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제4회 안동김씨 여름캠프 보고_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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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김윤식 작성일05-08-15 02:10 조회1,649회 댓글4건본문
2005년 제4회 안동김씨 여름캠프 보고_02
전서공 묘소
장령공 설단 참배를 마치고 아래쪽 전서공(휘 성목) 할아버지 묘소로 이동하자 빗줄기가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하는 데에다 바람까지 순조롭지 않습니다. 그 빗속에서도 용준, 용환 형제분께서는 눈에 띄는 대로 잡풀을 뽑습니다.
묘하에 살고 계시는 전서공파 종인들께서는 안사연 일행이 사전점검차 들렀을 때에도 묘역 일대를 깨끗이 금초를 하셨건만, 그 사이 잡풀이 돋자 또 한 번 벌초를 하셨답니다. 아마도 올해 추석이나 시제 전에 다시 벌초를 하셔야 할 터인데, 그 정성에 놀랍기만 합니다.
전서공 묘소는 후손들의 지극정성으로 단 한 번도 실전되지 않고 수호되었습니다. 본래는 자그마했으나 1992년 사초로 잘 단장되었습니다. 당시 도유사 수회 종친께서는 사초작업에 전념하느라 미처 생업을 살피지 못해 키우던 돼지 100여 마리가 폐사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답니다.
호석을 두른 전서공 묘소는 둘레 30보, 전면 27보, 용미에서 제절까지 13보입니다. 석물은 망주석 2쌍(新 1쌍, 古 1쌍)과 장명등, 석양 1쌍, 문인석 1쌍, 상석(2보×1.5보) 등의 석물이 배치돼 있습니다.
고려조 봉분은 전방후원형이 일반적인데, 전서공 묘소는 규모만 지금보다 작을 뿐 둥근 형태였다고 도유사 수회 종친께서 들려 주십니다. 1992년 사초 당시 가슴 깊이까지 파 보니 숯이 채워져 있어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숯을 더 두르고 봉분을 높여 단장했다고 합니다.
가슴 높이의 고비(古碑)에는 ‘고려 전서공 안동김공 성목지묘 정부인 적봉미상 조씨부’로, 신비(新碑)에는 ‘고려 전서공 안동김공 성목지묘 정부인 흥양조씨 부’라 적혀 있습니다. 오랜 세월 할머니의 관향을 모르고 있었으나, 근래에 파보를 모실 무렵 전서공파 종인이 소장하고 있는 가첩에서 ‘흥양조씨 부 장령 문우(興陽趙氏父掌令文祐)’라는 기록이 밝혀졌다고 합니다.
▲전서공 헌관
헌관 : 재은(부사공파 전 회장, 현 고문)
집례 : 항용
집사 : 억, 은회
해설 : 영환, 수회
학당공 묘소
학당은 검교공(휘 휴)의 호입니다. 학당공 할아버지 묘소는 전서공 묘와 비슷한 크기이며, 묘전에는 상석(2보×1.5보), 장명등, 석양 1쌍,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등이 배치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문인석은 옛 석물로 고졸한 멋이 느껴집니다. 묘비에는 ‘고려검교안동김공휴지묘 정부인선산김씨부’라 적혀 있습니다.
묘비는 사초 당시 세운 비석 옆에 고비(古碑)가 서 있으며, 그 앞에 특이하게 생긴 거북 좌대가 있습니다. 가로 1보×폭 0.5보 크기의 거칠게 다듬은 거북 형태인데, 거북 등에 가로로 길게 홈이 파여 있습니다. 그 형태나 크기, 홈의 깊이로 봐서 비석보다는 묘표를 세웠던 것 같습니다.
참예자들이 학당공 묘소로 이동하자 억수같은 빗줄기가 퍼붓습니다. 그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고려 말의 충신 학당공께 예를 올립니다. 학당공께서는 정 포은 선생의 문인으로 여말에 국운이 기울자 여러 차례 조선 태조의 부름을 뿌리치고 운주산 아래 학당골로 은거하셨습니다. 이곳에서 학당공께서는 수많은 충효자를 길러내셨는데, 막내(둘째) 사위가 순천인 박안생입니다. 박안생은 사육신으로 유명한 박팽년의 조부입니다. 학당공의 행적에 관한 상세 내용은 여름캠프 자료집(종합)을 참고하시기 바라며, 생략합니다.
