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일기 20---요동땅 답사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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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7-22 19:00 조회1,793회 댓글4건본문
2005년 7월 17일 (일)
1) 심양 북릉에서
어제 저녁 9시45분 하얼빈역을 출발한 열차는 7시간을 달려 아침 5시 심양북역에 도착했다. 역을 빠져 나오자 삐끼(호객꾼)들이 달려 들었으나 모두 물리치고 걸어서 버스터미널을 찾아 인근을 헤메다가 北陵[베이링] 가는 버스를 탔다.
북릉은 청태조 [누루하치]와 함께 청나라의 실질적 창업주인 누루하치의 아들 청태종 皇太極[황타이쥐]의 능이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 인조 임금을 남한산성에서 불러내려 삼전도에서 삼고구궤의 치욕을 안겨준 바로 그 사람이다. 1627 정묘호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우리 가문에서는 김시약은 정묘호란시 창성부사로 두 아들과 함께 순절, 김몽린은 병자호란에 광주 설령에서 아우(김몽웅)과 함께 순절, 김응해 장군은 1619년 형(김응하)과 함께 출정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자호란시 정방산성에서 자결하였으나 소생, 김언은 병자호란시 성천부사로 순절하였고, 이때 김세달은 13살 어린 나이에 전황문서를 한양까지 전하였다.
아침 6시반, 북릉공원[베이링꽁위앤] 앞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어 올라갔다. 북릉 아래 드넓은 면적이 북릉공원이란 이름으로 조성되어 있다. 공원 안에는 좌우에 커다란 호수가 있는데, 오른쪽 호수 수면에 ‘山東 8신선’ 형상을 화려한 의상으로 세워 놓은 것이 인상적이었다. 공원 안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디 가나 인산인해의 물결. 공원 상단에 북릉이 자리잡고 있는데 입구에 세계문화유산 淸昭陵[칭쟈오링] 이라 새겨 쓴 표지석이 깔끔하다.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산뜻한 현대적 디자인이다.
북릉 전체를 둘러 보니 400년 가까이 된 건물들이 고풍스럽고, 길을 막고 선 비각 안에는 거대한 비석이 버티고 있다. 비석이 천장 끝까지 올라가 있는데 대략 5m는 되어 보였다. 능 최상단 언덕 위에는 청태종의 능이 자리잡고 있는데, 능 전체를 시멘트로 발라 덮어 버렸다. 도굴을 방지할 목적인 듯한데 보기에 거슬려 보였다. 북릉은 따로 답사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세계문화유산 이라 해서 둘러 보았지만 고풍기가 가득하다는 것 외에는 볼 만한 것이 없었다.
2) 심양 고궁에서
걸어 내려와 북릉공원 앞 한국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심양고궁 가는 버스를 탔다. 심양고궁은 청나라를 세우고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기 전까지 청태조와 청태종 당시의 궁궐로 심양 시가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내성과 외성 주위로 4개씩의 문 흔적이 있다 하는데, 내성 대서문 앞에서 내려 걸어 들어갔다. 좌우 상가 건물이 모두 옛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청나라 시대로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소현세자, 봉림대군 일행이 인질로 잡혀와 이곳에서 8년간 지낼때 우리 가문의 김번, 김홍립 선조님께서 수행하였으므로 두분 선조님의 8년간의 숨결이 이곳 구석구석에 가득하리라는 생각에 피곤했지만 눈빛은 빛나기 시작했다.
심양고궁도 역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크게 세 구역으로 되어 있는데, 문?각 구역, 대청문-숭정전-봉황루-청녕궁(침실) 구역, 대정전 구역 으로 되어 있다. 침실인 청녕궁 앞 마당에는 솟대가 하나 서 있는데 이곳에서 청태종이 즉위하였다 하고, 숭정전 옆에는 사당이 하나 있는데 청나라 황실 족보 등이 가득했다. 대정전은 팔각건물이었다.
이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대남문 안에 있었던 조선관에 소현세자 일행이 8년간 거주하고 있었고, 각종 행사시에 초청되었을 것이므로 이곳 모든 구석구석에 우리 선조님들의 발자취가 배어 있으리라는 생각에 구석구석 살펴 보았다. 특히 솟대가 서 있는 청녕궁 앞 마당은 동영상에 담아 두었다.
대정전 옆에는 보물스런 것들이 몇 서 있었다. 안달례묘비(1654), 예왕부(누루하치5자)영벽(1636), 元代심양노성황묘비(1352), 僚代석경당, 金代대종(1151)이 줄지어 서 있고, 그 끝에 눈에 닿는 순간, ‘사얼후’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눈이 번쩍 뜨였다. ‘사얼후지전서사비’였다. 김응하 장군이 장렬하게 전사하신 그 전투를 기록한 비석이었다.
비석 정도가 아니라 대형 안내판 정도 크기의 기록비석 이었는데 글씨가 빽빽이 씌여 있었다. 표면이 너덜너덜 떨어진 데가 있어 다가가 보니, 비석은 많이 마모되었는지 탁본을 앞뒤 사면에 붙여 놓았고, 유리관을 씌워 보호하고 있었다. 안내판을 대략 훑어 보니, 1619년 누루하치가 팔기군을 이끌고 사얼후전투에서 명군을 크게 물리쳤는데, 이는 청나라를 개국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의가 있는 전쟁이었으며, 1776년에 어느 황제가 친히 이 비문을 찬하여 지금의 무순 대적방 일대의 사얼후전장에 각자하여 세웠다는 내용이었다. 비문 중에 혹시 김응하 장군 관련 부분이 있는가? 자세히 들여다 보았으나 내용이 워낙 많아서 눈이 아파서 찾기를 중단하였다. 적군이었던 청나라에서도 김응하 장군의 장렬한 전투를 칭송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을 보면 이 비석에도 적혀 있을 듯하여 디카로 여러 각도에서 찍어 두었다. 후에 확대해서 찾아볼 셈이다.
