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筆蹟-조선24 (국역 석릉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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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3-26 03:05 조회1,780회 댓글0건본문
선조 筆蹟-조선24 (국역 석릉세적)
서운관정공파에서 1996년에 발간한 [국역 석릉세적]을 보면
사진으로 볼 수 있는 필적으로 이미 소개해 드린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이 6점이 실려 있습니다.
○ 유연재공 김희수 유묵 : 참고문헌 한국미술전집11 서예
○ 동고공 김로 유묵 : 대동서법 (규장각 소장)
○ 몽촌공 김수 필적
1) 임진난후 선조40년 (1607) 정월, 일본에 부사로 가는 교리 경?(청주인)을 보내는 자리에서 호조판서 김수가 읊은 시이다. (참고문헌 : 조선사료집 사진합편)
2) 선조23년 (1590)에 늙은 사람을 예우하는 뜻으로 나이 많은 임금과 정2품 70세 이상의 문관이 입참하여 기명하던 기로소(기사)에서 수연에 참석한 병조판서 김수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적어 놓은 시문이다. (참고문헌 : 대한민국역대명현필보)
3) 몽촌공 김수 유묵 : 민족문화대백과 제4권 소재
○ 하당공 김첨 유묵 : 근역서휘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서운관정공파 金圭台 종친께서 識(지)한 [석릉세적 비고] 를 보면
이 대단한 작업을 위하여 애쓰신 서운관정공파 종친 여러분의 진한 열정과 쏟아부은 노력을 절절이 느낄 수 있습니다.
1. 서론
본인은 학창시절 정철의 관동별곡이나 이이의 십만양병론에 대해서는 교과서를 통해 늘상 접해 왔다. 그러나 이들이 조선조 중엽 하당공(김첨)이나 몽촌공(김수)과의 관계는 어떠했으며 당시의 소속 정당이라 할 수 있는 계열은 어디에 속하는지? 과연 두 분 조상은 문장이나 경륜에 있어서 이들만 못하였는지?
본인은 이것을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던 중 20여년 전부터 조상의 기록을 찾아내고자 국립중앙도서관이나 규장각 등을 시간만 있으면 찾아가 열람해 보고 조상의 기록이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복사해 두었다.
그리고 어느정도 모집된 자료들을 정리하여 분석해 본 결과 하당공이나 몽촌공은 결코 송강이나 율곡에 뒤지지 않는 문장과 경륜이 있었으며 이들과는 정적 관계에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따라서 본인은 두분 조상들을 미화시킨다는 차원을 넘어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 시대의 상황을 고려하여 입증자료를 제시코자 하며, 그동안 수집된 기타 조상들의 기록들도 국역 석릉세적에 덧붙여서 오늘에 재조명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2. 문헌에 의한 조상의 기록 및 필적
① 휘自行 및 휘仲演의 기록
[忠敏公雜誌]에 의하면
휘自行이 郎官시 松都 契員으로 安和江 물가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술을 마셔 모두들 취하게 되자
낭관 趙之夏가 " 이 뒤에 비록 자식들 까지라도 서로를 의좋게 지내도록 합시다" 하자 그저 턱을 끄덕일뿐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제일 끝자리에 앉아 있던 韓明澮가가 "그렇게 합시다" 하므로 좌중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웃었다.
그리고 단종의 비문에 의하면
노산군을 영월에 안치하기 위해 세조의 명에 의하여 첨지중추부사 魚得海로 하여금 군사 50명을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고 군자감정 金自行 판내시부사 洪得敬을 수행시키도록 하였다. (金石一斑)
또한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조11년2월에 휘自行이 승 설경을 亂杖한 일에 연좌되어 변명을 얻지 못하고 끝내 誣服하기에 이르러 옥에 갖힌 후 오늘 내일 하고 있었는데 둘째 아드님이신 진사 휘仲演께서 상소문을 작성하여 上께 올리시어 임금이 이를 보고 방면한 기록이 전한다.
