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행동이 하늘을 속이지 않았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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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8-13 06:39 조회1,423회 댓글1건본문
인조반정 후에야 복권
인조반정 이후 귀양살이에서 풀려난 김시양은 그 지조를 높이 평가 받고 등용되어, 예조정랑과 병조정랑, 수찬, 교리 등 중앙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인조는 반정 직후에 김시양이 함경도에서 오랜 시간 귀양생활을 했으며, 아울러 문신으로서 군사 방면에 조예가 깊다고 생각하여 평안도 전방지역의 방비를 맡겼다. 당시 만주의 여진족은 누르하치에 의해 통합되면서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고 있었다.
1623년 8월 김시양은 인조에 의해 평안도 의주부윤으로 임명되었다.
의주는 압록강 중하류에 위치한 요새로서 만주로부터 평안도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조선은 건국 이래 의주에 무장을 보내 만주 여진족을 방어하도록 했는데, 김시양은 문신으로서 의주부윤이 되었던 것이다. 김시양은 의주부윤에 임명되자 비변사에 다음과 같은 국방대책을 건의 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변방에서 귀양살이를 해서 변방의 사정을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변방의 성문 밖은 곧 적의 지경이므로, 적의 내습은 알려줄 척후와 봉화가 없으면 적이 낮에 쳐들어와도 성문을 미처 닫을 사이가 없고, 밤에 쳐들어오면 성위에서 하나의 화살도 쏠 사이가 없습니다. 군사들을 격려하여 성위에 올라가 밤을 경비하는 것을 곧 경보(警報)를 듣고 난 후의 일입니다. 만일 군사들에게 항상 성을 경비하게 한다면, 군사들이 감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만약 저에게 안주를 지키게 해준다면 곧 적이 의주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성을 지키는 방비를 하여 충분히 적은 막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조정이 나를 그곳에 보내는 것은 지키라고 하는 것인데, 번연히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억지로 부임하였다가 국가의 패망하는 화가 저 때문에 나오게 된다면 이것은 조정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김시양은 압록강에 위치한 의주의 제1방어선보다는 청천강에 위치한 안주의 제2방어선에서 적을 대비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그러나 김시양의 의견은 채택되지 않았다. 훗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여진족이 의주를 쉽게 통과함으로써, 제2방어선에서 적을 대비해야 한다던 김시양의 의견이 선견지명이었음이 드러났다.
1623년 가을에 김시양은 암행어사로서 함경도 지역을 조사하였다. 이때 함경도의 한 고위관료가 말과 인부를 징발하여 자신의 집으로 물건을 잔뜩 실어오고 있었다. 이 물건들은 관청에서 사용할 것들로, 백성들과 지방의 군병들로부터 징수한 것이었다. 김시양은 길에서 이들 일행을 적발하자, 말에 싣고 있던 물건을 뒤져 조목조목 적어서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 관료는 장물죄로 파직되었고, 이로써 함경도 지역의 관료들은 가렴주구를 일삼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 군사들과 백성들은 김시양을 찬양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의 공신이었던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자 김시양은 도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관은 당시 용맹한 무장으로 명성이 자자하던 사람이었다.
그해 연초에 이괄은 만주의 여진족을 방어하기 위해 함경도의 북병사로 제수받았다. 당시 반정을 비밀리에 모의하던 이귀, 김류 등은 이광이 군사 방면에 재능이 잇다 하여 반정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다.
반정 당시 이괄은 반정군을 지휘, 통솔한 공이 있었으므로 스스로 1등 공신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2등공신에 녹훈되고 말았다. 이 같은 사실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평안도 병사로 임명되자 함명련(韓明璉)과 함께 평안도의 정예병사 1만 2천여 명을 거느리고 영변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댓글목록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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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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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충익공할아버님에 대해 새롭게 공부가 되고 있네요
그런데 손에 쥐 안나셨는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