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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김/서울/노론/200년 집권 신동아 2005년 8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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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작성일05-09-13 05:48 조회1,707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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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ard_line_bar.gif 장동김/서울/노론/200년 집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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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월간지 내용입니다. 참조하세요(신동아 2005.8월호)/부산 김석한 선생님 제공

 

사람들은 안동이라는 관향 때문에 안동 김씨를 경상도와 연결하는데, 따지고 들어가면 안동 김씨들은 서울 사람들이다. 족보에만 관향이 ‘안동’으로 기재되어 있을 뿐 실제로 거주한 곳은 서울, 구체적으로 서울의 장동(莊洞)이다. 장동은 경복궁의 서북쪽을 가리킨다. 지금의 청와대 근처인 청운동과 옥인동 근방이다.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이 쓴 ‘겸재의 한양진경’(동아일보사 刊)에 보면 당시 장동에 자리잡고 살던 안동 김씨들의 화려한 저택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대표적인 저택이 청풍계(淸風溪)다. 현재 종로구 청운동 52번지 일대의 골짜기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를 지키다 순절한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1561∼1637)의 별장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청운초등학교와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저택을 비롯한 몇 개의 터로 분할됐다.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는 의미를 지닌 청풍계는 서울에 살던 안동 김씨들의 본거지였다. ‘안동 김씨 200년 집권과 60년 세도의 산실’이었다. 김상용은 바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친형이다. 김상헌은 병자호란 때 대청(對淸) 강경파에 속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대청 강경파는 이후 전개된 당쟁사에서 명분과 아울러 권력도 잡았다. 그가 청나라에 잡혀갈 때 지은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는 인구에 회자되는 시다. 안동 김씨의 기반은 바로 이 걸출한 두 형제가 세간에 이름을 날리면서 시작된 것이고, 그 기반이 서울의 장동 일대였다. 엄밀하게 말하면 ‘안동 김씨’가 아니라 ‘장동 김씨’라고 해야 맞다. 실제로 ‘장김(莊金·장동 김씨)’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많다.

호남 차별 35년, 영남 차별 200년

한국의 족보에 기입하는 관향 또는 본관(本貫)이라는 용어는 한번 경주 김씨면 그 사람이 평양에서 300년을 살았더라도 족보와 묘비명에 ‘경주 김씨’라고 기재한다. 이를 읽는 사람이 보면 경주에서 살았던 것으로 오해하기 쉽다. 실제로는 평양 사람이지만 외부인들은 경주 사람으로 인식한다. 안동 김씨도 같은 맥락이다.

조선 후기 안동 김씨의 패권과 세도는 경상도 사람들이 누린 게 아니라 서울 사람들이 누린 것이다. 대략 1700년대 중반부터 서울에 모든 인물과 권력, 재력이 집중됐다. 물론 수도이니까 예전부터 집중되는 현상은 있었지만 ‘장김’을 비롯한 노론 일당의 집권이 계속되면서 서울 집중에 가속도가 붙었다. 예전에는 정권교체가 자주 이뤄져 실권한 당파 사람들은 지방에 내려가 살았다. 교체가 되면 이긴 당파는 서울에 살았지만 패한 당파는 낙향하여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200년 동안 승리한 당파는 기호(畿湖)에 기반을 둔 노론(老論)이다. 기호학파가 서울을 점령했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정권투쟁에 패해서 지방으로 몰린 당파는 경상도에 근거를 둔 남인(南人)이다. 경상도 남인, 즉 영남학파는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산촌에서 대략 200년 동안 고픈 배를 부여잡고 살아야 했다.

어찌 됐든 서울 집중이 가속화하면서 생긴 말이 ‘귀경천향지풍(貴京賤鄕之風)’이다. ‘서울을 귀하게 여기고 시골을 천하게 여기는 풍조’를 말한다. ‘사람 자식은 서울로 보내고 말 새끼는 제주도로 보내야 한다’는 말도 대략 이 시기에 나온 것이라고 한다. 종합하면 조선후기 세도는 경상도 사람들이 누린 게 아니다. 서울 장동에 살던 장동 김씨 집안이 누렸다. 호남 사람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사람들도 이 대목을 착각하기 때문에 경상도 사람들이 다 해먹은 것으로 생각한다. 돌이켜보면 근대 이전의 조선 후기는 경상도 사람들이 지역 차별과 정치적 소외를 받았던 역사다.