▲학당공 헌관
헌관 : 실경(대구종친회장)
집례 : 항용
집사 : 태우, 태영
해설 : 영환, 수회
학당공 묘소 옆에는 문중발전에 공헌한 종인들의 공적비가 서 있습니다(三興 安東金公泰一功績碑, 春湖安東金公在旭功績碑, 泮谷安東金公在山功績碑, 小堂安東金公泰正功績碑). 이 공적비는 모두 1994년에 세운 것입니다. 그 옆에는 1981년에 건립한 고려검교김공유허비가 있습니다. 참례자 일동은 비가 잠시 주춤한 사이에 학당공 묘소 옆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11:55~12:20 학당공 유허비
학당공 묘소 아래쪽 민가는 학당공께서 이곳 운주산 아래에 은거하실 당시 사셨던 집터라고 합니다. 참예 종인들이 많고 일정상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하고 묘역 입구의 <학당김공유허비>로 향합니다. 휴허비로 가는 길가의 민가에는 참나리꽃과 봉숭아꽃, 참깨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허름한 토벽집 울에는 잘 익은 옥수수와 조경수로 재배 중인 어린 회나무가 빽빽이 들어 차 있습니다.
유허비는 1819년(순조 19년)에 처음 세워진 뒤 1896년(고종 13년) 다시 새긴 것입니다. 비문과 상세 내용은 여름캠프 자료집(종합)으로 대신합니다. 본래 유허비가 있던 위치는 학당골에서 수고동 마을로 넘어가는 고개(덕고개)였는데,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학당공께서는 잠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포은 문인으로 그 뒤를 이를 수제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난 대학자셨습니다.
덕고개는 학당공의 큰아드님 참판공(휘 익정)에 관한 전설이 문중에 전해지고 있답니다. 참판공께서는 1396년(태조 5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셨는데, 관직에 계시는 동안 “근검하고 사치를 몰랐으며 6년간 시묘살이를 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여 세조 때 정려를 받으시기도 했습니다.
참판공께서는 1435년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되셨으나 현지에 부임하시기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참판공 묘소는 현 경기도 고양시의 고령사에서 3~4리(里) 떨어진 곳인데, 양곡리에 설단을 하고 혼백을 모셔 왔다고 합니다. 그 당시 고양시의 원 묘소에서 고유제를 지낸 후 혼백을 모시고 오면서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 “간다” 하시며 응답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곳 전의면까지 모셔 오는 동안 내내 “간다”고 하시던 참판공께서 덕고개에 이르자 대답을 안 하시더랍니다. 그래서 전서공파 종인들께서는 “아마 덕고개에 이르자 아버님 학당공(휘 휴)과 할아버님 전서공(휘 성목)께 인사를 드리러 간 것”일 것이라고 믿고 있답니다.
고양시의 참판공 옛 묘소는 후손들께서 몇 차례 찾아가 살펴보았으나 석물이나 묘비 등은 찾을 길이 없고, 지석이라도 발견되기를 바랐으나 부장품도 모두 도굴된 상태라고 합니다.
현재 전서공파종회에서는 학당공 할아버지 휴허비를 쉬운 우리말로 풀이한 한글 유허비를 그 옆에 건립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제반 사항이 거의 완료된 상태라고 합니다. 유허비는 상단의 이수(용돋을새김 장식)과 비신(碑身)이 한몸으로 상당히 큰 규모인데, 자획이 방금 새긴 듯 삐침 하나까지 반듯반듯해서 손을 대면 베일 것만 같습니다. 영환 종친과 전서공파 후손의 설명을 듣는 사이 비가 주춤해지더니 곧 멎었습니다. 이대로 비가 멎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김정중 / 글 김윤식>
댓글목록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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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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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미욱하여 잘못된 내용이 있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잘못된 내용은 헤아려 주시기 바라며, 리플을 달아주시거나 직접 고쳐 주시기 바랍니다.
비밀번호는 00 입니다.
감사합니다.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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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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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고생하여 올려주신 글과 사진을 편히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행사 후기를 보니 참여치 못한 아쉬움이 더해만 갑니다.
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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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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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참석종인 모두 얼굴이 넓적하신 것은 충렬공 할배를 닮아서 그렇지 싶네요 ㅎㅎ
조각 조각의 편린들로 들어온 전서공파 할아버님의 행적과 묘소 이야기들이
이렇듯 정리되어 가고 있어 너무 좋습니다 윤식 아우님 화이팅~!!
김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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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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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글을 읽으면서 저도 같이 비를 맞고 또 우산을 받치고 옆에서 지켜 보는 듯합니다.
지난번에 가봐서 그런지 생생합니다. 비오는데 사진 찍느라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글에서 풀향기가 솔솔납니다. 좋은 글 좋은 사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