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회대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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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주 작성일05-07-23 17:04 조회1,346회 댓글1건본문
주회대부님 위자료 중 김환 할아버지 부분에 아래 파란색 부분을 첨부하여 주시옵기를....
■ 김환 연보 (정리 : 김주회)
김환(金丸) 1442년 문과급제
고려 말의 충신으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김사렴(金士廉, 1335∼1405)의 증손자이다. <우암집>의 저자 화산군 김주(金澍, 1512∼1563)는 김환의 현손이다.
김환은 증조부 김사렴의 "내가 죽거든 깊은 산중에 파묻고 봉분도 하지 말고 표석도 세우지 말라. 그리고 자손 중에서 고려조에 이미 벼슬하였던 사람은 다시는 조선조에서 벼슬하지 말라."는 선대의 충절의 유훈이 이어져 오는 상대(上代)의 고향인 오근(현 충북 청원군 오창면)에서 출사하기가 미안하여 여주 땅으로 이거하였다.
사정(司正)을 지냈으며, 세종(世宗)24년 (1442년), 친시(親試) 병과1(丙科1)로 급제하여 한림 주서를 거쳐 승문원 판교에 이르렀다.
1450년 (문종 즉위년) 5월, 사은사(謝恩使) 병조 참판(兵曹參判) 조서안(趙瑞安)과 형조 참판(刑曹參判) 안완경(安完慶) 등과 함께 서장관(書狀官) 김환(金丸)이 중국 황제가 준[欽賜] 세자(世子)의 면복(冕服)과 칙서(勅書)를 가지고 북경(北京)에서 돌아와 전지(田地) 10결(結)을 하사(下賜)하였다.
1451년 (문종1) 8월, 보령 현감(保寧縣監) 김환(金丸)이 하직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수령의 임무란 농사에 힘쓰게 하고 병졸을 훈련시키는 데 불과할 따름이니, 네가 가서 공경히 행하라.” 하였다.
1469년(예종1) 2월, 임금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서 비로소 의식과 같이 정사를 보았다. 구치관이 아뢰기를, “이문과 한어를 밝게 아는 자는 지금 단지 김환(金丸) 등 몇 사람뿐입니다. 만일 이들이 없으면 사대 문서(事大文書)를 아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묘는 여주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조선조방목>, <호음집>(정사룡), <이암집>(송인), <우암집>(김주), <국조인물고>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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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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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용주 종친님! 오랫만에 인사드립니다. 요즘도 백양동에 자주 다녀오시는지요? 말씀하신 부분은 저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공람용 원고의 편집방향을 살펴보면, 행적 소개는 간략히 하고 묘역 스케치를 자세히 하고 있습니다. 여주군에서 위 내용도 참고하리라 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