안동 일대에서 손꼽히는 명문이 퇴계 선생의 진성(眞城) 이씨 집안, 서애 유성룡의 풍산(豊山) 유씨, 학봉 김성일의 의성(義城) 김씨 집안이다. 의성 김씨 학봉파(鶴峯派) 후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선 숙종 이후 이 집안에서 가장 높은 벼슬을 한 것이 ‘참의(參議)’라고 한다. 지금의 차관보(次官補)에 해당한다. 정부 중앙부처 1급 국장급이다. 영남에선 참의 벼슬이 아주 높이 올라간 경우이고 대부분은 ‘교리(校理)’ ‘정언(正言)’ ‘장령(掌令)’ ‘사간(司諫)’ 벼슬에 그쳤다. 정부 부처의 과장급 정도 되는 벼슬이다.

대부분의 영남 선비들은 평생 벼슬을 못하고 강호의 처사(處士)로 인생을 끝냈다. 그러니 얼마나 원망이 많았겠는가. 능력이 아니라 출신지역 때문에 당한 불합리한 차별이었다. 집권층인 노론에 의해 경상도의 남인이 철저하게 견제를 받았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 후기는 지역차별의 정치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차별 기간이 대략 200년이다. 근래 호남차별이 35년이라면, 조선후기 영남차별은 200년이다. 안동에서 바라보는 안동 김씨에 대해서 이야기해달라.

권력 쥔 ‘장김’, 안동에선 ‘왕따’

“안동 김씨 집안은 안동에서 대략 두 지역에 나뉘어 산다. 하나는 안동에서 영천 쪽으로 가다보면 나타나는 길안면 묵계리다. 산수가 아름다운 묵계리에는 묵계서원(默溪書院)과 만휴정(晩休亭)이 있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1431∼1517)이 무오사화를 겪은 후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안동에 내려와 살던 곳이다. 보백당은 청렴결백해 안동의 청렴한 선비상을 정립한 인물이다. 만휴정은 보백당이 죽으면서 남긴 유훈으로 유명하다.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이라는 편액이 그것이다. ‘우리 집안에는 보물이 없다. 보물은 오로지 청백뿐이다’는 정신이다. 보백당의 후손은 대대로 향리에서 학문을 연마하며 소박하게 살았다. 안동 김씨라 해도 벼슬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권력과는 별 관련이 없다.

벼슬을 많이 한 쪽은 소산(素山)에 살던 안동 김씨다. 종가인 ‘양소당(養素堂)’과 풍산 들판이 바라다보이는 ‘삼구정(三龜亭)’이 있는 곳이다. 바로 이 소산에서 안동 김씨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청음 김상헌이 태어났다. 서울 장동에 살던 안동 김씨의 뿌리가 소산이다. 비록 서울에 살기는 했지만, 문중 행사가 있으면 서울의 장김들이 이쪽 안동 소산에 내려오곤 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 안동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남인이 지배했다. 퇴계 선생의 문하가 모두 남인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노론이던 소산의 안동 김씨들은 안동 사람들과 따로 놀 수밖에 없었다. 당색이 달랐기 때문이다. 서울의 권력은 장김들이 잡고 있었지만, 고향인 안동에 와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물론 서울과 연계돼 있었기 때문에 소산의 김씨들이 중앙정부와 연줄이 닿는 실세이긴 했지만 안동 전체 분위기에서는 ‘왕따’ 당하는 상황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소산의 김씨들이 서원을 건립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영조 즉위 4년 만인 1728년에 이인좌의 난, 즉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했고 여기에 영남의 남인 집안이 상당수 개입했다. 즉 경상우도인 경남지역의 남인들은 무신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노론이 옹립한 영조를 부정했고 그 부정이 무신란으로 발발했다.

무신란을 진압한 후 조정에서는 경상좌도인 경북 안동 일대의 민심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이 무렵 소산의 김씨들은 안동 시내에 청음 김상헌을 기념하는 서원을 세우기 위해 공사에 들어갔다. 거의 완공되어 기왓장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안동의 유림이 ‘이를 허락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안동 일대의 거의 모든 유림이 반대의견을 표시했다. 마침내 영남 유림이 합세해 서원의 기둥에다 밧줄을 묶고 말을 동원해 끌어당겼다. 이는 지금까지도 안동의 식자층 사이에 회자될 만큼 함축적인 사건이다. 안동 김씨와 영남 유림의 자존심을 건 한판 대결이었다. 결국 ‘장김’쪽에서 서원을 세우지 못했다.”

