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안렴사공 묘소 발견에 관한 이견 구명 요청 (관련기록 첨부)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5-07-11 13:15 조회1,346회 댓글0건본문
심각하고 중대한 지적이십니다.
반드시 규명해 내야 할 문제입니다.
안렴사공 묘소 발견 기록 몇가지를 살펴보면
약간의 혼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1678년에 양성현감공(증손 김취)이 실전된 안렴사공 묘소를 찾았다고 하는 기록
둘째, 1678년에 실전된 양성공의 묘소를 찾다가 안렴사공 지석을 발견하였다고 하는 기록
세째, 1678년에 양성공의 묘소를 새로 쓰기 위하여(?이장, ?새초) 주변을 탐험하다가 안렴사공 지석을 발견하였다는 의견(양성공 후손가)
안렴사공(1335-1405)의 증손자이면 1420년 전후 출생일 것이므로 첫째 기록은 틀린 것이고
아무튼 기록 원문을 다시 해석해 보는 방법과
당시의 정황을 새롭게 살펴보는 방법이 남아 있습니다.
안렴사공 유언 및 묘소 발견 기록을 모아 보았습니다.
다시 한번 검토하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렴사공의 유언과 실전 묘소 발견>
1) 오은선생 행장 (?1768, ?1828, 13대손 김래 찬)
여러 아들들에게 교훈으로 말하기를 "나는 고려 왕조의 옛 신하로써 대대로 재상 가정이었는데, 이미 국가를 보존할 수 없고 또 나라와 더불어 함께 없어지지도 못하였으니 나는 천하의 죄인이다. 내가 죽거든 깊은 산에 장사지내어 봉분도 만들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개의 무덤이라 손가락으로 가르켜 보임이 없게 하라" 고 하였다.
상을 당하자 여러 자식들이 유언대로 장례를 치르니 무덤을 펀펀하게 만들어 언덕과 같은 모양으로 하였다.
그후에 청주 사람들이 風烈을 사모하여 심지어 "遺命平塚(유명평총-유언대로 평평한 무덤을 만들다) 넉 자를 제목으로 내걸어 선비들을 시험(과거)하였다. 세대가 점점 멀어지자 향사가 따라 폐하여져서 먼 후손 시대에 이르러 마침내 묘소를 잃어 버렸다.
숙종4년 무오(=1678)에 양성현감(=金吹)이 도산 위에 갔다가 실전된 무덤을 발견하게 되어 그 곁에 조금 새겨 둔 표지를 근거로 삼아 비로소 선생의 묘소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봉분을 만들었으니 아! 기이한 일이로다.
2) 오은 안렴사김선생 시장초기 (1802이전, 홍양호 찬)
臨終때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여조의 옛 신하로 임금을 바르게 도와 나라를 구하지 못하였고 또 나라가 망함과 같이 죽지 못하였으니 나는 천하에 죄인이라. 죽어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과 선인들을 지하에서 뵈이리요. 나의 자손은 나의 뜻을 잘 받아서 내가 죽은 뒤 심산중에 장사지내되 봉분도 하지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아서 이 다음 사람이 그 누구의 무덤이라고 손가락질함이 없게 하고 또 내 자손이 고려조정에 벼슬한 사람은 이씨조정에 가서 거듭 벼슬하지 말라"고 하시었다.
---선생이 세상을 버리니 자손이 유언에 따라 陶山 子坐 언덕에 장례 지내되 봉분도 없이 평총으로 하고 표석도 세우지 아니하여 산언덕과 같아서 여러번 병화에 실전되고 말았다.
이조 숙종 戊午년(=1678)에 선생의 증손 양성현감 휘吹의 실전한 묘소를 찾다가 돌무덤에서 평총한 誌石을 얻어 비로소 선생의 실전된 묘소 광중으로 알고 또다시 실전이 될까하여 이에 봉토를 하고 墓碣을 세웠다.
이 고을 사람들이 선생의 충절을 사모하여 우러러 보지 않는 이 없어서 遺命平塚(유명평총)이라는 네 글자를 제목으로 삼아 다투어 그 충절을 찬양하였고 선비의 실력을 고사하는 데도 시제를 삼어서 재주 있는 선비들의 시로 그 충절을 감탄케 하였다.
3) 고려명신전 (1822, 남공철)
태조가 사렴을 배하여 좌사간을 삼아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드디어 陶山으로 들어가 더욱 문을 닫고 손님을 끊고서 졸할 때에 임하여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나는 고려조의 옛 신하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서 나라를 보존하지 못했고 나라가 망하자 또 능히 몸이 殉國하지 못했으니 천하의 죄인이라.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서 先王와 先人을 뵙겠느냐. 내가 죽거든 깊은 산 속에 장사 지내고 흙을 쌓아 올리거나 돌을 세우지 말고 자손 중에 이미 벼슬한 자라도 다시는 벼슬하지 말라." 했다.
4) 안렴사김공 묘갈록 (1830, 남공철)
臨終때 여러 아들들에게 訓戒하기를 "나는 고려왕조의 옛 신하로서 집안 대대로 정승이 되었는데, 이미 국가를 보존할 수 없고 또 나라와 더불어 함께 없어지지 못하였으니 나는 천하의 죄인이다. 무슨 면목으로 죽어서 우리 임금과 조상들을 저승에서 뵙겠는가. 내가 죽거든 깊은 산에다 장사지내어 봉분도 만들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아서 사람들로 하여금 손가락질을 하여 아무개의 무덤이라고 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죽으니 여러 자식들이 유언대로 장례를 치렀는데 봉분을 안 모으고 비석도 세우지 않았다.
후일에 선비를 시험(과거)을 본 적이 있는데, 遺命平塚(유명평총-유언대로 평평한 무덤을 만들었다)을 제목으로 삼았다. 世代가 점점 멀어져 葬地를 잃었는데, 숙종4년 戊午(무오-1678) 에 공의 증손 양성현감 吹(취)의 잃어버린 무덤을 찾음으로 인하여 그 작은 表石을 자세히 살펴보아 비로소 공의 幽宅(유택)인 줄 알았다. 그리하여 즉시 봉분을 만들어 해마다 時享 지내기를 계속하였다.
5) 안렴사공 신도비명 (1840이전, 남공철)
臨終時에 여러 아들들을 돌아보시며 遺言하시기를 "나는 麗朝의 옛 臣下로서 이미 임금을 도와 나라를 保存치 못하고 나라가 亡하여도 또 따라 죽지 못하였으니 天下의 罪人이라. 무슨 面目으로 地下에 들어가 先王과 先祖들을 뵈올 것인가. 내가 죽거든 깊은 山中에 묻고 封墳도 하지 말고 表石도 세우지 말고 자손 중에서 이미 벼슬한 사람은 다시는 벼슬하지 말라" 警戒하시었다. 때문에 生存時의 文蹟과 其他 事蹟 및 生卒日時와 墓所등을 모두 紛失하여 傳하지 못하고 野史나 遺乘에 傳하는 것은 다만 이러한 것 뿐이다.
公이 돌아 가신제 300여년만에 後孫이 처음으로 石槨中의 誌文을 얻어서 살펴보니 公의 墓所인지라 지금의 청원군 오창면 모정리 陶山 子坐의 언덕에 모셨다.
6) 영모재 안내서
안렴사공 묘소 : 공이 하세하신 뒤에 유명에 따라 평총을 하였는데 병란과 시세혼란으로 실전되었다가 1678년(몰후 273년만인 숙종4년 무오년)에 지석의 발견으로 묘지를 확인하여 미봉을 하였고, 1938년(무인) 2월에 다시 봉축하고 석의를 갖추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