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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제4회 안동김씨 여름캠프_02구국의 명장, 김흔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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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5-07-26 23:33 조회1,45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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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국의 명장, 김흔(金忻) 장군

 1251(고종 38년)∼1309(충선왕 1년). 고려시대의 무신.

 명장이며 명재상이었던 충렬공(휘 방경)의 둘째아들이다. 초명은 수(綬).

 음서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을 거쳐 장군이 되었다. 1272년(원종 13년) 충렬공을 따라 탐라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고 대장군이 된 뒤, 곧 사재경(司宰卿)에 올랐다. 1274년 일본원정 때는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참가하였고, 진주목사를 지냈다. 이때 수(綬)에서 흔(忻)으로 개명한 듯하다.

 28세 때인 1277년 북쪽 변방이 소란해지자 출정하였고, 이듬해 충렬공께서 무고를 입어 대청도로 유배될 때 백령도에 유배되었으나, 충렬왕의 변호로 풀려났다. 1279년(충렬왕 5년) 대방공 징(帶方公澂)이 원나라에 갈 때 원부(元傅)의 아들 정(貞) 등 의관 자제 25인과 함께 뚤루게(禿魯花)로 다녀왔으며, 1282년에도 상장군(上將軍)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원나라에 있을 때 고려인 유주(庾賙)가 원나라 황제에게 고려에 이롭지 못한 일을 건의하자, “너는 금필(黔弼)ㆍ자량(資諒)의 후손이 아니냐? 그런데 본국을 그와 같이 파괴하려 하느냐.”고 꾸짖었다.

 1285년(36세)에 원나라에서 돌아올 때, 소무대장군(昭武大將軍)으로 제수되고 삼주호두패(三珠虎頭牌)를 찼다. 1286년 지신사(知申事)로서 삼사사(三司事)가 되었고, 부밀직사사로 동진(東眞)에 가서 유민을 조사해서 데리고 왔다. 이듬해 동판밀직사사(同判密直司事)가 되었다. 

 1289년 통구(通衢)에서 군대들을 점검 사열하였고, 만호(萬戶)로서 조정군(助征軍)을 이끌어 요양행성(遼陽行省)에 갔으며, 동계(東界) 방수군(防戍軍)을 조사하고 합단(合丹)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290년 합단이 쳐들어오자 충남 연기(燕岐) 부근에서 격파하고 죽전(竹田)에 이르러 나머지 적들을 소탕하였다. 그 공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고 원나라로부터 궁시ㆍ안(鞍)ㆍ옥대(玉帶) 등을 받았다.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에서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가 되었다.

승려 일영(日英)이 한희유(韓希愈)가 모반을 꾀한다고 무고하므로 인후(印侯)와 함께 이를 제거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으나, 마침 원나라에 갔던 충렬왕이 무고임을 밝혀 한희유가 무사히 귀국하여 중용되자 귀국하지 않았다.

 1300년 8월 16일 아버지 충렬공께서 병환으로 개성의 백목동(栢木洞) 앵계리(溪里)에서 돌아가시어 9월 초3일에 예안현(禮安縣) 서쪽 산록(山麓)에 유교(遺敎)에 따라 안장(安葬)하였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자들이 예식대로 장사 지내는 것을 방해하였다. 원나라에 머물던 김흔이 귀국하여 복상을 마치고 다시 원나라로 돌아갔다.

 1306년(충렬왕 32) 한희유가 죽자 연경에서 7년 만에 돌아와,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삼중대광(贊成事咨議都僉議司事三重大匡)이 되었다. 충선왕이 즉위(1308년)하여 이르기를, “대덕(大德) 3년(1299년)에 본국의 무뢰한 무리가 장차 난을 꾀하고자 하거늘, 흔(忻)이 만호 인후와 더불어 능히 먼저 알고 난을 진정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상(賞)하여 특히 서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충선왕에 의해서 선친 김방경에게 선충협모정난정국공신(宣忠協謀定難靖國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의 칭호를 추증하고 시호를 충렬(忠烈)이라고 하였으며 왕의 명령으로 신도비(神道碑)를 세웠다. 이 신도비가 우리 역사 기록상 최초의 신도비라 하는데, 그 명문이나 찬자, 서자 등의 내용은 알 수 없다.

 한희유가 죽고 난 뒤에 찬성사 자의도첨의사사로 임명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의 작위를 더하여 받았으며, 충렬공의 뒤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졌으므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 충렬공의 유언에 따라 만호의 관직을 형(김선)의 아들 김승용(承用)에게 물려주었다.