영남 고택이 잘 보존된 이유


보학을 하려면 한학에 대한 기본지식을 가지고 여러 집안에 남아 있는 문집을 번역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야기한 것처럼 노론정권과 남인의 영남(안동) 유림은 날카롭게 대립했던 것 같다. 안동의 유림이 정권에 거세게 저항하니까, 대원군 시절인 1891년에는 김가진(金嘉鎭·1846~1922)이라는 인물을 안동부사로 파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김가진은 장김이었다. 당시 서울의 장김들 중에서 가장 명석하고 강단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가장 능력 있는 인물을 문제 지역인 안동으로 내려보낸 목적은 두 가지인 것으로 전한다. 하나는 남인의 아지트인 안동 유림을 제압하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는 당시 안동의 명문가인 유성룡 집안과 김성일 집안을 추종하는 제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병호시비(屛虎是非)’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김가진은 결국 두 가지 문제 모두 해결하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만큼 노론정권에 대한 안동 유림의 결속력과 저항의식이 강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가진은 서울에 돌아와 임금에게 ‘천김쟁쟁 하류청청(川金錚錚 河柳靑靑)’이라는 보고를 올렸다. ‘내 앞(川前)에 사는 의성 김씨들은 쇳소리처럼 쟁쟁하고, 하회에 사는 풍산 유씨들은 푸른 솔처럼 청청하다’는 내용이다. 굽히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쟁쟁과 청청’은 결국 타협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대가는 배고픔으로 다가왔다. 안동은 원래 산이 많아서 논이 적다. 비도 적게 내리는 편이라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벼슬을 하지 못하니 월급도 없었고, 권력에서 나오는 부수입도 전혀 없었다. 흉년이 들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게 예사였다. 이 지역 사람들은 초근목피라는 말이 안동의 남인에게서 유래했다고 주장한다. 그만큼 척박하게 살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금만 흉년이 들면 밥 굶는 일이 예사였다.

접빈객(接賓客)을 중시하는 사대부 집안에서조차 손님을 대접할 양식이 부족한 경우가 허다했다. 멀리서 온 귀빈에게도 대접할 것이 없어서 조당수(粗糖水)를 대접했다는 이야기를 안동의 명문가 후손에게서 많이 들었다. 조 껍질을 벗기고 죽을 끓인 것이 조당수다. 안동 전탑 옆에 자리잡은 고성(固城) 이씨 대종택인 임청각(臨淸閣)은 대저택이고 부잣집이다. 그런데 임청각에 전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생치(生雉) 다리’다. 살아 있는 꿩의 다리라는 뜻이다. 손님이 왔는데 대접할 반찬이 없어 하인을 시켜 급하게 들판에 나가서 꿩을 한 마리 잡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손님 밥상에 꿩의 다리 하나를 일부러 날것으로 올려놓았다. 삶아서 요리하지 않고 날것으로 올려놓은 이유는 그 손님이 먹어버리면 다음 손님에게는 꿩의 다리를 올려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생치다리 밥상을 받은 손님은 꿩의 다리를 먹지는 못하고 그저 쳐다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임청각 같은 집안도 이 정도였으니 다른 서민 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조당수와 생치다리 이야기는 안동의 사대부가 얼마나 어렵게 살았는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일화다.

권력에서 소외되어 벼슬은 시켜주지 않고, 녹봉이 없으니 배는 고프고, 벼슬은 못해도 양반의 체통은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품위를 그나마 유지하는 방법은 오직 글공부밖에 없었던 것 같다. 글이라도 잘 읽어야 양반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난국을 타개하는 방법은 종가를 중심으로 결속을 다지는 것이다. 중앙권력을 대신할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남인은 그 권위를 종가에서 찾지 않았나 싶다. 현재에도 노론보다 남인 집안의 고택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제사뿐 아니라 집안의 문중행사에도 열심이다. 종가를 중심으로 하는 문중 결속력에서 노론은 남인을 따라가지 못한다. 문중과 종가에 대한 결속력이 다른 지역에 비해 강화될 수밖에 없었던 정치사회적인 원인이 바로 조선 후기의 남인 소외였다. 이것이 남인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던 안동과 영남에 유교문화와 고택이 상대적으로 잘 보존된 계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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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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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장동김씨라 불리는 신안동김씨와 영남 남인에 관한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