② 휘希壽 및 휘魯의 기록과 필적
< 기 소개 생략 >
③ 휘弘度의 기록
< 기 소개 생략 >
④ 荷堂공(휘瞻) 및 夢村공(휘 )의 기록과 필적
< 기 소개 생략 >
⑤ 西堂공 휘誠立의 기록
< 기 소개 생략 >
3. 조상들의 정계인맥
4色이라 함은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을 말하는 바, 우리 조상들은 대부분 남인으로서 (도표1) 및 다음과 같은 입증자료에 의해서 남인 집안임을 밝혀 두고자 한다.
1) 징비록 (서애 유성룡 저)
선조24년 5월이 夕講하는 자리에서 부제학 金 는 동인인 좌의정 유성룡의 지시를 미리 받고 명나라 조정에 대한 奏聞(주문) 반대의견을 선조에게 아룀.
2) 癸甲日錄 (추연 우성전 저)
선조 辛卯년 (선조24년, 1591) 臺諫들이 建儲議問題(건저의문제)로 정철의 죄를 탄핵하고 이산해가 그 의논을 주장하여 玉堂에서 장차 정철을 탄핵하는 ?자를 올리려 하여 부제학 金 가 사성 우성전의 집으로 가 이 일을 읜논하니
우성전이
"이렇게 까지 파급시킬 수 없다" 하여 金 를 만류하고 못 가게 하였는데 시간이 지연되어 올리지 못하였으므로 대사간 홍여순이 우성전을 탄핵하면서 남, 북 두파로 갈리게 되자 휘 께서 남인이 됨
3) 미수기언 창동교거기 (미수 허목저)
우리 집안에서 숙종3년 (1676) 창동(남창동)에 거주하는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을 방문하여 휘弘度의 墓地銘을 부탁하였는 바, 허목이 찬한 비문이 아직까지도 전하여지고 있다.
4) 立案(입안자 최중태)
?원전 참봉인 金 (김개)가 서기 1694년 (甲戌) 후사가 없이 졸하자 繼者를 숙종28년 (1702) 7월에 동생인 진사 金銓(김전)의 둘째아들 金得濟(김득제)로서 立後할 것을 (문중의 어른인 통덕랑 金,金覽(김?) 및 양가의 처들의 동의에 의해) 관에 신고한 바 예조에서 입안하였으며, 입안자는 남인인 동부승지 최중태(경주인)이다.
5) 남인제가보 (1-6권)
영인본으로 남인 집안인 경주최씨, 안동김씨, 청주한씨 등의 家系를 기록한 것으로서 제5권에는 우리 안동김씨 집안의 경우 휘圭璨(규찬)과 휘圭昇(규승)까지 수록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4. 결어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조상들은 문장과 경륜 및 필적에 있어서도 다재다능하였으며, 특히 조선조 중엽 정철과 이이에 대적할 만한 몽촌공(=김수)이 남인으로서 관이 영중추부사(정1품)에 이르렀으나
불행히도 癸丑獄事(계축옥사, 광해5년, 1613)에 손자 秘(비)의 무사옥으로 삭직되어 졸한 후 우리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인조반정(1623)에 몽촌공이 다시 복관직(판중추부사)되고 우리 조상들도 관직에 하나 둘 등용되기는 하였으나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오르신 분은 없고 駱峯공 (휘振) 兵史공 (휘 ) 만이 종2품에 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더구나 甲戌獄事(숙종20, 1694)이후 남인이 영구몰락의 길로 접어들 때 우리집안도 이와 인맥을 같이 하였으며 경종이후 조선말기까지 관직에 나가신 분은 秋山공 (휘유憲)을 비롯하여 당상관인 정3품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로 드물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뒤안길 속에서도 조상의 기록을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는바 우선 이번에 국역되어진 석릉세보 이라도 학계 및 관련단체에 널리 배포하여 왜곡된 조사의 기록들을 바로잡아야 함은 물론 가는 선대의 인물을 후손의 사명으로서 부활케 하여야 하겠다.
▣ 김재원 -
▣ 김재원 - ~^0^~
▣ 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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