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충렬공연보 01 (1-2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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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9-18 23:27 조회1,585회 댓글1건본문
‘△’ 는 연도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임
(1세) 1212년 강종1
○ 김효인(金孝印, ?∼1253, 병부상서 한림학사)과 금녕송씨(원흥진부사 낭장 송기宋耆의 딸) 사이에 태어남.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원손.
<시대상황>
1206년 테무진(칭기즈칸)은 몽고족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다음, 동서 각 방면으로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수행. 1211년에 금 침략. 금의 지배하에 있었던 거란족이 1216년부터 1219년까지 고려 침입.
(2세) 1213년 강종2 (고종원년)
○ 태어나서 안동에 있는 조부 김민성(敏成)의 집에서 성장함.
*김민성은 안동 향리 출신으로 과거 급제후 장야서승겸(한림)직사관을 역임했으나, 당시 무신정변으로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어려워지자 낙향하여 자손 교육에 전념한 듯함. 후에 1남 김창, 2남 김효인이 과거에 급제함
(3세) 1214년 고종1
(4세) 1215년 고종2
(5세) 1216년 고종3
<시대상황>
금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 8월 고려로 쳐들어 와서, 고려의 서북지역, 수도인 개경부근과 파주, 광주, 원주, 제천 등지를 유린. 조충, 김취려 등이 막아냄. 1219년 정월 마침내 고려·몽고·동진국의 연합군에 의해 고려의 강동성에서 섬멸.
(6세) 1217년 고종4
(7세) 1218년 고종5
(8세) 1219년 고종6
<시대상황>
최우, 1219년(고종 6)에 아버지 최충헌이 죽자 그 뒤를 이어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고, 한사(寒士)를 많이 선발, 등용하고 아우 향(珦)을 귀양보내는 등 인심을 얻는 데 크게 노력함.
(9세) 1220년 고종7
(10세) 1221년 고종8
(11세) 1222년 고종9
(12세) 1223년 고종10
△ 상락대(上洛臺)와 映湖樓(영호루) 등지를 다니며 유상함.
*상락대(上洛臺) : 안동부 서쪽 25리 회곡촌(檜谷村)의 남쪽 기슭에 있는데 상락공(上洛公) 김방경(金方慶)이 일찍이 유상(遊賞)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 동쪽에 마암(馬巖) 절벽이 있어 천길을 깎아 세운 듯 하다. 암서(巖西)에는 석대(石臺)가 반회(盤回)하고 기괴(奇怪)한 경치가 형용하기 어려우며, 아래는 맑은 못에 배를 댈만하고 위에는 수십 인이 앉을 수 있다. 돌 사이에는 비채(菲菜)가 많이 나는데, 전하기는 상락공이 심은 것이라 한다. 《출전 : 국역 영가지 권지2 pp110》
훗날 1597년 2월에 학봉 김성일이 상락대(上洛臺)를 유람하고 시 두수를 지었다.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은 학봉 김성일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살면서 일찍이 서로 산을 나누어 갖자는 약속을 하였으며, 상락대를 유람하고 시 여러 수를 지었다. 권호문(1532∼1587)의 문집 <송암집>과 김성일(1538∼1593)의 문집 <학봉집>에 상락대를 유상하고 노래한 시가 실려 있다.
*영호루(映湖樓) : 영남 3대 누각의 하나로 안동시내 낙동강 건너편 정하동의 우뚝 솟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1970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기 전까지는 강 건너편 당북동에 있었다. 김방경이 신사년(1281년) 제2차 일본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고향인 복주 영호루에 이르러 시 한수를 지었는데 <동문선>에 실려 있다. 또 훗날 김방경의 둘째아들 김흔(金 ) 장군, 사위 채홍철, 김방경의 현손 金九容 등이 영호루에 올라 선조 김방경을 생각하면서 시를 지었다. 현재 김방경의 시 현판이 걸려 있다.
