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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손(朴仲孫) 신도비명(神道碑銘) - 김수녕(金壽寧) 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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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7-22 00:34 조회1,634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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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조선국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숭록대부밀산군시공효 박공신도비명(有明朝鮮國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崇祿大夫密山君諡恭孝朴公神道碑銘) 병서

김수녕(金壽寧) 

밀산군(密山君) 박공(朴公) 중손(仲孫) 자(字) 경윤(慶胤)이 세상을 떠났다. 장사를 지내려 함에, 그 아들들이 상락(上洛) 김수녕(金壽寧)에게 신도비명을 지어달라 청하기를, “그대는 어릴 적부터 우리 집을 왕래하였으니 선군(先君)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네. 청컨대 선군의 높은 덕행과 큰 공로를 드러내어, 민멸되지 않고 영원히 전해질 수 있도록 해 주시게.” 하였다. 이때 수녕(壽寧)도 모친상을 치르는 중인지라 서로 붙잡고 통곡을 하였다. 그리고 신도비명 짓는 일을 사양하였는데, 들어주지 아니했다. 살피건대, 박씨(朴氏)는 신라(新羅)에서 시작되었다. 신인(神人)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라의 시조가 되었으니, 사씨(史氏)가 역사에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그 후손들이 삼한(三韓)에 퍼져 살며 대대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중에 밀양(密陽)에 사는 자들이 가장 드러나 망족(望族)이 되었다. 고려(高麗) 말에 판도판서(版圖判書) 벼슬을 지낸 사경(思敬)이라는 분이 계셨다. 이 분이 공의 고조(高祖)이신데, 어질고 후덕한 군자였다. 판서(判書)께서 침(忱)을 낳았으니, 국조(國朝)에 들어와 우리 태조(太祖)를 섬겨 공로가 있었으므로 이름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권(錄券)에 실리고 벼슬은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이르렀다. 전서(典書)께서 강생(剛生)을 낳았다. 유아(儒雅)한 것으로 명망이 드러났고,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어 선정(善政)이 있었으며,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추증받았다. 찬성(贊成)께서 공(公)의 아버지인 절문(切問)이라는 분을 낳았으니, 행실이 돈독하며 성품이 문아(文雅)하였고, 세상을 떠날 때의 벼슬이 교서 정자(校書正字)였다. 공의 공로 덕분에 순충적덕병의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이라는 공신호를 하사받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처음에 공의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왕씨(王氏)가 임신하였을 때에 꿈에 집채만한 큰 소를 보고는, 속으로 이상하게 여겨 찬성공께 말하니, 찬성공이 말하기를, “집안이 창성(昌盛)하려면 징조가 반드시 먼저 보이는 것이니, 아마도 아이가 있게 되어 우리 집안을 중흥시킬 것 같습니다.” 하였다. 찬성공은 부인에게 아이를 잘 거두어 양육할 것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뒤 7개월 만에 공이 태어났다. 공은 준수하고 총명하였고 어릴 적에도 놀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조금 자라서는 스스로 책을 끼고 다니며 글을 읽을 줄 알았다. 15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했다. 다시 어진 스승과 벗들을 따라 배우며 학문을 닦고 문장을 수련하여, 선덕(宣德) 을묘년(1435, 세종17)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였다. 집현박사(集賢博士)에 선보(選補)되었다가 승진하여 부수찬 지제교(副修撰知製敎)가 되었다.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이조 좌랑(吏曹佐郞)에 전보되어 춘추관(春秋館)의 직임을 겸하게 되니,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그 즈음에 성관(星官)들이 학문이 부족하고 기술이 없으므로 세종(世宗)께서 근심하여 특별히 공의 벼슬을 굽혀서 서운판관(書雲判官)으로 삼았다. 공이 정미(精微)하고 오묘(奧妙)한 이치를 잘 궁구하여 조금도 차실(差失)이 없으니, 산술(算術)에 뛰어난 자라 할지라도 공을 앞서는 자가 없었다.


