 고려의 승속 10인을 재삼 몽산에게 전하고 가르침을 부탁하였던 인물이다. 그 승속인물 가운데 내원당의 대선사 혼구도 몽산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 이렇듯 몽산의 선풍은 가지산문뿐만 아니라 다음 장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수선사와 수선사의 분원인 선원사에서 앞장서서 수용하였던 것이다.
3. 목우자 선풍과 여말선초 불교계
1) 만항, 충감의 선풍과 몽산선풍
수선사풍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만항(1249-1319) 대이며, 수선사계 선원사 승려였던 원명국사 충감(1274-1338)을 거쳐 각진국사 복구(1270-1356) 대에 이루어진다. 이들은 모두 원오국사 천영의 문도인데 -----
만항은 1263년 원오국사에게 출가한 후 충렬왕대 삼장사 주지에 취임하고 낭월사, 운흥사, 선원사의 주지를 하였다. 그는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별전종주속조등묘명존자’의 법호를 하사받았다. 그의 문도로는 경호와 小丘 등 700여 명이 있었다고 하는데, 소지는 무학 자초의 출가사이다.
만항에게 있어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몽산의 선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1298년 상인을 통하여 [육조대사 법보단경]을 1300년에 선원사에서 간행하였다. 이미 선학에 의하여 밝혀진 바와 같이 몽산선풍은 13세기 후반에 활동한 몽산 덕이의 선풍이다. 그는 남송초에 번성한 임제종의 황용파와는 달리 남송말부터 주도적인 종세를 나타낸 임제종 양기파에 속하였다. 몽산선풍의 특징은 철저하게 간화선의 공안으로서만 의미를 부여하는 無字話頭의 看話一門과 宗師親見이 강조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만항의 선풍은 지눌의 선풍을 포함한 수선사 선풍에다가 몽산의 그것이 결합된 전통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만항보다 25년 뒤에 나타난 충감이 1304년 몽산의 제자인 철산소경을 원나라에 가서 직접 초빙하였다. ?鑑(1274-1388)은 圓明國師로 책봉되었으며 호는 雪峰, 자는 절조, 성은 김, 평양군 永純의 동생이다.
1280년(충렬왕6) 7세에 선원사에서 출가하고 원오에게 사사받았다. 1292년(충렬왕18)에 승과에 급제하고 각지를 돌아다닌 뒤 원나라에 들어가 철산을 만나 함께 귀국했다. 그후 용천사 주지로 있으면서 백장의 선문청규를 실행하였으며 이어 15년 동안 선원사의 주지를 하였다. 1334년(충숙왕 복위7)부터 성주산 보광사에 주석하며 중건하였고 1338년에 보광사에서 입적하였다는 이것이 스님의 대체적인 행장인데,
그의 행적 가운데 중요한 것은 수선사 만항에 이어 몽산 선풍을 수용한 사실이다. 그는 1304년 몽산의 제자 철산 소경을 고려에 초빙하여 3년간 모셨을때 [고려국대장이안기]에 의하면 철산은 당시 고려사람들에게 “부처를 맞이한 듯 온 나라가 존숭하였고 머무는 곳마다 4부대중이 구름처럼 모였다.” 고 한다.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충렬공 3자 문영공(김순)은
1306년 (충렬왕26, 대덕10)에 강원도 회양부(淮陽府) 금강산에 세운 [高麗國大藏移安記 (고려국대장이안기)를 민지 찬, 김순 서하였다.
---閔漬가 撰하고, 봉익대부밀직사부사 判비서寺事문한학사 金恂 書하여 大德 10年 丙午 9月 日 記한 것으로, 1306년 (충렬왕26, 대덕10) 고려인 민지가 찬한 대장경 이안기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鐵山(紹)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또 劉喜海의 海東金石存攷(고) 26에는 "大德10年9月閔漬撰 金恂書 在江原道淮陽府金剛山"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 26, p19514) (典據 : <周南瑞 編, 천하동문> 전갑집 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 1366책)의 <천하동문집>7 )
■ 한국학보 제77집 (1994.2, 일지사)
●蒙山德異(1232-?1298)의 行績과 年譜 (허흥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몽산덕이는 13세기 후반에 활동한 중국의 고승이다. 몽고 세력의 확산으로 南宋이 멸망한 1232년에 남송에서 태어나 몽고의 침략을 받았던 청장년기에 격동의 시대를 양자강 남쪽에서 修學과 出家, 그리고 修道로 보냈던 임제종 양기파에 속한 고승이다.
---
그는 고려에 다녀가지 않았으나 그의 저술이 조선시대까지 유행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불교계에 끼친 그의 영향은 매우 컸다. 그의 제자인 鐵山紹瓊(철산소경)이 몽산의 死後에 고려에 3년간 머물렀었고, 고려말의 고승들도 몽산의 유적을 탐방할 정도로 깊이 기억되고 있었다. 그가 고려의 動安居士 李承休에게 간접적으로 감화를 주었고, 그의 제자 철산소경은 우리나라 불교사에 특기될 정도로 고려의 불교계는 물론 조선을 거쳐 오늘날의 불교계에도 그의 영향은 적지 않다. 그는 국어학계와 서지학계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그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국사학계의 관심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
<1295-1300 몽산 덕이와 고려 인물과의 교류>
1295 (몽산63세) 乙未 충렬왕 21년
겨울에 了庵元明長老, 覺圓上人, 覺性上人, 妙孚上人 등 8人의 道友가 三韓(高麗)으로부터 와서 조용히 지내기를 같이함.
1296 (몽산64세) 丙申
여름. 中孚上人 등 4人의 道友가 고려로 돌아감
겨울. 고려의 萬壽上人이 왔고, 고려국 내원당대선사 혼구, 정녕원공주왕씨 묘지, 명순원공주왕씨 묘혜, 전도원수 상락공 김방경, 시중 한강, 재상 염승익, 재상 김흔, 재상 이혼, 상서 박경, 상서 유거 등 여러분이 재삼 편지를 보내어 문답함.
1297 (몽산65세) 丁酉
仲春, 法門(十松)景致의 序文을 씀 (十松序)
1298 (몽산66세)
상인을 통하여 萬恒이 몽산의 서문이 있는 <육조대사법보단경>을 구함 (덕이본 육조단경 序)
2월 2일 십송설의 서와 가송의후서를 씀 (십송서)
4월 12일 동안거사 이승휴에게 법어를 보냄 (동안거사집)
1300
고려에서 만항이 덕이본 육조대사법보단경을 간행함 (덕이본 육조단경 서)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 |
김윤식 |
---|---|
작성일 |
대부님, 감사합니다. 죄송하기만 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 |
김항용 |
---|---|
작성일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