무순 대적방 일대의 사얼후전장이 어디쯤이었을까? 심양 안내 지도를 꺼내 들었다. 심양시에서 동쪽으로 30분 거리에 무순시가 있고, 바로 옆에 대적방댐이 들어선 호수가 있다. 호수 초입에 ‘사얼후 풍경명승구’가 있고 호수 끄트머리에 ‘대적방댐’이 있고, 바로 그 앞에 ‘사얼후 古城址’가 표시되어 있으나 ‘1619년 사얼후 전장지’는 보이지 않는다. 이규태의 ‘신 열하일기’ 답사기에 보면 사얼후 전장은 대적방댐에 수몰되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사얼후 古城址’ 아래 어디쯤이 아니었을까 추측하여 볼 뿐이었다. 현재 심양고궁에 있는 ‘사얼후지전서사비’도 그곳 어디에 있다가 대적방댐이 조성되면서 옮겨온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로 궁금했으나 물어볼 사람도 알지 못하고, 물어볼 중국어 실력도 되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의외의 소득에 한참을 맴돌며 사진을 찍어 대다가 심양고궁을 되돌아 나오다가 대동문 앞 교차로에서 대남문 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조선관 자리를 찾아가기 위해서... 불과 10분도 걸리지 않아서 대로변에 있는 심양시아동도서관에 도착했다. 이규태의 ‘신 열하일기’ 에 보면 여러 고증을 거쳐 조선관 자리라고 판단내린 곳이다. 조선관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일본풍 짙은 건물로 현재는 심양시아동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곳이다. 이곳 일대가 조선에서 온 소현세자, 봉림대군을 비롯한 일행이 8년간 머물던 곳이다. 물론 우리 가문의 김번, 김홍립 선조님의 이곳 생활 8년간의 흔적도 가득 배어 있는 곳이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매우 더웠으므로 매점에서 아이스크림도 몇 개 사서 입에 물고 왔다갔다 둘러 보았다.
이곳에서 내성 대남문-외성 남변문을 거쳐 흔하 강변에 이르면 강변에 ‘효종의 채소밭’이라고 하는 조선관에서 소용되는 채소를 재배하던 곳도 있고, 강 건너편에 ‘흔하변 옛 나루터’ 가 있는데, 소현세자를 비롯한 인질 일행이 넘어온 곳이라고 한다. 원래 답사일정에는 이곳 심양에서 1박하면서 흔하 강변과 요양시 요동벌판과 무순시 사얼후에도 다녀올 예정이었으나, 우리 답사팀 어린 회원 둘이 빨리 압록강 구경을 가자고 독촉하는 바람에 다수의 의견에 좇아서 압록강으로 직행하기로 물러서고 말았다.
3) 단동 압록강변으로
심양북역 역내에 있는 햄버거 집에서 점심을 때우고 단동가는 버스에 올랐다. 단동까지는 3시간 길이라고 했다. 심양-단동간에는 고속도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었다. 최근에 닦은 도로인지 매우 산뜻하고 깨끗했고, 버스도 새로 장만했는지 산뜻하고 에어콘 바람도 시원했다. 날씨는 화창하고 여름휴가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 요동벌판을 달려오다가 서서히 산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산촌에 들어와 있었다. 한국의 고향산천과 흡사했다. 충청도 제천, 단양 일원의 새로 닦은 도로를 달리는 듯했다. 아내는 경북 상주에서 문경 언저리를 가는 길 같다고 했다.
두시간쯤 지났을까 우뚝 솟은 바위산이 나타났다. 영암 월출산처럼 들판 가운데 우뚝 솟았고, 바위산이지만 부드러운 곡선의 바위가 가득한 산이었다. 책자를 들추어 보니 봉황산으로 단동에서 요동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산이다. 이 산에 양만춘 장군의 안시성이 있었다고 한다. 심양을 출발한지 3시간 만에 단동으로 진입했다. 단동기차역에 들어가 대련 가는 기차표를 확인하고 나서 걸어서 10분만에 압록강변에 도착했다.
해는 이미 넘어갔고 압록강에는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강건너 북한땅 신의주에도 어둠이 내리는 가운데 제법 큰 건물이 여러개 보였다. 강 위쪽에 위화도(이성계의 요동정벌 회군지)가 낮게 깔려 있었다. 끊어진 철교는 강 가운데서 멈추었고, 옆에 새로 선 철교에는 짐을 실은 트럭들이 간간이 지나 신의주땅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강변에는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아 압록강 야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내일 구경하기로 하고 오늘의 숙박지를 찾아 강변 상업지구 이곳 저곳을 헤매다 허름한 여관에 여장을 풀고 나서 목욕탕으로 이동해서 피로를 풀고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댓글목록
김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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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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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들어왔습니다. 여전히 열심히 사시는 모습에 감동할 뿐입니다.
서울은 많이 덥습니다. 여행중이시라니 건강조심하세요.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같이 동행하는 기분입니다. 피곤하실텐데 매번 이렇게 글을 올려주시니 피서가 따로 없습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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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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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님 축하 드립니다! 눈에 선한 기록을 대하니 감격스럽네요
저는 청궁에서 그만큼 깊은 관찰을 하지못하여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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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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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중국대륙의 역사와 지리를 편안히 집에서 감상하다니-- 감사합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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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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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에 건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