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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캠프자료---김흔 장군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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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7-04 01:05 조회1,673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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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사위 조련


○조인규---조련+女(부 김흔), 조비(趙妃, 충선왕비)

○김흔---女+조련



●조인규(趙仁規)

1237(고종 24)∼1308(충렬왕 3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거진(去塵). 평양부(平壤府) 상원(祥原)의 미미한 가문의 출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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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0년에는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동녕부(東寧府)를 되찾는 교섭에 공을 세웠고, 1295년에는 중찬(中贊)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지위가 높았지만 1292년에 그의 딸이 세자비로 간택되면서 국구(國舅)가 되어 명실공히 가장 유력한 존재가 되었다.

1298년에 세자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로서 개혁정책을 크게 뒷받침하여주었다.

그러나 충선왕 비인 계국대장공주(#계39國大長公主)의 조비(趙妃)에 대한 질투로 일어난 조비무고사건(趙妃誣告事件)으로 왕이 7개월 만에 퇴위되고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그도 원나라에 끌려가 안서(安西)로 장류(杖流)되었다.

6년 후인 1305년에 방면되어 즉시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에 임명되었다.

1307년 원나라 무종(武宗)옹립의 공으로 충선왕의 정치력이 복권되자, 다시 자의 도첨의사사 평양군(咨議都僉議司事平壤君)에 봉하여지고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이 모두 재상의 지위에 올라 가문을 번성하게 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조련(趙璉)

?∼1322(충숙왕 2).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온중(溫仲). 자의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를 지낸 인규(仁規)의 아들이며, 조선의 개국공신인 준(浚)의 할아버지이다.

음서(蔭敍)로 진출하여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 평리(評理)가 되고, 이어 동지밀직사사·지밀직사사 등을 거쳐 1311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르고, 여러 번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충숙왕 때 찬성사가 되어 최고위의 재상반열에 서서 중요한 일을 맡았다.

또한, 원나라로부터 중의대부 고려왕부단사관(中議大夫高麗王府斷事官)의 직임을 받았는데, 이는 조인규가 지녔던 것을 물려받은 셈이며, 따라서 고려에서의 정치적 지위를 굳히는 데 큰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심왕 고(瀋王暠)가 고려 왕위를 넘보는 일로 원나라에 불려가서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충숙왕이 원나라의 명령에 의하여 정동행성(征東行省)의 권성사(權省事)가 되어 왕의 직무를 대행한 바 있다.

충숙왕과 심왕의 싸움이 결말을 보기 전인 1322년(충숙왕 9)에 죽었지만, 동생 연수(延壽)와 함께 심왕의 편을 들어 절개를 잃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 고려사절요

무술 24년 (1298), 원 대덕 2년

○ 어느 사람이 익명서를 궁궐문에 붙이기를, "★조인규(趙仁規)의 아내가 귀신과 무당을 섬기며 저주하여, 왕으로 하여금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그 딸에게만 사랑을 쏟게 하였다" 하여, 공주가 인규와 그의 아내를 옥에 가두었는데, 이윽고 방문(榜文)을 붙인 자를 잡고 보니 바로 사재주부(司宰注簿) 윤언주(尹彦周)가 한 짓이었다. 또 인규의 아들 서(瑞)ㆍ연(璉)ㆍ후(珝)와 사위 박의(朴義)ㆍ노영수(盧穎秀) 등과 그 아내까지 가두고, 곧 철리(徹里)를 원 나라에 보내어 이를 아뢰게 하였다. 상락백(上洛伯) ★김방경(金方慶) 등이 공주에게 나아가 철리를 보내지 말도록 청했으나 듣지 않았으며, 왕이 사람을 시켜 청했는데도 듣지 않았다.