누차 전보되어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고 지제교는 그대로 맡았다. 첨지통례(僉知通禮)로 동첨사(同詹事)를 겸임하였다. 세종께서 말년에 병환으로 정사(政事)를 잘 돌볼 수 없게 되자, 군기(軍機) 이외의 일은 모두 세자(世子)에게 보고하여 결정하도록 하교하였다. 사무(事務)의 출납(出納)이 첨사(詹事)를 경유하였는데, 공이 그 직책을 잘 수행하니 세상의 여론이 더욱 그를 소중하게 여겼다. 의정부에 들어가 검상(檢詳)과 사인(舍人)을 지냈다. 재차 사헌부에 들어가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세 번째 들어가서는 집의(執義)가 되었다. 사헌부에 있을 때에는 오직 기풍을 지키고 격양시키는 일에 힘을 다하였으므로 조정의 기강이 엄숙해졌다. 낭관이나 사인(舍人)으로 있을 때에는 단정하고 고아하여, 임금을 보필할 대신의 풍도가 잠재되어 있었다. 재능있는 관원으로 추천되어 병조(兵曹)의 겸지사(兼知事)가 되었다. 오래지 않아 발탁되어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누차 승진하여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년, 단종1년) 봄에 임금이 친히 과거를 보여 선비를 뽑았는데, 그때 공이 대독관(對讀官)을 하였다. 겨울에 금상(今上)께서 내란(內亂)을 평정할 때에 공이 요직에 있으면서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좌우에서 도왔다. 내란을 평정하는 일이 잘 마무리되었는데, 공의 공로가 매우 컸다. 드디어 병조참판(兵曹參判)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제수하였다. 시대의 어려운 일을 공의 도움으로 진정시켰기 때문이다. 공로를 기록하여,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功臣)이라는 공신호(功臣號)를 내리고 응천군(凝川君)을 봉하였으며, 그 얼굴을 그려서 맹부(盟府)에 보관하였다. 병조에서 옮겨져서 한성부 윤(漢城府尹)이 되었다가, 다시 사헌부에 들어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공조, 이조, 형조, 예조 등 4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이전의 봉호를 고치어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졌다. 가는 곳마다 큰 강령(綱領)을 잘 유지하고 까다롭고 자잘한 것에 힘쓰지 아니하였으며, 인재를 천거하거나 옥사(獄事)를 처리할 때에는 공평하게 하고 영합하지 아니하였으며, 국빈(國賓)을 접대하거나 나라의 제사를 담당했을 때에는 일을 잘 처리해서 찬란히 참으로 볼 만하였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하였다.


천순(天順) 병자년(1456년,세조2년) 봄에 과거(科擧)의 시관(試官)을 맡았다. 승진하여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얼마 안 되어 좌참찬(左參贊)에 승진하였다. 기묘년(1459년,세조5년) 봄에 또 과거의 시관이 되었다. 전후를 통하여 무릇 세 번 시관이 되어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공이 뽑은 선비 중에는 이름이 알려진 명사(名士)가 많았다. 가을(1459년 9월)에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의 상사를 당하였다. 큰 슬픔으로 초상을 치르느라 몸이 야위어 앙상하게 뼈만 남았다. 삼년상을 마친 뒤 다시 밀산군(密山君)에 봉해지고 품계가 올라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성화(成化) 2년(1466년, 세조12년) 여름 5월 병신일(26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나이 55세였다. 부음(訃音)을 듣고 임금이 매우 상심하여, 정무(政務)를 정지하고, 관원에게 명하여 상가(喪家)에 가서 조문하게 하였으며, 부의(賻儀)를 갖추어 사제(賜祭)하였고, 공효(恭孝)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군(君)은 성실한 선인(善人)으로 온후하고 화락하였다. 매양 선군(先君)이 계실 때에 태어나지 못했음에 생각이 미치면, 그 슬픔으로, 살아 있는 목숨이 아닌 것같았다. 독실한 효성으로 모부인(母夫人)을 섬기면서도 오히려 그 뜻을 어기게 될까 염려하였으며, 형을 어버이 섬기듯이 섬겼다. 친인척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온 힘을 다하여 도와주었다. 산업(産業)은 그저 먹고살 만한 정도까지만 늘렸고, 별도로 넉넉히 여분을 두려고 하지 않았다. 집안에 혼자 있을 때이거나 교유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이거나 변함없이 한결같은 마음을 지녀서, 몹시 좋아하며 구차하게 영합하지도 않았고 또한 남달리 특이하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정무(政務)에 능통하여 일을 대해서 여유가 있었으나, 일찍이 조금도 겉으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공훈과 명성이 높아질수록 마음은 더욱 겸손하게 낮추었다. 누차 권병(權柄)을 맡았으나 문에는 잡객(雜客)의 출입이 없었다. 일찍이 여묘살이를 할 때에 글을 지어 아들들을 훈계하였는데, 대략 그 내용은, 고금의 사치와 검소에 따른 득실의 자취를 논한 것이었다. 계주명(戒酒銘)을 지어 자리 옆에 걸어 놓아 자신을 경계하고, 인하여 아들들을 경계시켰는데, 그 말이 간략하면서도 뜻이 심원하여 또한 세상의 훈계가 될 만하다고 한다. 그해 7월 임진일에 교하현(交河縣)의 북쪽 탄포(炭浦) 오고미리(烏告美里)에 예장(禮葬)하였다. 부인 남평현 문씨(南平縣文氏)의 무덤과 같은 언덕인데 광혈(壙穴)은 다르다.


