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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다시보는 충렬공연보 04 (62-6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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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9-19 19:00 조회1,2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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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세) 1273년 원종14

○반적들이 탐라에 들어가서 내성과 외성을 쌓고 그 험준함을 믿고 더욱 더 날뛰게 되었으며 때때로 나와서는 노략질을 하였으며 안남(安南)의 수령 공유(孔愉)를 붙잡아 가지고 감. 이리하여 바닷가 지방은 소란하게 되었으며 반적들의 침입 범위는 경기(京畿)에까지 확대되었고 도로가 제대로 통하지 못하게 되었음.


<탐라에서 삼별초 토벌> 왕이 김방경을 행영중군병마원수(行瑩中軍兵馬元帥)로 삼아서 보냄. 다시 군사들을 훈련하여 (4월)수군과 함께 만여 명을 거느리고 흔도, 홍다구와 더불어 반남현(潘南縣)에 주둔하고 장차 탐라로 떠나려 하였는데 각 도(道)들에서 온 전선들은 모두 바람에 까불리므로 전라도에서 온 1백60척 만을 가지고 떠남. 추자도(楸子島)에 들러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줄것을 기다렸다가 탐라에 도착해서 중군(中軍)은 함덕포(咸德浦)로부터 진공해 들어감.

*좌군(左軍)의 전함 30척은 비양도(飛揚島)로부터 반적들의 보루를 직충해서 쳐들어감. 얼마 후에 반적들의 괴수 김통정(金通精)은 그 일당인 70여명을 인솔하여 산중으로 도망해 들어감. 여러 장군들을 지휘하여 자성에 들어가니 선비들과 여인들이 소리를 내어 통곡함. 김방경이 말하기를 “다만 큰 괴수들만 죽이려 할 뿐이니 너희들은 겁내지 말라!”고 하고 그 우두머리인 김윤서(金允敍) 등 6명을 붙잡아다가 네거리에서 참형에 처하였고 그들과 친당(親黨) 35명을 사로잡아 항복한 반군 1천3백여 명과 함께 배에다 나누어 싣고 귀환함.

*이에 흔도는 몽고 군사 5백 명을 남겨 두고, 김방경 역시 장군 송보연(宋甫演)과 중랑장 강사신(康社臣), 윤형(尹衡)으로 하여금 경군(京軍) 8백 명과 외별초(外別抄) 2백 명을 영솔하고 탐라에 남아서 평온한 질서를 유지하게 함.


○ 군사들을 이끌고 귀환하다가 나주 땅에 와서 사로잡아 왔던 친당(親黨)들을 베어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 어떠한 죄과도 추궁하지 않았음. 또 크게 군사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음.


(5월 24일)아들 김수(綬) 및 지후(祗候) 김감(金憾), 별장 유보(兪甫) 등을 보내 승리를 보고케 함.

*왕은 김수를 대장군으로, 김감을 공부 낭중으로, 유보를 중랑장으로 임명하였으며 또 고세화가 맨먼저 올라가서 적진을 함락시켰다 하여 그에게 낭장 벼슬을 주었고 그 밖의 인원들에게도 차등 있게 상을 줌.


○ (6월) 초하루 임오일에 대장군 김수(金綬)를 원나라에 파견하여 탐라도의 역적을 평정한 것을 보고하게 함. (6월) 정유일에 원수 김방경이 개선하여 돌아올 때에 왕은 광평공 왕혜로 하여금 교외에 나가서 위로하려 하고 승선 박항(朴恒)을 보냄. 왕이 아주 후하게 위로해 주고 특별히 홍정(붉은 띠)을 그에게 주었고, 장사(將士)들에게 대규모의 연회를 차려 주었으며,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성대(省臺)에게 특별히 지시함. 드디어 탐라를 평정한 공을 논하여, 김방경을 시중(侍中)으로, 변윤을 판추밀원사로, 김석(金錫)을 상장군 지어사대사로, 나유ㆍ송보연을 함께 대장군으로 삼음.


<3차 入元> 가을 7월 을미일에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원나라로 갔는데 황제는 문지기를 시켜서 빨리 들어오라고 독촉하고 김방경을 승상(丞相)의 다음 자리에 앉히고 자기의 음식을 걷어서 김방경에게 주었으며 또 금으로 장식한 말 안장과 채단(綵緞)으로 만든 옷과 금, 은을 주었는바 이러한 총애와 우대는 다른 사람이 받아 본 적이 없었음. (이듬해 1274년 1월)귀국하게 되자 황제는 김방경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더하여 줌.

*고려군을 이끄는 金方慶에게는 丞相(승상) 다음의 지위인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라는 작위가 수여되었다. 개부의동삼사라면 일찍이 신라·백제·고구려 임금들이 隋·唐의 황제로부터 받은 작위이다.


