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筆蹟-조선22 (金澍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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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3-23 15:58 조회2,131회 댓글0건본문
선조 筆蹟-조선22 (金澍김주)
안렴사공 김사렴(金士廉)의 8세손 김주(金澍) 선조는 1512(중종 7)∼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이며.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입니다.
그의 필적 1점 (서간-초서)이 槿墨(仁) (오세창, 1995, 성균관대학교박물관, 解題 任昌淳)에 실려 있습니다.
▣ 신고 한국서예사 (金基昇, 1975, 정음사)
⊙ 金澍의 草書
김주(1512-1563) 는 본관이 안동, 安原君 公亮의 아들로 자는 應霖. 호가 寓庵이다.
중종26년(1531)에 진사가 되고, 1539년의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湖堂에 올랐다.
전라, 황해감사를 역임하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명종18년(1563)에 [종계변무]사건으로 명국에 봉사하였으나 연경 객관에서 52세로 병사하였다.
선조23년(1590)에 광국훈에 책록, 花山君에 봉해졌다.
저서에 우암집이 있다.
[도서해제]와 [안동김씨족보]에 의하면 "文章과 言議에 뛰어났었고, 퇴계이황, 하서김인후, 금호임형수 등과 친하였으며 초서를 잘 썼다."
▣ 디지털한국학 홈페이지
⊙ 김주(金澍)
1512(중종 7)∼1563(명종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이다.
1531년에 진사가 되고, 1539년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호당에 뽑혔다. 전라도·경상도의 관찰사 및 개성유수·대사헌을 지냈고,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1563년 제학으로 있을 때 선계변무사(璿系辨誣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명을 완수하였으나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1590년(선조 23) 그의 공이 인정되어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임형수(林亨秀) 등과 교유가 깊었다.
문장이 뛰어났고 초서를 잘 썼다.
저서로는 《우암유집》이 있으며,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兪炳勇〉
⊙ 문과방목
김주(金澍) 중종34년 별시에 입격한 김주(金澍)의 성명(姓名)
김주(金澍) 선조5년 별시에 입격한 윤엄(尹儼)의 처부(妻父)
김주(金澍) 선조24년 식년시에 입격한 이심(李<0x3D00>)의 외조부(外祖父)
김주(金澍) 선조28년 별시에 입격한 윤민일(尹民逸)의 외조부(外祖父)
김주(金澍) 광해군1년 증광시에 입격한 윤민헌(尹民獻)의 외조부(外祖父)
김주(金澍) 광해군2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희(金憙)의 조부(祖父)
김주(金澍) 광해군4년 식년시에 입격한 이목(李<목0x60B5>)의 외조부(外祖父)
김주(金澍) 인조5년 식년시에 입격한 김태기(金泰基)의 증조부(曾祖父)
김주(金澍) More Info.
중종(中宗)34년(1539년), 별시(別試) 갑과1(甲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12년, 임신
자(字) 응림(應霖)
호(號) 우암(寓庵)
본관(本貫) 안동(安東)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광국공신/화산군(光國功臣/花山君)
>>> 가족사항
부(父) 김량(金亮) *김공량(金公亮)의 오기임
생부(生父)
조부(祖父) 김성(金城)
증조부(曾祖父) 김종손(金宗孫)
외조부(外祖父) 이수팽(李壽彭)
처부(妻父) 진양수 이한(鎭陽守 李漢)
숙(叔) 김공망(金公望)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31(신묘) 진사시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관직(官職) 호당&(湖堂&), 대사헌&(大司憲&)
⊙ 사마방목
김주(金澍) / 中宗 26 式年 進士
【시험년도】 중종(中宗) 26 (1531) 식년(式年) 진사(進士)
【합격등위】 3등 0073
【본인성명】 김주(金澍)
【본인 자】 응림(應霖)
【본인본관】 안동(安東) 김(金)
【본인거주】 경(京)
【본인문과】 기해(己亥) 1539 별(別)*
【부친성명】 김공량(金公亮)
【부친품계】 종사랑(從仕郞)
▣ 대종회보 제62호 (1998. 10)
⊙이천 율면 본죽리
--- 안동김씨 수백년 世居阡(세거천)
--- 부회장 斗會
경기도 이천시 율면 本竹里는 우리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문중의 집성촌이다.
이 곳에 우리 안동김씨가 정착하게 된 것은 충렬공 현손 안렴사공 휘士廉의 7대손인 휘澍(주) 광국공신 화산군의 葬儀(장의)를 여주군 흥천면 歸白里에 모시고 이천시 율면 본죽리에 不 之位(부조지위)를 명받아 祠堂(사당)을 建竪(건수)함으로 이때부터 우리 안동김씨의 세거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화산군 휘주의 행장을 약기해 본다.