부인은 바로 공조정랑(工曹正郞) 문승조(文承祚)의 따님이니, 맑고 아름다우며 어진 행실이 있었다. 덕 높은 군자의 배필이 되어 어진 아들을 양육하며, 집안을 화목하게 하였는데,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3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맏이는 전(栴)이니 부평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이며, 다음은 미(楣)이니 한성서윤(漢城庶尹)이며, 다음은 건(楗)이니 승정원 우승지이다. 둘째와 막내가 모두 문학(文學)의 재능이 있어서 과거에 급제하여 선대의 사업을 잘 이어받았다. 막내는 바로 수녕(壽寧)과 같은 해에 급제한 자이다. 딸은, 맏이는 또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둘째는 전설사수(典設司守) 유오(柳塢)에게 시집갔다. 부평도호부사는 첨지중추(僉知中樞) 윤삼산(尹三山)의 딸을 아내로 맞아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이름이 인열(仁烈)인데 음직(蔭職)으로 통사랑(通仕郞)에 제수되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서윤(庶尹)은 지돈녕(知敦寧) 강석덕(姜碩德)의 딸을 아내로 맞아 5남 1녀를 두었고 승지(承旨)는 서윤(庶尹) 최윤(崔昀)의 딸을 아내로 맞아 3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전설사수 유오(柳塢)는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직(司直) 윤린(尹磷)에게 시집갔으니 또한 명문 집안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아, 박씨의 선조는 / 繄朴之先

처음에 하늘에서 내려왔으니 / 肇降自天

그 전승의 기원이 멀고 멀도다. / 有遠其傳

잇달아 훌륭한 인물 나와서 / 繩繩衣冠

삼한에 명문가를 이루었는데 / 望于三韓

그 중 밀양이 으뜸이었지. / 莫盛密山

판도공은 어질고 후덕하여 / 版圖仁厚

옛 사람의 짝이 될 만하였고 / 古人與偶

몸소 애쓴 보람으로 후손이 복을 받았네. / 劬躬燾後

찬성공에 이르러서는 / 爰曁贊成

베푼 일 많았으나 보응이 가볍더니 / 施重報輕

바로 공에게 이르러 형통하였네. / 政待公亨

공은 탄생이 기이하였네. / 公生也奇

소 꿈이 좋은 조짐이라고 / 夢牛維禨

찬성공이 점을 쳤었지. / 贊成占之

공이 집안을 이어받아 / 公世其家

덕과 문채를 떨치어 / 揭德振華

이름을 과방(科榜)에 드러냈네. / 名挂賢科

어버이 섬김에 효도하고 공손하며 / 事親孝恭

넓은 아량으로 사람들을 대하였고 / 待人則容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받들었네. / 奉上則忠