■《고려사》 제89권 - 열전 제2 > 후비 2 >

계국 대장공주

충선왕(忠宣王)의 계국 대장 공주(大長公主) 보탑실련은 원나라 진왕(晉王) 감마라(甘麻刺)의 딸이다. 충렬왕 22년에 충선왕이 세자로서 원나라에 있을 때 공주에게 장가 들었다. 충렬왕 24년에 공주가 원나라로부터 고려로 왔는데 황제가 태자(太子) 아목한(阿木罕)과 승상(丞相) 옹길나대로 하여금 호송하게 하였다. 충렬왕은 금교(金郊)까지 나가 마중하였고 백관들은 교외에 나가 영접하였는데 의장(儀仗)과 기악(妓樂)을 왕을 영접할 때의 예절과 같이 하였다. 이 해에 충선이 선위(禪位)받았는데 공주의 궁을 중화궁(中和宮), 부(府)를 숭경부(崇敬府)라고 하였으며 관속을 두었다.

공주는 ★조비(趙妃)가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을 질투하여 위구르(畏吾兒) 글자로 편지를 써서 수종원들인 활활불화와 활활대 두 사람에게 부탁하여 원나라로 가서 황태후에게 전달하게 하였다. 위구르(畏吾兒)란 고대의 후이구루인바 원나라는 옛날에 자기의 글자가 없었고 팔사파(八思巴)가 처음으로 몽고 글자를 창조하였으나 편지 왕래에는 위구르 글자를 많이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 편지에는

“★조비가 공주를 저주하여 왕의 사랑이 없어지게 하였다”라는 것이었다. 왕이 박경량(朴景亮)을 시켜 그 두 사람에게 편지 내용을 물어 보게 하였으나 두 사람은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를 구타하였다. 왕은 겁이 나서 충렬왕에게 알리니 충렬왕이 공주의 처소로 가서 위안하여 주고 또 몰수한 도성기(都成器), 김수, 현종주(玄宗柱), 장우(張祐) 등의 가산, 노비(人口)를 활활불화와 활활대, 장길철리(章吉徹里) 등에게 주었으며 또 김수의 처를 활활불화에게 주어 공주의 노염을 풀기에 노력하였다. 그래도 공주는 활활불화, 활활대와 대장군 김정(金精), 오정규(吳挺圭) 등을 원나라로 보내 보고하고야 말았다. 얼마 후에 어떤 자가 익명 편지를 궁문(宮門)에 붙였는데 그 글에는

“조인규(趙仁規)의 처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며 저주하여 왕이 공주를 사랑하지 않도록 하고 자기 딸만을 사랑하게 하였다”라고 씌었다. 그래서 공주가 조인규와 그의 처를 투옥하고 또 ★조인규의 아들 조서(瑞), ★조련(璉), 조후(珝)와 사위 박의(朴義), 노영수(盧潁秀) 등과 그들의 처를 가두었다.

또 철리(徹里)를 원나라에 보내 투서 사건을 알리게 하였는바 이 투서를 붙인 장본인은 사재(司宰) 주부(注簿) 윤언주(尹彦周)였다. 상락백(上洛伯) ●김방경(金方慶) 등과 여러 치사한 재상들까지 공주를 만나 보고 철리를 보내지 말라고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왕도 또한 사람을 보내 청하였으나 그 말도 듣지 않았다.

활활불화 등은 원나라 태후의 사신과 함께 원나로부터 돌아와서 황제의 명령으로 최충소(崔沖紹)와 장군 유온(柳溫)을 순마소(巡馬所)에 가두고 또 ★조비도 가두었다. 원나라에서 또 사신을 보내 조인규를 고문하였다. 이 사건으로 역마를 타고 오는 사람이 대략 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끝내 조인규를 원나라로 데려 갔다. 그리고 또 조인규의 처를 극히 참혹하게 고문하였으므로 그는 고통에 견디지 못해서 사실 아닌 자백을 하였으므로 원나라에서 또 사신을 보내 ★조비와 내관(宦者) 이온(李溫)을 붙잡아 갔다.




