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행동이 하늘의 해를 속이지 않았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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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작성일05-08-14 07:04 조회1,403회 댓글1건본문
이괄과 한명련은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황해도 평산 부근에 위치한 저탄(渚灘)에 육박하여 관군과 대치하였다. 관군에는 도체찰사 이원익과 부체찰사 이시발을 최고 지휘관으로 하여 평안도도원수 장만, 경기감사 이서 등의 여러 부대가 섞여 있었다. 김시양은 도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으로 저탄 방어전에 참여하였다.
저탄 싸움에서 이괄이 승리하였다. 관군이 저탄의 여울을 지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이괄이 기습병들을 보내 얕은 여울을 건너 급습한 것이다. 급습을 당한 관군은 제대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한 채 패퇴하였다.
1차전의 패배 이후 광군은 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라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사기가 꺾인 상태였다. 이때 김시양은 “이괄의 턱 아래에 군살이 달려 있는데 이는 늑대가 제 턱살을 밟게 되는 형상이니, 마침내 반드시 낭패하여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같은 김시양의 발언은 정부군의 결국 이괄의 반란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암시를 주는 것이었다. 김시양의 말을 듣자 도원수 장만은 “사람들은 이괄의 턱에 달린 살이 제비턱의 호랑이 머리로 제후에 봉해질 형상이라 하더니, 이제 종사관 김시양의 말을 들으니 과연 늑대의 턱밑 살이 로구나” 하였다. 김시양의 말에 사기를 되찾은 장만과 다른 지휘관들은 서로 격려하며 전의를 되살릴 수 있었다.
저탄에 펼쳐진 관군의 방어선을 돌파한 이괄은 여세를 몰아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해 수도를 함락하였다. 인조는 공주를 향해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관군은 이괄의 군대를 어떻게 저지할 것인지를 놓고 의논이 분분하였다. 방어선을 한양 이남으로 내려 잡고 장기전으로 돌입할 것인지 아니면 한양에 방어선을 설치하고 즉각적으로 일대 격전을 벌일지가 논란의 핵심이었다.
도원수 장만은 관군의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혜음령(惠陰嶺)에서 작전회의를 열었다. 장만은 “오늘의 계책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지금 도성민들이 모두 적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간혹 승패를 관망하는 자가 있을 것인데, 만약 한 이틀 더 지체하면 사람들이 모두 적에게 붙을 것이므로, 뜻이 굳어진 후에는 공격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지금 이때에 결사적으로 싸우는 것이 첫 번째 계책이다. 아니면 경기감사 이서의 군사를 재촉하여 동쪽 길을 지키게 하고, 심경진의 군사는 남쪽 길을 지키게 하여 사방의 길을 장악하고 차단시킴으로써 이괄의 군량미 운송로를 끊어놓고, 여러 도의 군사가 도착함을 기다려서 힘을 합쳐 치는 것이 또한 안전할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 계책이다. 두 가지 계책 중에서 어느 것을 채택할 것인가?” 하고 물었다.
당시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영변에서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온 이괄의 군대와 현시점에서 정면 대결하는 것은 무모하다고 생각하였다. 우선은 사기가 충천한 이괄 군대의 기세가 꺾이기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도원수 장만이 제시한 작전 중에서 두 번째 작전을 옹호하는 의견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때 방어사 정충신이 나서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이미 죽도록 힘을 다했으나 적을 격파하지 못하여 임금께서 파천하였으니, 우리의 죄는 만 번 죽음을 받아도 합당하다. 사세가 이처럼 다급한데도 적을 보고만 있을 수 없으니, 승패를 물론하고 일전을 어찌 아니하리오, 또한 북쪽 산을 먼저 점령하는 편이 이긴다는 예날 장수의 글도 있으니, 안령(안령)을 점거하여 진을 치면서 도성을 내려다보고 누를 것이니, 적이 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싸우게 되면 적은 올려다보고 공격하게 되고 우리는 높은 곳을 이용하여 편리한 지점을 잡았으니 적을 쳐부술 수 있을 것이다.”
정충신은 즉각 일전을 벌이자고 주장한 것이었다. 김시양과 남이홍이 적극 찬동하였다. 도원수 장만은 김시양이 정충신의 의견을 찬성하자 첫 번째 작전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괄은 관군이 안령에 집결해 있다는 소식을 듣자, 이들을 단번에 패퇴시켜 한양 시민들에게 자신의 위력을 과시할 생각이었다. 이괄은 도성 문을 열고 군사를 두 길로 나누어 안령을 포위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승리를 확신하고 도성민들로 하여금 자신이 나서서 벌이는 전투를 구경하도록 하였다. 이에 전쟁 구경을 하려는 도성민들이 남산에서부터 성에 이르기 까지 가득 메울 지경이었다.
이괄의 군대는 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군들을 선봉으로 삼아 안령에 주둔한 관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바람이 관군을 향해 불어와 이괄군에서 발사하는 화살과 탄환은 더욱 맹렬한 위세를 떨쳤다. 관군은 비록 산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며 전투를 하고 있었지만 바람과 이괄군의 강공에 밀려 후퇴를 거듭하였다.
그런데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관군 쪽으로 불던 바람이 갑자기 이괄군을 향해 부는 것이었다. 산 위에서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와 모래가 섞여 있어 이괄 군대는 거의 눈을 뜨지 못할 지경이었다. 관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괄의 군대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괄의 반란은 안령에서 패배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이곳에서의 일전을 주장한 정충신과 김시양의 공로가 컸다. 도원수 장만과 방어사 정충신은 안령의 전투에서 승리한 공로로 후에 공신에 책봉되었으며, 김시양도 인조의 극진한 신임을 받게 되었다. 이 같은 신임을 바탕으로 김시양은 인조대에 병조판서를 두 번이나 맡게 되었다.
화친론을 주장하다 또 귀양 가다
병조판서에 임명된 김시양은 공정한 인사를 시행하였다. 무인으로서 재주는 있으나 세력이 없는 자들은 공정한 도가 다시 시행될 것이라 하며 서로 축하하였다.
1627년 정묘에 후금의 여진족이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하였다. 이른바 정묘호란이었다. 정묘호란의 결과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양을 맺고 휴전으로 들어갔다. 조정에서는 후금이 언제 다시 공격할지 몰라 김시양을 평안도도원수로 삼아 적에 대한 방비를 하도록 하였다. 이때 후금에서 사신을 보내 과도한 공물을 요구하자, 당시 조정의 논의는 후금과 화친을 끊고 일전을 벌이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김시양은 입장을 달리하였다.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는 후금과 섣부른 전쟁을 벌이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김시양은 뛰어난 무장이었던 정충신, 이서 등과 함께 후금과의 전쟁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이 일로 인해 김시양은 다시 귀양을 가게 되었으나, 후일 병자호랑의 참극이 일어나자 김시양의 주장했던 화친론이 전쟁을 예방하고자 함이었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김시양은 말년에 눈병으로 고생하다 충주에 낙향하여 여생을 마쳤다.
문집으로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하담집荷潭集><부계기문涪溪聞記>등이 전한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 신명호
댓글목록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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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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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조선의 청백리 하담공의 내용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