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제4회 안동김씨 여름캠프 자료집_08 공산성과 선조님 4위 불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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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작성일05-07-29 06:16 조회1,423회 댓글0건본문
▣ 공산성과 선조님 4위 불망비
■ 공산성
사적 제12호. 475년(문주왕 1)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성터는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이며 사방에 석루(石壘)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대부분 조선 중기에 개수된 것이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높이 약 2.5m로 돌로 쌓았다.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다졌다. 너비는 3m이다. 동쪽 성벽 밖에 토성이 있는데, 높이는 무너져서 알 수 없으며, 너비는 약 3m이다. 서쪽 성벽은 본래 흙은 다져서 쌓은 다음 그 위에 돌로 덧쌓았다. 높이는 4m 정도이다. 지금은 원형을 알 수 없는 서문터(현재는 통로) 남쪽은 석재로 쌓았는데, 너비 4.5m, 높이 3m이다.
성벽 안에는 7∼8m의 호(壕)가 남아 있다. 북쪽에는 조잡한 석축성벽(石築城壁)이 높이 2m, 너비 1.5m 정도로 남아 있으며, 수구(水口)도 있다. 남쪽에 남문터[현재 진남루(鎭南樓)]가 있고, 그 서쪽은 높이 3m, 너비 3.7m로 석축하였다.
성내에는 너비 11m의 호가 있다. 진남루 앞의 넓은 터는 백제의 궁터이고, 공북루(拱北樓)의 윗부분은 건물터로 추정된다. 또, 이 부근에는 우물터 3개가 있다. 성내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ㆍ광복루(光復樓)ㆍ쌍수정(雙樹亭)ㆍ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이곳 공산성은 역사적 사건의 중심이 되곤 했다. 나ㆍ당연합군에 대항하는 백제 부흥운동이 공산성을 거점으로 벌어졌으며, 822년에 김헌창(金憲昌)의 난이 이곳에서 평정 되었다. 1623년 이괄(李适)의 난 때는 인조(仁祖)가 피난하였던 곳이다.
이곳 공산성 입구에는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신 우리 가문 선조님 네 분의 불망비가 세워져 있다.
■ 충청도관찰사 역임 선조님 4분
- 휘 제갑, 휘 억령, 휘 시헌, 휘소
◇ 문숙공 휘 제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 조선 중기의 문신. 의사(義士).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영상공 휘 석(錫)의 아들.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으로서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1553년 홍문관 정자(弘文館 正字)가 되고, 3년 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쳐 1573년(선조 6) 정언(正言), 1581년(선조 14)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朴謹元) 등과 함께 이이(李珥)ㆍ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88년 평안도 지역의 국경 방어 강화책의 일환으로 특별히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임명되었지만, 70세에 가까운 늙은 문관을 보내는 것이 불가하다는 병조판서 정언신(鄭彦信)의 반대로 해임되었다. 1592년 원주목사(原州牧使)로 부임하여 임진왜란을 만나 왜장(倭將) 모리(森吉成)가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주민들을 이끌고 원주의 요새인 영원산성(令鳥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다.
당시 문숙공께서는 대부분이 아녀자와 노인인 백성과 병사 5,000명을 이끌고 영원산성으로 들어가시면서 “이 땅을 지킬 신하는 난리를 당해서는 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그 말씀대로 병력이나 무기, 식량 등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세였으나, 수만 명의 왜적을 맞아 결사항쟁을 펼쳤다.
그러나 절대적인 열세라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전주이씨,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68세). 조정에서는 그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를 추증하였다.
그 후 다시 1670년(현종 11) 2월 7일에 원충갑, 김제갑, 원호의 원주 사우에 충렬이란 편액이 사액되었으며, 1711년(숙종 37년)에 문숙(文肅)이란 시호와 함께 영의정에 재추증되었다.
원주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는데 1866년(고종 3)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그 사액인 ‘충렬사’ 현판은 괴산의 충민사 경내의 옛 사우에 보관하고 있다. 괴산의 충민사 경내의 옛 사우,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 괴산 능촌리의 제각에 제향되었다.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 부활위원회(江原道愛國愛族復活委員會)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시문집으로 <의재유고(毅齋遺稿)>가 전한다. 묘소는 1988년 10월 5일 괴산읍 능촌리로 이안하였다.
2004년 5월 16일 문숙공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문숙공 후손인 영수ㆍ성수 종친을 비롯해 안사연과 전국의 종친 40여 명, 원주 인근에 거주하는 종친 30여 명이 영원산성을 찾아 참배하였다.