(13세) 1224년 고종11
○ 아버지 김효인, (경북 포항)보경사 원진국사비(이공로 찬)를 書함. 당시 "장사랑 대관서승 겸 보문각 교감"을 역임.
△ 아버지 김효인, (전남)영암(靈巖)의 도갑사(道甲寺) 등지에 임금의 명으로 비명(碑銘)을 씀.
(14세) 1225년 고종12
○ 백부 김창, 고종 때에 최우(崔瑀)에게 등용되어 정방(政房)에서 전선(銓選-인재 선발)에 관한 사무를 관장함.
(15세) 1226년 고종13
(16세) 1227년 고종14 ⇒ (35세) 1246년 고종33
○ 나이 16세가 되어 삼한공신 태사대광 상서우복야을 지낸 선조 일긍(日兢)의 음보(蔭補)로 양온사 동정(同正)에 선임됨.<김방경 행장>
○ 다시 대정(隊正)이 됨.
○ 태자부 견룡(牽龍)을 거침.
○ 산원(散員) 겸 식목 녹사(式目錄事)로 임명됨.
○ 시중 최종준(崔宗峻, ?∼1246)이 김방경의 충직함을 사랑하여 융숭하게 대우하였으며 무슨 큰 사업이 있으면 모두 맡김.
○ 서북면 병마녹사(綠事)가 됨
○ 별장(別將)이 됨
○ 다시 낭장(郎將)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되어 우창(右倉)을 관할하게 되었는데 어떠한 청탁도 들어주지 않음.
<시대상황>
칭기스칸 죽음.
(17세) 1228년 고종15
(18세) 1229년 고종16
<시대상황>
최우, 1229년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하여 야간순찰과 도둑을 단속하게 하였는데 이 야별초는 후에 삼별초(三別抄)로 발전, 개편되어 최씨정권의 사병집단으로 경찰과 전투의 임무를 맡김.
*삼별초 (三別抄) : 고려시대 경찰 및 전투의 임무를 수행한 부대. 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신의군(神義軍)을 말함. 최씨무신정권의 최우(崔瑀) 집권기에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용사를 모아 매일밤 순찰, 단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야별초라 하였는데 도둑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군사의 수를 늘리고 이를 나누어 좌별초와 우별초라 하여,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 도망온 자들로 편성된 신의군과 함께 삼별초라 함. 후에 김준(金俊)·임연(林衍) 등이 정변을 일으킬 때 중요한 무력기반으로 삼는 등 권신(權臣)들에 의하여 설치되고 지휘. 대몽강화 이후에는 진도를 본거지로 몽골과의 항전을 전개.
(19세) 1230년 고종17
(20세) 1231년 고종18
△ 자(字)를 본연(本然)이라 함.
○ 아버지 김효인, 몽고군이 고려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서 몽고측의 첩문(牒文)을 인수하는 일을 맡음.
<시대상황>
몽고의 1차 침입 시작. 살례탑(撒禮塔, 살리타이)을 주장으로 하는 몽고의 대군이 요동을 점령하고 압록강 하류를 건너 고려에 침공. 북계 제성에서의 치열한 전투와 3군의 파견에도 불구하고 11월에는 몽고의 선봉대가 개경 근교에 도달. 몽고와 일단 화의를 성립.
(21세) 1232년 고종19
○ 백부 김창, 강화로 천도하면서, 금자광록대부 수사공 정당문학 상서좌복야 집현전태학사 판공부사 태자소보(金紫光祿大夫守司空政堂文學尙書左僕射集賢殿大學士判工部事太子少保)로 제수됨.
*하천단(河千旦, ?∼1259)이 지은 “제재신 임경숙 채송년 김창 조돈 추밀원사 최인 마제(除宰臣任景肅蔡松年金敞趙敦樞密院使崔璘麻制)”가 동문선 제26권 제고(制誥)에 실려 있음.
<시대상황>
당시 집권자인 최씨 정권은 몽고와의 항전을 결의하고 1232년에 개성 사람들을 강화로 피난하게 하는 한편, 제도(諸道)의 백성을 산성과 해도(海島)로 피난하게 하고 드디어 왕으로 하여금 천도를 단행.
