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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리(慕亭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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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작성일02-03-26 21:50 조회1,95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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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정리(慕亭里)



모정리는 오창의 동부에 자리하면서 동녘은 북이면 화상리, 서쪽은 이웃 장대리 남쪽은



학소리 북은 원리와 굳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불당산의 산자락 남쪽의 얕은 구름과 들판을



끼고 있는 마을로서 지금은 사모 모(慕)자에 정자 정(亭)이라는 글자를 쓰고 있으나 원래는



띠 모(茅)자 모정리였다.



띠는 식물의 용어로서 포아풀과에 속하는 다년초로 근경은 가늘고 길게 땅 속으로 뻗으며



줄기는 직립하여 높이 80-100 원추형이고 그것으로 옛 시골에서 우비 역할을 했던 도룡이



같은 우장을 엮고 지붕을 잇기도한 그런 식물이다.



그것으로 지은 정자가 있다고 하여 모정리 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모정골



모정동으로 불리우기도 했는데 청주군 북강외일상면인데 영조때 산정리(山亭里) 동촌리(東



村里)만 있었고 정조 13년에 띠 모(茅)자 모정리 도산리(陶山里) 일신리만 있었는데 헌종때



는 일신리가 없어지고 장성리(長城里)가 새로 생겼고 1910년 일제강점 직전에 북강외일면이



상하 2개 면으로 분리될 때 도산촌(陶山村) 장성리 환대촌(環垈村) 사모 모(慕)의 모정리로



개칭되면서 상면에 속했다.



1914년 행정개편때 도산리 환대리 장성리 일신리가 자연부락 명칭으로 변경과 합쳐 그 일



부를 병합하여 모정리와 통일하고 오창면에 속하게 되었다.



지금은 모정골 산정, 신대(新垈) 새신대를 묶어 모정 1구가 되고 장성 마을을 모정2구라



한다. 모정골은 산정 마을의 북쪽에 자리한 모정리의 원 마을이고 산정(山亭)은 모정골 남동



쪽에 위치하는데 고려말 충신 김사렴(金士廉)이 은거하던 곳으로 유명하고 신대는 산정 서



쪽에 새로된 마을 장성은 환대 서쪽에 있다.



그곳에는 돌보들이 있어서 들에 물을 대는 보가 있었고 안림산이 있는데 안렴사 김사렴의



묘가 있다. 안렴사(安廉使) 김사렴은 고려때의 충신이었는데 이성계가 고려를 뒤엎자 나라



잃은 충신이 되고 말았다. 조선조에 이르러 벼슬을 권했으나 끝내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



君)의 지조를 지킨 충신으로 이곳에서 은거했다.



마을 입구에는 1954년에 세운 정삼품 이상의 관원의 무덤이 있는 근처 큰길가에 세우는



석비인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1678년에 건축한 영모재(永慕齋)와 재직사(齋直舍)가 있



어서 마을을 빛내주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예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있는데 범배산 장자봉 밑에 금맥(金脈)이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금송아지가 들락거리는 모습이 보인다고 전해져 오다가 마침



내 그게 과학적 근거가 있었는지 일제시 그곳에 금전을 개발한 바 있어서 지금도 갱구가 보



존되어 있다.



장터인 장대리와 인접한 장성(長城)마을은 해발 126미터의 낮은 구룡지에 토성(土城)터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원형을 찾을 수는 없고 장성이라는 명칭만 남아 있을 뿐이다.





















▣ 김영환 -

▣ 김항용 -

▣ 김주회 - 안렴사공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아주시어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 김은회 - 잘읽었습니다.

▣ 김재원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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