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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되던 문서와 번역문 소개(2)-지리산 청학동 비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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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작성일05-07-05 08:08 조회1,575회 댓글3건

본문

<소록>에 이은 두번째 자료입니다. <지리산 청학동 비결서>란 제목의 묵서지입니다. 1985년 시골집의 다락방 궤짝 속에서 볼품 없이 썩어가던 문서 하나, 제 손에 들어와 그동안 약 20년 간 보관해 오다가 이제서야 제 빛을 발하는가 봅니다. 어느 선조님의 작품인지는 모르겠으나 부식정도로 볼 때(?) 약 200여년은 된 것 같습니다. 약 6-7대조 선조님의 작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묵서지 한 장을 마주하고 앉아 몇가지 생각을 해 봅니다.

 

이 글을 왜 남겨 놓으셨을까?

어느 선조님께서 삶터를 이곳으로 옮겨볼까 계획했던 글일까

단순한 이상향으로서 적어 본 것일까

아니면 <청산별곡>의 그 <청산>처럼 피난처로서, 위안 삼아 적어 본 것일까

<비결>이란 제목으로 본다면 후손들에게 계시적 차원에서 적어 알려준 것은 아닐까

 

그 비결 내용이 지금 밝혀졌다면,

밝힌 자인 지금의 나는 그 청학동과 무언가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사라져 가던 한 묵서지에 새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을 해 보았습니다. 

죽음 직전에서

구출되어

재생된

비결서입니다.    

 

<지리산 청학동 비결>

  chunghak01-1.jpg

1. 원본 소장처 : 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 문중 양덕공 종손가

2. 발견일시 : 1985. 8.

3. 발견자 : 김항용

4. 번역 정리 : 1차-2004. 11(김항용)   2차-2005. 6. 22(김익수 감수)

5. 원본 크기 :  가로(46Cm ) × 세로(23Cm)

6. 역문

智異山 靑鶴洞 秘訣

  <靑蓮의 秘記>에 의하면 『지리산 남쪽 기슭에는 청학동이 있는데 35개의 姓씨가 살고 있으며 李,柳,朴,鄭,姜,趙,崔,權,宋,全,閔,許,林,沈,愼,任,千,都,黃,河,梁,南,尹,洪,徐,禹,張,吳,金,盧,孟,成,蘇,薛 씨가 그 성씨로 이 가운데 李,柳,黃씨가 먼저 살기 시작한 곳』이라 한다.

  <朝鮮史記>에 의하면 『지리산의 남쪽 기슭에는 청학동이 있는데 제비 둥지모양을 하고 있다고 하며, 조선의 명당터 형식에는 <학야(鶴野)>라고도 하고 혹은 <적야(蹟野)>라고도 하며, 혹은 <사업동(沙業洞) 후룡(後龍)>이라고도 한다』고 적혀 있는데, 돌로 된 뿔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어 그 아래 廣石이 물을 만들어 솟아나와 남쪽 源谷口로 흐르고 그 아래에는 석문이 있고 그 안에는 石井이 있는데 이를 일컬어 壽井이라 한다.

 아주 오래 사는 자(上壽者)는 140-150년을 살고, 中壽者는 120-130년을 살았으며, 下壽者라 해도 80-90년 살았다 한다.

 壬坐丙向의 白雲三峯은 남해의 물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데 그 앞은 가히 천여 호가 살며,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수 천 섬 두락의 땅이며, 지대가 높아도 서리가 늦게 오므로 升種石(되로 심으면 섬이 나올 만큼) 무한히 큰 땅이다.

 天運이 正當하고 時運이 스스로 열려 자연히 깨우쳐 啓指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영호남 지방의 존사 10餘人이 모임을 만들면 즉 10년 내에 큰 저택을 이루고, 20년 내에 벼락이 石門을 부수고, 40년 내에 높은 벼슬의 재상과 명현과 達士가 많이 나오고, 文人이 千여 명 나오고, 武人이 만여 명 나오는 곳이다. 그 외 각 성씨들이 왕성하게 興하는 곳이라.

 謙菴의 秘記에 이르기를 『나는 본래 山水를 찾는 버릇이 있는데 하루는 노승이 찾아왔는데 자못 식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야기가 청학동에 미치게 됨에 나는 말하기를 “당신은 능히 그 기록을 얻어 보셨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승은 말하기를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였다. 다음날 승과 더불어 길을 떠나서 등저재(橙邸齋)에서 점심을 들고, 3일의 양초(糧草)이므로 길에서 잠을 자고, 3일째에 한 石門에 이르렀는데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거기에는 한 글귀가  있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啼鳥警人名下樹 - 지저귀는 새들은 사람을 놀라게 나무에서 내려오고

  桃花流水谷中天 - 복숭아꽃 흐르는 물의 골짜기와 하늘

  步步漸進則抱四 - 걸음 걸음 더 나아가니 사방을 둘러싸고

  四十里大開平坦 - 40리나 크게 트인 평원

  作沓千餘石之地 - 논 농사를 지으면 1000여 석이 나는 땅,

  升種石出 -  한 되를 심으면 한 섬의 소출

  可居數千餘戶 - 가히 수천 호가 살만 하네


 관문(關門)에 이른 즉 壬坐丙向의 방위에 있는 白雲山 三峰은 남해를 마주하고 있으며 관문 앞에는 한 글귀가 있는데 이르기를

 『萬樹挑花疎竹裡(대나무 숲 속엔 복숭아꽃이 드문드문 피었네)』라고 씌여 있었고, 三秋에 서리 맞은 단풍과 냇가의 소나무를 지나니 한 개의 石泉이 있었다.

 그런데 그 석면에는 큰 글씨로 『高麗學士 李靑蓮의 책에, 십년을 살면 도통한 사람이 나오지 않으나, 이십년을 살면 벼락이 석문을 깨서 가히 벼슬아치가 나올 만하고, 40년을 살면 경상인재(卿相人才)가 나오고 명현이 속출하게 되는 영남의 명승지이니라. 또한 지대가 높아도 서리가 늦게 오며, 흉년이 들지 않으며 병화가 들어오지 않는다. 李,柳,朴,鄭,姜씨들이 최고로 잘 되는 곳이다. 동네에는 청학이 많은 까닭에 일컬어 청학동이라 한다』고 하였다. 

  매가 아래로 내려가 꿩을 쫓는 형상으로 장지임지(張之任地)라. 소의 등에 올라 피리를 불고 소가 대밭 수풀에 누워 있는 형상이며, 청학동 아래의 논은 비학(飛鶴)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며 仙人이 손을 들어 춤을 출 만큼 좋은 곳이다. 靑鶴抱卵(청학이 알을 품고)  寶燈掛壁(귀한 등불이 벽에 걸린)의 형상이다. 

 청주읍(淸州邑)에서부터 문의읍(文義邑)을 지나 옥천읍(沃川邑)에 이르고 무주(茂州), 안성장(安城場)과 장기장(長岐場)을 지나 장수읍(長水邑)에 이르고 하동 화개장(河東 花開場)을 향하여 박다천(薄茶川)에 이르면 청학동(靑鶴洞)까지의 거리가 40리가 된다.

댓글목록

김태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서
작성일

  모든것을 잊고 청학동에서 살아보고 싶습니다.

솔내님의 댓글

profile_image 솔내
작성일

  재미 있고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의 청학동은 지금의 청학동과 좀 거리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감사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윤식
작성일

  흥미로운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귀한 보물들 연재 신기하고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