몽고의 2차 침입. 개경을 거쳐 한강 이남까지 내려온 몽고군은 장군 살리타이가 김윤후에게 사살되자 곧 철수. 1232년 대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된 현종 때의 대장경판(大藏經板) 소실.
(22세) 1233년 고종20
○ 강화도 정족산 아래에 거주함.
*전등사가 자리잡은 정족산 아래 옛 포구 자리, 강화도 길상면 온수3리로 현재의 강남중학교 앞 마을. "고려 고종때 도원수(都元帥) 김방경(金方慶)께서 한 때 이곳에 살았다 하여 원수리(元帥里)라 하였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온수리(溫水里)>로 된 것이며, 그가 살던 집의 현판을 해령당(海寧堂)이라고 한 것이 와전되어 해랑당이라 했다."<강화사(江華史)>
(23세) 1234년 고종21
○ 아버지 김효인, (전남 강진)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前面 비문(이규보 찬)을 書함. 당시 "장사랑 중서사인 지제고 태자사의랑 사 자금어대"를 역임.
<시대상황>
/고금의 예의를 수집, 고증하여 50권으로 엮은 전례서(典禮書)인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을 1234년 금속활자로 간행됨.
*김방경은 전고(典故)를 많이 알고, 박식(博識)하고 규범(規範)이 있어 일을 처리해 나가는 데 있어서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고, 옛 예식을 많이 알았다고 함.
(24세) 1235년 고종22
△ 몽고의 침략에 맞서서 큰 공을 많이 세움.
*후에 1281년 2차 일본정벌을 앞두고 釋 宓庵(석 복암, =원감국사 충지)이 지은 도원수 김시중을 축수하는 소[都元帥金侍中祝壽疏]<동문선>에 ---일찍이 백여 차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라는 기록으로 보아 항몽전쟁을 수없이 수행한 듯하나 구체적 기록은 찾아볼수 없음.
<시대상황>
몽고의 3차 침입. 이후 5년에 걸쳐 3회의 침입. 경상, 전라도까지 확대. 고종 25년 겨울 경주 황룡사 등 귀중한 문화재의 손실을 입음.
(25세) 1236년 고종23
○ 아버지 김효인, 추동(秋冬)에 경상도 안찰사(按察使)를 지냄.
<시대상황>
1236년 몽고항쟁 당시 불력(佛力)에 의하여 몽고군을 격퇴하고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소실된 대장경판의 재각(再刻)에 착수. 이후 16년 걸쳐 1252년 완성.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 경상남도 합천군(陜川郡) 가야면(伽倻面) 해인사에 있는 고려시대 대장경판. 1995년 세계유산위원회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정식 등록. 국보 제32호.
*팔만대장경의 제작에는 당시의 집권자 진양공 최이를 비롯하여, 월남사지 진각국사비 건립을 주도한 몽여, 정안, 수기, 이규보 등 진각국사 혜심의 문인 문도 등이 주도하였고, 글자체는 단정한 구양순체로 한 사람이 쓴 글씨 같다고 함. 김방경의 아버지 김효인도 팔만대장경 제작에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많음.
(26세) 1237년 고종24
○ 백부 김창, 1237년 4월에 대복시사(大僕寺事)로서 국자감시의 시관이 되어 시, 부 시험으로 오수(吳壽)와 10운 시 시험으로 조희보(曹希甫) 등 81명과 명경 시험으로 4명을 뽑음
(27세) 1238년 고종25
(28세) 1239년 고종26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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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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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추석연휴 잘 보내고 계시는 지요? 고국 한국에는 비가 많이 왔다고 들었는데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충렬공 연보를 간략히 정리해 보고 있습니다.
먼저번 17회에 걸쳐 연재한 충렬공 연보는 혼선을 피하기 위하여 삭제하려고 합니다. 양해하여 주시옵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