얼신이 지난번에 교만하여 / 孼臣昔驕

조정에서 소란 일으켜 어지럽히니 / 毒亂于朝

임금이 그 요망함을 제거하였지. / 王殄厥妖

난리를 평정하는 공적을 이루실 때에 / 丕顯神功

공이 곁에서 크게 도왔으므로 / 贊贊惟公

큰 종에다 공훈을 새기었다네. / 勒勛景鍾

공의 명성이 더욱 높아졌으나 / 公名隆隆

공은 더 겸손히 몸을 낮추어 / 公愈匑匑

이룬 공로를 잘 보전하였네. / 以克保庸

마음은 사심없이 맑고 맑아서 / 游心冲泊

사치를 경계하고 검약 즐겼고 / 徵汰憙約

자손에게 약석 될 훈계 남겼네. / 遺誡藥石

선하다고 꼭 창성하는 건 아닌가 보다. / 善不必昌

중년의 나이로 세상 떴으니 / 中身云亡

아, 저 푸른 하늘만 바라보노라. / 粤瞻蒼蒼

훌륭한 자손들 많고 많아 / 靄靄蘭蓀

공의 가문에 가득하니 / 森立公門

공은 장생불사 하신 거라네. / 公乎長存

이에 돌에다 명을 새겨 / 爰刻銘章

삼가 아름다운 광채 드리우노니 / 式垂休光

나라와 더불어 영원하리라. / 與國無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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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효공 박중손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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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번호 : 보물 제1323호

소 재 지 : 파주시 탄현면 오금리 산19

소 유 자 : 밀양박씨 규정공파 대종회

제작년대 : 조선 전기

재 료 : 화강암

공효공(恭孝公) 박중손(朴仲孫·1412~1466)은 세종~세조 년간의 문신으로 여러 요직을 지냈으며 특히 천문(天文)을 관찰함에 뛰어난 재능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임. 박중손과 같은 언덕에 조성된 봉분은 공조정랑을 지낸 문승조(文承祚)의 딸인 정경부인(貞인敬夫人)남평 문씨의 묘이다.

묘소의 전면은 3단으로 조성하고 각 단은 1단의 장대석을 쌓았는데 각 묘앞에는 상단의 장대석축에 걸쳐 장방형의 간단한 상석(床石)을 두었고 그 앞에 각각 장명등을 세웠다. 묘역 좌우에는 각각 문인석과 무인석이 있으며 우측 무인석 아래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공효공 묘역의 장명등은 신도비 건립년대와 같은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 초기 장명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매의 부재 중 하부재는 대좌(臺座)와 화사(火舍)로 이루어져 있고 상부재는 옥개석으로 되어 있다. 등부(燈趺)인 대좌는 하대·중대·상대 등 세부분으로 구성되었고 그 위에 화사부분이 조식되었으며 옥개석은 옥개(屋蓋)와 연주대(蓮珠帶) 및 연봉형(蓮峯形)의 보주(寶珠)로 구성 되었다. 정경부인 묘 앞의 장명등은 공효공 보다 먼저 사망하였으므로 약간의 시기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노출되어 있는 두 장명등의 높이는 서로 비슷하나 공효공 묘 앞의 장명등이 둔중해 보이는데 비해 정경부인 묘 앞 장명등은 세장하며 화창은 서로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2기의 장명등 모두 조선초기의 전형적인 장명등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으며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 평가 되고 있다. 또한 묘역내의 묘제 및 기타 석물들도 조선 초기의 우수한 조성 수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공효공 앞의 장명등은전·후면은 형방(方形)으로 화창(火窓)을 내었으나 동쪽은 원형(圓形), 서쪽은 반월형(半月形)의 화창을 두어 일(日을)·월(月하)을 상징한 독특한 형태이다.정경부인 묘 앞의 장명등은 세장(細長)하면서 화창은 모두 방형으로 만들어 서로 비교되고 있다.


이처럼 특수한 조성수법과 형태를 가진 장명등은 매우 희귀한 예로 역사적,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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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김수녕 선조님의 글 잘 읽엇습니다.
장명등이 보물로 지정된 듯?
아니면 석물전체가?
궁금하네요;

김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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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덥고 지루한 날에도 여전히 열심히 자료를 찾아서 올려주시니 감동할 뿐입니다. 게시판에 올라 오니 피서 온 기분입니다. 건강하세요.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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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신도비문, 묘소 사진, 관련 자료 일체를 종합하여 올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