공의 자는 應林이요 호는 寓菴이니 안렴사공의 7대손이요 안원군 휘公亮의 셋째 아드님이시다. 배위는 정부인 전주이씨
공은 서기 1512년(중종7년 임신)에 출생, 1531년(중종26년 신묘)에 진사가 되시고, 1530년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가독서와 내외직을 역임후 대사헌 부제학 송도유수 전라도 황해도 양도 감사를 거쳐 文衡(문형)으로 薦擧(천거)되었고, 또 한성좌우윤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참판과 양관제학을 지내셨다.
1563년(명종18년 계해)에 종계변무사로 명나라 연경에 가셔서 사명을 마치시고 1563년 9월 17일 燕館(연관)에서 세상을 떠나시니 향년 52세라. 명나라 황제가 관의 수의를 특사하여 서장관 李陽元으로 하여금 염습과 호상을 치르게 하였다.
是年에 명나라 황제가 예조판서에 양관대제학을 추증하고 아조 선조 경인년(1590년 선조23)에 광국공신에 화산군을 봉하고 부조지위를 명하고 文端이란 諡號(시호)를 내렸다.
공은 풍채가 장엄하시고 도량이 넓으시고 문장과 도덕이 뛰어나셔서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떨치셨다.
이렇듯 공명하신고로 공의 현손대에 이르러 1室4孝가 배출하였으니 휘銑 (官은 贈통덕랑 사헌부지평)과 선의 제 銶 (贈조산대부 사헌부지평)와 구의 제 휘錫 (송우암시열 문하 사산감역불사 통훈대부 사헌부지평)과 그의 妹氏(당시 10세) 등 4남매가 그의 어머니께서 병환이 위독하시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입에 넣으시니 병환이 소생하여 7일간을 더 연명케 하여 그 효행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서기 1753년 (영조 계유) 에 조정에서 증직을 하고 영조대왕께서 친필로 [一室四孝]라고 써서 賜額旌閭(사액정려)를 내리셨다. 그 정려가 폐허된 瓦家앞에 보존되어 있으며 일실사효라 쓴 영조의 친필현판은 종손인 22대손 起鎬씨가 보관하고 있다.
화산군의 향사는 연 춘추 2회 (춘:한식일, 추:추석일)에 배향하고 있으며 화산군의 문집으로는 寓菴集 3권으로 天地人이 있는데 지파 후손인 안렴사공의 19대손 文演씨가 소장하고 있다.
요즈음 후손들이 공의 유적을 영구히 보존키 위하여 여주군 공보실에 자료 일체를 갖추어 지방문화재로 상신을 하고 있다.
⊙ 안렴사공 7대손 澍 사당건립
--- 泰相
본래 화산군의 사당은 이천군 율면 본죽리 후산 현 위치에 보존되어 왔었으나 불행히도 6.25 사변으로 인하여 관리가 소홀하여 완전 폐허가 되어 복원하기엔 속수무책으로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사변후 생계마저 어려운 형편에 사당복원 문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소종중에서는 복원건에 대하여 논의를 계속해 왔으며 복원해야 한다는 뜻은 이구동성으로 일치하였으나 소종중에는 재정이 없었으며 서로 만나면 걱정만 하고 있던 중
마침내 고향을 떠났던 안렴사공 21대손 泰相 현종 (현 안성축협 전무)께서 모친께서 늘 사당복원을 말씀하심이 여러차례이어서 어머님 (경주김씨) 생전에 소원을 풀어 드리고자 거액을 선뜻 獻誠(헌성)함으로 엄두도 못냈던 사당복원 공사를 시작함으로 諸宗의 기쁨이 충만하여 그후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사를 착공한 후 태상 종친은 공무에도 바쁜 가운데 직접 공사를 지휘감독하고 휴일이면 자손까지 동원하여 일을 도움으로 마침내 훌륭한 사당을 준공하여 영령의 위패를 봉안하고 永世是安을 告由하니 온 문중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문중에서는 태상 현종의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표창패를 수여하였다.
▣ 김은회 - 태상 현종께서 모친의 평생소원을 풀어드렸으니 또한 효자(孝子)일세.
▣ 김항용 - 잘 읽었습니다. 문집(우암유집) 원본이 어딘가에 보관돼 있을 것 같습니다. 영조의 사액 사진도 보고 싶구요.
▣ 김재원 - 문중의 숙원사업이 이루어 지신데 축하드리고 함께 기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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