1308년 충선왕 원년에 59세로 몰하였다. 1580년 발간된 경진보에는 배위 기록이 없으며, 1남[휘 승고(承固)] 2녀를 두었다. 장녀는 민적(여흥인 민종유의 아들)에게, 차녀는 조련(조인규의 아들)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성품이 활달하면서도 인자하였으며, 특히 친척 가운데 곤궁한 자를 잘 구제하여 주었다고 한다.

 1995년 <연기대첩연구>, 1997년 <충렬공의후예들> 책자가 간행되었고, 1997년 연기군 서면 국촌리 정좌산 아래에 <김흔장군 연기대첩비> 건립, 2000년 연기군 고당저수지 군립공원에 거대한 <연기대첩비>가 건립되었는데, 이 안에 김흔 장군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에 연기군 향토사학계, 공주대학교 역사학자 이해준, 윤용혁 교수 등 공주대학교 박물관팀, 당시 연기군 안동김씨 종친회장 김해연(金海演) 등 연기군 안동김씨종친회에서 중추적 역할을 맡았다.


◈뚤루게(禿魯花)

 고려 후기에 몽골 숙위를 위해 인질로 보낸 왕족ㆍ귀족의 자제.

 몽골이 이민족을 지배하는 방식의 하나였으며, 1241년(고종 28)에 왕족인 영녕공 준(永寧公 嗾)과 귀족 자제 10명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1271년(원종 12)에는 세자 심(諶 충렬왕)과 송빈ㆍ설공검 등 귀족 자제 20명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를 꺼리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1275년(충렬왕 1)에는 선발된 사람에게 3등급을 초월하여 관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元)나라와의 관계가 점점 깊어지면서 1279년에는 대방공 징(帶方公 砒)이 김방경(金方慶)ㆍ원부(元傅)ㆍ박항(朴恒)ㆍ허공(許珙)ㆍ홍자번(洪子藩)ㆍ한강(韓康)ㆍ설공검ㆍ이존비(李尊庇)ㆍ김주정(金周鼎) 등의 자제를 선발하여 보내기도 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일정 기간을 보낸 뒤에 귀국하였으나, 한사기(韓謝奇)처럼 가족을 이끌고 원나라에 가서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선발하여 보냈으나, 1313년(충선왕 5)에 왕족인 고(暠)를 보낸 것을 마지막으로 기록에 나타나지 않으며, 다만 고려 국왕이 세자 시절에 원나라에서 생활하는 관례는 지속되었다.


◈만호 시절 지으신 시

 만호(萬戶) 시절(1285년 이후) 고향인 안동 영호루(映湖樓)에 올라서 그곳에서 오래 전(10년 전) 일을 회상하며, 영호루에 걸려 있는 아버지 충렬공의 글에 이어 시 한 수를 지었다. 충렬공께서는 신사년(1281년) 제2차 일본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고향인 복주 영호루에 이르러 시 한 수를 지었다.


<충렬공께서 지으신 시>

                복주(福州) - 동문선 제20권

     山水無非舊眼靑 산과 물은 모두 옛 눈에 보던 푸르름인데

     樓臺亦是少年情 누대도 또한 바로 소년 때 정일러라

     可憐故國遺風在  기특하여라 고국에는 옛 풍속 남아서

     收拾絃歌慰我行 악기와 노래를 모두 거두어 모아 내 걸음을 뒤로 하네


<도첨의공 (휘 흔)께서 지으신 시>

                영호루(映湖樓) - 동문선 제20권

     十載前游入夢淸 10년 전 놀던 일 꿈에 들어오더니

     重來物色慰人情 다시 오매 풍경 인정을 위로하네

     壁閒奉繼嚴君筆 벽 사이에서 엄군주의 글씨를 이어 쓰노니

     堪咤愚兒萬戶行 어리석은 아들의 만호 걸음이 부끄럽구나.


◈중국의 고승 몽산덕이와의 만남

 47세이시던 1296년(충렬왕 22년) 겨울, 원나라 중오(中吳)의 휴휴암(休休庵)이라는 작은 암자에 머물고 있던 고승 몽산덕이(蒙山德異 1232-1298?)에게 고려의 만수상인(萬壽上人)이 찾아갔다. 이때 고려의 내원당대선사 혼구(混丘 : 일연의 고제)를 비롯해 충렬왕의 공주들, 전 도원수 상락공 김방경, 재상 김흔(金昕) 등이 만날 뜻을 전했다.

 이 내용이 기록된 법문경치(法門景致)는 제경촬요(諸經撮要)에 수록된 내용으로 경북대 남권희 교수에 의해 1994년 봄에 발견되었다.

