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숙부인 김씨 행장
페이지 정보
김윤만 작성일05-07-31 00:33 조회1,704회 댓글3건본문
아내 숙부인 김씨 행장
교산 허균
아내의 성은 김씨로 서울 명문가의 출신이다. 고려 때의 정승 방경의 현손인 척약재 구용은 고려 말에 이름을 떨쳤으니 벼슬이 삼사의 좌사에 이르렀고, 그 4대손인 윤종은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절도사에 이르렀다. 그 아들 진기가 경자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별제로 처음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 분이 대섭을 낳으니 그도 계유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또한 都事(도사)가 되었다. 관찰사 심공 銓(전)의 딸에게 장가드니, 나의 아내는 바로 그분의 둘째 따님이다.
아내는 신미년(1571년)에 태어나 나이 열다섯에 우리 집으로 시집오니, 성품이 조심스럽고 성실하며, 소박하고 꾸밈이 없었으며, 길쌈에 전념하여 조금도 게으름이 없었다. 말은 더듬듯 조심스러웠고, 시어머니를 섬기기를 매우 공손히 하여 아침저녁으로 몸소 문안드리고, 음식은 맛을 보고나서야 드렸으며, 제철 음식을 아주 넉넉하게 했다.
종을 다루기를 엄격하게 했지만, 용서할 것은 용서해 주었고, 욕설로 꾸짖지 않으니, 시어머니께서는 “우리 어진 며느리로다”라고 칭찬하셨다.
내가 나이 어린 때라 아내에게 장난치기를 좋아했지만, 얼굴에 싫은 기색을 띤 적이 거의 없었다. 어쩌다 조금이라도 함부로 굴면 문득 이렇게 나무랐다.
“군자의 처신은 마땅히 엄히 해야지요. 옛사람은 술집이나 다방에도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던데 더구나 이보다 심한 짓이겠습니까?”
내가 이 말을 듣고 마음으로부터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조금이나마 더러 자제하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나에게 부지런히 공부할 것을 권했다.
“장부가 세상에 한 번 태어나면,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화롭게 함은 물론 자기 몸도 또한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집은 가난한데다 시어머님은 연만하시니 너무 재주만 믿고 느긋하게 세월을 허송하지 마십시오. 세월은 빨리 흐르는 것입니다. 나중에 후회한다고 어찌 미칠 수 있겠습니까?
임진년에 왜적을 피하여 북으로 가던 참에 아내는 마침 임신 중이어서 몹시 지친 몸으로 단천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그 때가 칠월 초이렛날이었다. 이틀이 지나서 왜적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순변사 이영은 후퇴하여 마천령을 지키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님과 아내를 이끌고 밤을 새워 고개를 넘어 임명역에 이르렀는데, 아내는 기운이 다하여 말도 제대로 못할 형편이었다. 그 때 같은 성씨인 허행이 우리를 맞이해 주어서 해도로 피난을 했으나 거기서도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산성원에 사는 백성 박논억의 집에 도착했다.
그 때가 초열흩날 저녁이었는데, 아내는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기어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소를 팔아 관을 사고 옷을 찢어 염을 했다. 그러나 체온이 오히려 따듯해서 차마 그대로 묻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왜적이 성진창을 친다는 소문이 들리므로, 도사공이 급히 명하여 뒷산에 임시로 묻으니, 그때 나이 겨우 스물두 살, 함께 산 세월을 생각하니 겨우 여덟 해에 불과했다.
슬프다. 그 때 태어난 아들은 젖이 없어 끝내 일찍 죽고 말았다. 처음에 난 딸아이는 자라서 진사 이사성에게 시집가서 아들 딸 하나씩을 낳았다.
기유년에 내가 당상관으로 진급하여 형조참의로 임명되니 법도에 따라 아내를 숙부인으로 추봉하게 되었다. 아내의 맑은 덕행으로도 오래 살지 못하고, 게다가 뒤를 이을 아들도 없으니, 하늘의 도리조차도 믿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가난할 때 아내와 마주앉아 짧은 등잔 심지를 돋우고 반짝거리는 불빛에 밤을 밝히며 책을 읽다가 조금이라도 싫증을 내는 기색을 보이면 아내는 반드시 농담 삼아 “게으름을 피우지 마세요. 저의 부인 첩(벼슬한 사람의 부인에게 내리던 첩지)이 늦어집니다”라고 말했는데, 18년 뒤에야 다만 한 장의 빈 교지를 그녀의 영전에 바치게 되었을 뿐, 그 영화를 누릴 이는 나와 귀밑머리를 마주 푼 짝이 아닐 줄을 어찌 알았으랴. 만약 저승에서나마 이 사실을 안다면 반드시 슬픔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슬프다. 을미년 가을에 길주에서 아내의 뼈를 거두어 임시로 강릉 교외에 묻었다가, 경자년 3월에 돌아가신 어머님을 따라 원주 서면 가시덤불에 길이 묻었다.
그 언덕은 선산 왼쪽에 있으며 묘는 寅坐(인좌) 신향(申向) 寅時(인시) 방향, 즉 4시 방향을 등지고 신시(申時), 즉 16시 방향을 바라보는 자리이다. 삼가 아내의 행적을 쓴다.
원제 - 亡妻淑夫人金氏行狀(망처숙부인김씨행장)
《출처 : 아름다운 우리 고전 수필/손광성, 임종대, 김경수 옮김/을유문화사/2003》
댓글목록
김태영님의 댓글
![]() |
김태영 |
---|---|
작성일 |
이글은 홍길동전을 지은 교산 허균이 짧게 생을 마감한 아내 안동김씨에 대한 슬픈 행장입니다. 지난주에 이 슬픈 주인공들의 친정아버지요 장인되시는 도사공(대섭)의 묘를 찾아 참배하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 |
김항용 |
---|---|
작성일 |
당대 명문장인 허균의 아내에 대한 눈물 어린 행장을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문온공파란에 올리겠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 |
김윤식 |
---|---|
작성일 |
감사합니다. 전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내용을 새삼 다시 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