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우당' 추정지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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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5-08-08 22:43 조회1,375회 댓글6건본문
‘六友堂터’ 推定地를 찾아서
1992년(임신) 발행한 안동김씨문온공파세보권1(pp21--211)에 “육우당은 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이포리 금사지서 앞산 위에 위치하며 김구용이 귀양살이 할 때에 그 곳 여강가에 집을 짓고 육우당이라 이름하였음”이라 기록되어 있다.
2005. 8. 7. 나는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및 석종비를 답사한 후 이어서 육우당터 추정지를 찾아볼 양으로 양평방향으로 차를 몰아 이포대교를 건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久(구) 길로 접어들어 1-2분정도 가니 우측에 금사지구대(옛 금사지서 : 이포리 189)가 보이고 그 앞에 주차를 하였다.
정말 금사지구대 앞산은 150m의 야산이었으며 들머리엔 ‘江崖山(강애산)공원’이란 비석과 공원 조감도가 설치되어 있다. 땀을 비오듯 흘리며 2-3분 단숨에 산정에 올라서니 넓은 공원이 펼쳐지고 게이트볼 장에는 노인 몇 분이서 더위도 잊은 채 공을 치고 계신다. 공원 안에는 지은지 얼마되지 않아 보이는 '삼신당'과 그 뒤편에 '침벽루'란 정자(이포리 산 192)가 세워져 있는데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驪江(려강)의 풍경은 가히 절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런 곳이라면 나라도 집 한 채 지어 ‘○○당’이라 붙여놓고 음풍명월하며 지내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든다. 혹시나 더 좋은 장소는 없을까하여 강가로 내려가기도 하고 산등성이를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으나 이만한 곳이 눈에 뛰지를 아니한다.
금사지구대에 들러 당직 경찰관에게 혹시 현 금사지구대가 예전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이전하여 왔는지를 문의하니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경찰관은 이곳이 고향인데 어려서부터 금사지구대가 이 자리에 있었다고 답변하는 것으로 보아 임신세보 편찬 당시 금사지서 앞산이라 함은 이곳 강애산공원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오늘 이곳 강애산공원으로 육우당터 추정지를 찾은 나의 기분은 뿌듯하거나 기쁘지가 아니하고 무언가 답답하고 죄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제부터라도 더욱더 정진하여 정확한 육우당터를 찾아 척약재 할아버지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 아쉬움 속에 이러한 다짐을 하면서 귀경 길을 재촉한다. 장대같은 빗줄기가 차창을 때리고 있다.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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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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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노고가 크셨습니다.
엊저녁에 너무 늦게 들어와 정신없이 자고 새벽에 귀한 글을 읽습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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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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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중요한 역사탐방을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문제 해결에 나섭시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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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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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비오는날 육우당터 탐방 노고가 크셨습니다.신선한 풀 냄새가 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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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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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일전에 태영 아저씨께서 육우당과 관련된 귀한 자료를 주신 게 있어서 찾아보는 중입니다.
그 자료에, 석탄 선생과 관련된 고산서원의 상량문 중에서 "(고산서원은) 육우의 옛 터와 봉서가 (가까이) 접해 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여주읍지를 잠깐 들춰 보았는데, 고산서원은 여주읍치에서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이라 위의 표현은 여주에 같이 있다는 뜻으로 포괄적인 표현인 듯합니다.
하지만 봉서는 둔촌 이집 선생이 머물던 봉서루로서 이포에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제가 요즘 사정상 짬을 내기 어려워 자세히 적지 못했습니다만, 여주읍지와 둔촌 선생의 봉서루를 추적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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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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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여주읍지에 우리 선조님 이외에 김씨 성을 가진 사람으로 金漬, 金安國, 金汝采가 기록돼 있습니다. 이들의 생몰 연대와 <가보>에 육우당 터를 찾으신 할아버지 생몰연대도 함께 비교해서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큰댁에 가전되어 온 <가보> 기록에 나오는 "달관 김모"와 혹시 연관성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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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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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제가 여주읍지 잘못 본 부분이 있어서 다시 알려 드립니다.
고산서원(고산사)는 '여주읍치 북쪽 30리'가 아니라 '여주읍치 서쪽 30리'입니다.
여주읍지 영인본 글자가 너무 작아서 西자를 北자로 잘못 보았습니다.
고산사 상량문 서두에 "이 장사 선생은 때늦게 고려 말기에 태어나서 여수(麗水)의 남쪽에서 우거했도다."라는 부분이 있어서 여주읍지를 다시 보니 북쪽이 아니라 서쪽이었습니다.
잘못 알려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산사 상량문을 지은 사람이 조석주(趙錫周)입니다.
조석주 선생은 아마도 육우당과 봉서루 위치를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이분도 함께 추적하면 어떤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혼란스럽게 만들어 송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