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행동이 하늘을 속이지 않았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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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8-12 22:06 조회1,414회 댓글3건본문

조선의 청백리(조선시대 대표 청백리 34인)
저자 : 이영춘 외 출판사 : 가람기획
‘마음과 행동이 하늘을 속이지 않았네'’
김시양金時讓 1581(선조 14)~1643(인조 21)
이항복이 한눈에 동량지재감으로 점찍다
김시양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이다. 아버지는 비인현감 인갑(仁甲), 어머니는 남양 홍씨, 부인은 경주 이씨로서, 익재 이제현의 후손이다. 2남 3녀의 자손을 두었다.
김시양은 어려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기백이 남달라, 집안어른들이 가문을 크게 일으킬 인물로 기대하였다. 김시양의 기억력은 어려서부터 유명했는데, 한번 본 것은 결코 잊지 않았다. 어릴 때 어떤 집 벽에 전답의 결수(結數)를 기록한 것을 보았는데, 잠깐 본 것인데도 일생 동안 잊지 않았다고 한다.
인조 때 청나라 사람들이 인삼 수천 근을 보내 푸른 베와 바꾸려고 하였다. 정부에서는 쌀과 베로 매매하여 청나라의 요구에 응했는데, 5년이 지난 후 청나라에서 수량이 부족하다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당시 신하들은 5년 전의 일이라 까마득히 잊어버려 수량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김시양은 당시 각 고을에서 나눠 받은 것의 많고 적음과, 각 도의 감사와 비변사에서 결과를 보고한 날짜까지 모두 외우고 글로 썼다. 후에 장부를 얻어 확인하니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임금이 “세상에 드문 총명이다”라고 찬사하였다.
임진왜란 와중에 연달아 부모를 여의었다. 당시 그의 나이 12~14세였다. 그 험한 상황과 슬픔 속에서도 어른처럼 상사를 처리하여 주위에서 놀랐다.
부모의 장례가 끝나자 학문에 더욱 정진하여 선조 38년(1605)에 정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정승으로 있던 이원익과 이항복이 한번 보고 나라를 이끌어갈 인물로 인정하였다.
광해군 2년(1610) 명나라에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왔다. 그때 이미 만주의 여진족이 강성해져서 장차 병란이 일어날 것임을 보고하였다. “오랑캐의 기세가 점점 뻗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자면 요동의 길은 믿을 수 없으니 바닷길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후금이 만주를 지배하기 10년 전에 이미 그 사실을 예견한 것이었다.
광해군을 비판하다 귀양 가다
광해군 3년(1611) 전라도도사가 되어 향시를 주관했는데, 시험내용 중에 ‘신하가 임금 보기를 원수처럼 한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 시험 문제가 세상에 알려져, 김시양은 임금을 비방하고 풍자하였다고 체포 되었다. 당시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친형인 임해군을 죽이고,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살해하였으며, 생모 공빈 김씨를 왕후로 추숭하는 일을 추진 중에 있었다. 김시양은 이 같은 광해군의 동향에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체포된 김시양이 서울로 압송되어 광릉을 지나갈 때, 절친하던 정세규(鄭世規)가 길에서 김시양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정작 김시양은 얼굴빛이 태연하였다.
김시양이 한양의 법정에 들어오자 의금부에서는 임금을 모욕하였다는 것으로 죄를 삼아 극형에 처하기를 아뢰었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것을 3일 동안 발표하지 않았다.
당시의 정승 이항복이 김시양의 재주를 아껴 힘써 구원했기 때문에, 사형에서 감형 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을 갔다. 귀양 가는 도중에 시를 지었다.
마음과 행동이 본래 하늘의 해를 속이지 않았으니,
길하고 흉한 것은 원래 푸른 하늘에 물을 것이 아니다.
하늘에 부끄럽지 않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한 시로, 생사를 초월한 그의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611년부터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될 때까지 10여 년을 귀양살이로 보냈다. 이 기간에 김시양은 학문에 더욱 전념하였다. 특히 장차 만주의 여진족이 홍성하여 나라의 위험이 될 것을 예견하고 국방문제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여진족과 국경을 마주 대고 있는 함경도의 인재들을 눈여겨보아 두었다가 후일 발탁하여 크게 쓰기도 하였다.
김시양의 글씨(근묵)에서.
광해군 초반에는 토목공사가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수도를 복구하기 위해 궁궐과 관청을 새로 지었으며, 전국에서 도로와 교량을 수리하기 위한 공사가 벌어졌다. 국가에서는 공사에 막대한 비용이 들자 죄인들에게 돈을 받고 죄를 감면해주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에 당시 수많은 죄인들이 국가에 돈을 바치고 죄를 면하였다. 김시양은 구차스럽게 죄를 사면 받는 것은 죽느니보다 못하다 하여 끝까지 돈을 바치지 않아 광해군이 폐위될 때까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지 못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이 장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
댓글목록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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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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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조선의 청백리(조선시대 대표 청백리 34인)의 하담 할아버지 내용을 몇 번에 나누어 옮겨봅니다. 저작권 문제가 걸리기도 하고...
예전에 제 메일로 문중 홈을 이용하여 영리를 취하지 말라는 호된 질책도 있었기에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문제가 된다면 삭제하겠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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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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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부님, 우리 문중 할아버지 청백리 열전을 엮어 더욱 널리 알려야 할 사항이라 생각합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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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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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조선의 청백리> 하담공의 내용 잘 읽었습니다.
영리 운운에 마음 쓰시지 마세요. 홈에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