◇ 관찰사공 휘 억령(億齡)
1529년(중종 24년)∼1589년(선조 22년). 자(字)는 중노(仲老). 문정공 김질의 증손자이며 목사공 김언의 차남이다.
생원 진사과에 모두 합격한 후 1552년(명종7년) 24세에 식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승정원 좌승지 지제교를 거쳐 강원도와 황해도 충청도의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吏曹判書兼兩館大提學)에 추증되었다.
대제학공께서는 1580년(선조 13년) 경진년에 우리 안동김씨 족보의 효시인 안동김씨성보(安東金氏姓譜) 발간을 주관하고 그 서문을 찬술하였다. 이것이 경진보(31cm× 38cm)이다.
경진보는 대종회에 원본 1부가 보관 중인데, 일부 훼손된 부분을 대종회에서 윤회 전 부회장 주관으로 복원하여 영인본을 1982년과 2003년에 각각 발행하여 종친들에게 배포하였다.
안사연에서는 2003년 12월 14일 송년회를 가진 다음 날인 15일 대종회의 경진보 2차 영인본 발간을 계기로 관찰사공 묘소를 참배한 바 있다.
◇ 참판공 휘 시헌(時獻)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로서 왜장과 싸우다 순국하신 문숙공(휘 제갑)의 아들이다. 1588년(선조 21) 소과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ㆍ이조좌랑ㆍ정언(正言)을 거쳐 1595년 사간ㆍ전한(典翰)ㆍ시강관(侍講官)ㆍ사인(舍人)이 되었다. 이듬해 집의(執義)ㆍ사간 등을 거쳐, 1597년 승정원 동부승지ㆍ우부승지ㆍ충청도관찰사ㆍ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소모관(召募官)으로 충청도에 파견되었다. 이어 병조참의ㆍ우승지ㆍ좌승지를 거쳐 복수사(復讐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신립(申砬)이 전사한 탄금대(彈琴臺)를 돌아보고 임진왜란 후의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썼다.
1603년 동지사행(冬至使行)에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순천군수를 거쳐 병조참의ㆍ좌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07년 양양부사로 나갔다가 병조참판에 올랐다. 선조가 승하하자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1년(광해 3년) 예조참판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관찰사공께서는 어려서 등과하였으며, 역학(易學)에 밝아 당대의 명류(名流)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 때 아버지 문숙공께서 순국하시자 호남ㆍ영남 지방의 복수별장(復讐別將)이 되어 나갔다.
묘소는 중원군 앙성면 영죽리에 있다
◇ 감사공 휘 소(素)
1602년(선조 25)∼1666년(현종 7). 자는 지백(知白), 호는 양졸와(養拙窩).
충북 괴산군 사리면 하도에서 양덕공[휘 시열(時說)]의 장자로 태어나셨다. 1630년(인조 8년, 29세) 진사급제, 무사참봉(巫仕參奉 종9품), 의금부 금오랑(金吾郞), 호조좌랑(戶曹左郞 정6품)이 되었다.
1635년(인조 13년, 34세)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정랑(정5품)이 되었다. 그 해(1636년, 35세) 후금(청나라)의 전란이 예상되어 문무를 겸비한 참판공이 해주판관(海州判官)으로 선발되었다.
1637년(인조 15년, 36세) 병자호란에 패하여 소현세자가 볼모로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게 되자 공은 세자와 대군을 청나라까지 모시고 가기도 하였다. 군자감정(軍資監正 정3품), 강릉부사(江陵府使), 함경도병사(咸鏡道兵使 종2품), 종성부사(鍾城府使), 함경남도병사(부친 노환으로 사양)를 거쳐 1644년(인조 22)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가 되었다. 그 해 겨울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갔다가 귀국길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에게 들러 공금을 아껴 남은 돈으로 세자의 귀국을 위한 말 준비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고 한다.
경주부윤(慶州府尹 종2품. 부친 노환으로 사양), 형조참의(刑曹參議 정3품. 잠시 재임하였으나 부친 노환으로 사양),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 정3품), 진주목사(晋州牧使)를 거쳐 1648년(인조 26년, 47세) 충청도 관찰사(觀察使 종2품)가 되었다.
그 후 영흥부사(永興府使), 승지(承旨), 형조참의, 호조참의, 황해도 관찰사, 광주목사(光州牧使), 장단부사(長湍府使), 판결사(判決使), 양주목사(陽州牧使)등을 역임하였다.
1666년(현종 7)에 몰하였다. 수(壽) 65세.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으며, 묘는 충북 괴산군 사리면 보광산 頂 계좌(癸坐)이다.
2004년 8월 초에 실시된 제3회 안동김씨 여름캠프 행사시 감사공 묘소를 답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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