○조련---조덕유---조준, <조견>---조대림+경정공주(부 태종)---女+김중엄

○김승택---김묘---<1김구용>, 3김구덕---<명빈+태종>, 김오문+女(부 정총)---김중엄+女(조부 조준), <휘빈+문종 세자>---김뉴


○김순---<女+정책>, <女+별가불화>, <1김영돈>, 4김영후---김천---2김사렴, 3김사안, 4김사형

○정해---정책+女(부 김순)---<정오>, 정포---정공권(=정추)---정총, <정탁>---女+김오문



●조준(趙浚)

생몰년 1346-1405(충목왕2-태종5).    본관 평양(平壤).   자 명중(明仲).   호 우재(#우07)/송당(松堂).  시호 문충(文忠)

문하시중 인규(仁規)의 증손으로, 판도판서 덕유(德裕)의 아들이다. 아들 대림(大臨)이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함으로써 태종과는 사돈이 된다.

원래 평양조씨는 이름없는 집안이었으나, 인규의 대에 이르러 몽고어를 잘하여 역관(譯官)으로서 출세, 충선왕의 국구(國舅)가 되면서 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는 6형제 중의 5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제가 아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항상 개탄하였으므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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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형(金士衡)

1333(충혜왕 2)∼1407(태종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고조는 방경(方慶), 할아버지는 영후(永煦), 아버지는 부지밀직사사 천(蕆)이다.

음보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뒤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뒤에 개성윤(開城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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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국공신 중에서는 배극렴(裵克廉)다음으로 지위가 높았던 고려의 원로구신이며, 가문이 귀현(貴顯)하였고 마음이 청고하여 이성계가 아꼈다고 한다.

조준과 함께 8년간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는 모두 조준이 전단(專斷)하였고, 말을 신중히 하고 스스로 삼가며 분수를 지켜 조준의 의견에 따랐으며, 적을 가지지 않았다. 개국공신 1등에 책봉된 것은 공이 컸기 때문이 아니며, 처음에는 이성계를 추대하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다고도 한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김사렴

여말에 지방으로 축출되어...

---대개 공양때 이조개국공신들을 지방으로 나누어 보낼 적에 조견, 김사렴이 명을 받들어 조견은 영남, 김사렴은 호서 안렴사로 나갔다. 려조가 혁명이 되니 조견은 돌아가 과천 관악산에 숨고 김사렴은 그 고장 청주북쪽 오근리에 숨었으니 두 사람의 의리에 처함이 대략 같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고려혁명 직전에 권신의 혁명과업 수행정책으로 예비작업에 밀리어 지방 안렴사로 축출당한 것이다. 안렴사 김사렴 공께서는 정포은이 학살당하니 청주북쪽 오근촌에 은익하였다. 이태조 등극하면서 직간 잘하는 공을 좌사간 벼슬을 주어 수차 부르니 나가지 아니하고 도산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 <안렴사공 청시상언> [<고충지, 1982, 안렴사공파종회>]


●조견(趙狷)

1351(충정왕 3)∼1425(세종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초명은 윤(胤). 호는 송산(松山).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덕유(德裕)이며, 어머니는 오의(吳懿)의 딸이다. 영의정부사 준(浚)의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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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의 생애에 있어서 “조선이 개국되고 형 준으로 인하여 개국공신에 책록, 준의 간곡한 출사권유가 있었지만 고려에 절의를 지켜 은거하였으며, 자손에게도 고려에의 절의를 당부하였다.”고 한 이설이 있기도 하나 신빙하기 어렵다.

양주의 정절사(旌節祠)와 송산사(松山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 김뉴(金紐)

1420(세종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취헌(翠軒)·쌍계재(雙溪齋)·관후암(觀後庵) 또는 상락거사(上洛居士). 아버지는 중엄(仲淹)이고, 어머니는 조준(趙浚)의 손녀이며 대림(大臨)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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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당시의 혼맥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작업 덕분에 올 여름 켐프는 알찬 수확이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래  민적-배위 , 민사평 배위 부분은 고쳐 졌으면 합니다.
살펴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