몽산덕이는 13세기 후반 중국에서 활동한 고승이다. 고려에는 다녀가지 않았으나, 그의 저술이 조선조까지 유행할 정도로 우리 나라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제자 철산소경(鐵山紹瓊)이 1304년부터 3년간 고려에서 머물렀는데, 동안거사 이승휴(李承休)에게 간접적으로 감화를 주었다. 철산소경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성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는데, 그 내용을 1306년(충렬왕 26년) 9월에 민지(閔漬)가 찬(撰)하고 봉익대부밀직사부사 판비서시사문한학사 문영공(휘 순恂)께서 서(書)하여 <고려국대장이안기(高麗國大藏移安記)>에 강원도 회양부(淮陽府)에 세웠다.


연기대첩

 연기대첩은 고려 충렬왕때의 원나라의 반란군이었던 합단적이 고려로 쳐들어와 온 강토를 유린하다가 1291년(충렬왕 17년) 5월 1일 이곳 연기 정화산에 침입한 것을 격퇴시킨 연기지역에는 역사상 그 유례가 없었던 대승첩이었다. 적의 침입에 고려와 원나라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5월 2일 동이 틀 무렵 정화산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너무 강력하게 저항하여 우리 군사들이 두려워하고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에 김흔 장군은 "후퇴하는 자는 엄히 참하리라" 하고 앞장 서 적의 예봉을 꺾고 진격하여 적을 크게 격퇴시켰다.

 정화산 전투에서 패주한 합단적은 남북으로 도주하였다가 5월 8일 전열을 재정비하여 연주산으로 다시 침략해 왔다. 연주산 전투에서는 한희유 장군이 앞장 서 적을 공격하여 격퇴함으로써 전후 2년여에 걸친 합단의 침입이 종식을 고하였다.

 이처럼 연기대첩은 합단적의 유린을 종식시킨 결정적 승전이었음에도 후대에 이 대첩을 기념할 어떤 유적도 남겨 놓지 못하였음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마침 연기대첩에 참여했던 김흔 장군은 안동김문의 중시조인 충렬공 김방경의 둘째 아들로 비록 장군의 직계 후손들이 연기지역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연기대첩지의 역사성을 기리고 아울러 방계의 조상을 기리는 깊은 뜻으로 이 비를 새겨 멀리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 1997년 5월 안동김씨 연기종친회


◈합단(哈丹)의 침입

 1290년(충렬왕 16) 원나라의 합단(哈丹)이 고려를 침입한 사건. 원나라의 반군(叛軍) 내안(乃顔)의 부장이었던 그는 만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원나라 장수 내만대(乃蠻帶)에게 패하자 방향을 바꾸어 고려의 동북변을 침입하였다.

 고려는 중군만호(中軍萬戶) 정수기(鄭守琪), 좌군만호 박지량(朴之亮), 우군만호 김흔(金忻)으로 하여금 각각 금기산동(禁忌山洞)·이천현계(伊川縣界)·권가현계(拳縣界)를 지키도록 하는 한편, 원나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합단의 무리는 원나라의 쌍성(雙城)을 점령하고 고려의 등주(登州:안변)를 함락하였으며, 이듬해 철령(鐵嶺)을 넘어 교주도(交州道)의 양근(楊根)을 점령하였다.

 이에 왕은 강화로 파란하는 한편으로 원주별초(原州別抄) 소속의 원충갑(元沖甲)이 원주에 들어온 적을 물리쳤다. 원나라도 1만의 군사를 보내 고려를 도왔다. 원주에서 패한 합단의 무리들은 계속 남하하여, 주력은 충주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들은 다시 연기에 집결하였다가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의 급습으로 대패하였다. 그들의 기병부대는 다시 전렬을 정비하였으나 한희유(韓希愈)의 추격으로 합단과 아들 노적(老的)은 2,000여 기를 이끌고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이로써 1년 6개월 동안의 합단의 침입은 끝나고 9월 왕은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내안(乃顔 ?∼1287)

 원나라 태조의 막내동생. 흥안령 동쪽 땅을 차지하고 있던 중, 1287년에 동방의 모든 왕들을 충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도망가 있던 유초에게 협조를 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므로 금교에 도망한 것을 잡아죽였다. 원나라 세조는 내안을 친히 정벌하여 사로잡고 일단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의 잔당이 합단(哈丹)과 합류하여 원의 동쪽과 고려의 북변을 침입, 원나라 성종(成宗)이 이를 토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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