○ 둘째아들 김수(1250-1308), 24세로 1273년 아버지를 따라 탐라에서 삼별초를 토벌하고 대장군이 된 뒤, 곧 사재경(司宰卿)에 오름.


<시대상황>

○ 금나라가 멸망한 직후인 1235년부터 시작된 몽골과 남송과의 전쟁에서, 결국 1276년 남송의 수도 항주(杭州)가 함락됨으로써 40년 이상 끌었던 긴 전쟁은 막을 내림.




(63세) 1274년 원종15 (충렬왕원년)


<900척 전함 건조> 1274년 <원종>15년에 제(帝)가 일본을 치고자하여 김방경과 홍다구에게 조(詔)하여 전함(戰艦)을 감조(監造)하게 하니 조선(造船)을 만약 만양(蠻樣)에 의거하면 공비(工費)가 많고 장차 일국(一國)이 근심하였다. 김방경이 동남도 도독사(東南道都督使)가 되어 먼저 전라(全羅)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어 자문(咨文)으로 중서성(中書省)의 격문(檄文)을 받고 본국(本國 고려(高麗)의 조선양식(造船樣式)을 써서 독촉하여 만들었다.

*추밀원 부사 허공을 전주도 변산에, 좌복사 홍록주를 나주도 천관산에 파견하여 재목을 준비하게 하였다. 정월 15일에 이를 모두 모아 16일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5월 그믐에 이르러 완료하여 큰 배와 작은 배를 합해 900척을 완공하였다.

출정을 앞둔 6월 중순에 高麗 국왕 元宗이 재위 15년에 타개했다. 元의 大都에서 세자 諶(심)과 황녀 쿠츠르가이미시(쿠빌라이의 딸인 齊國大長公主)의 결혼식이 거행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세자 諶(忠烈王)의 즉위식전과 元宗의 服喪(복상)이 잇달아 거행되는 바람에 출정의 시기가 연기되었다. 원정군이 合浦를 출항한 것은 元宗의 유해가 開京 교외 소릉에 안장된 9월12일의 다음 달, 즉 1274년 10월3일이었다.


<합포 출발> 10. 3일 이해에 원종(元宗)이 훙(薨)하고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매 김방경이 홍다구와 더불어 단기(單騎)로 와서 진위(陳慰)하고 합포(合浦)에 돌아와 도원수(都元帥) 홀돈(忽敦)과 부원수(副元帥) 홍다구·유복형(劉復亨)과 더불어 전함(戰艦)을 사열(査閱)하였다.

김방경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박지량(朴之亮)·김흔(金)·지병마사(知兵馬事) 임개(任愷)로 부사(副使)를 삼고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김신(金侁)으로 좌군사(左軍使)를 삼고 위득유(韋得儒)·지병마사(知兵馬事) 손세정(孫世貞)으로 부사(副使)를 삼고 상장군(上將軍) 김문비(金文)로 우군사(右軍使)를 삼고 나유(羅裕)·박보(朴保)·지병마사(知兵馬事) 반부(潘阜)로 부사(副使)를 삼아 3익군(翼軍)이라 이름하니 김흔(金)은 곧 김수(金綬)이다.

그리하여 몽고군(蒙古軍)·한군(漢軍) 25,000명, 아군(我軍) 8,000명, 초공(梢工)과 인해(引海)·수수(水手 수부(水夫) ) 6,700명, 전함(戰艦) 900여 소()로써 합포(合浦)에 머물러 여진군(女眞軍)을 기다리니 여진군(女眞軍)이 기일(期日)에 늦을까 하여 이에 발선(發船)하였다.

*松嶽壇(송악단) : 옛날의 松嶽堂(송악당)으로 金剛社의 서북 약 200步許에 있는 작은 구릉으로서 神祠(신사)를 松嶽堂이라고 했다. 지금은 高麗葬터, 白雲臺라고도 부르고 있다.

고려의 충렬왕 즉위년(1274) 金方慶 장군이 일본을 정벌할 때 金剛社에서 留宿(유숙)했는데, 그때 개경의 松嶽神을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戰勝을 빌었으므로 이 구릉을 松嶽堂이라 부르게 되고, 김해 사람도 城隍神과 함께 반드시 제사를 지냈다.<증보 김해지리지 (김해문화원, 1996)> /고을 사람들이 그대로 따라 제사하여서 이 고을의 성황당 신에게 제사하는 자는 반드시 여기에도 겸해서 제사지낸다.<동국여지승람> /고을 사람들이 여기에 김방경의 영정도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졌다.<문헌비고>

<김해시청 답변>

현재 송악단이 있던 곳은 김해 구산동 백운대고분 (경상남도 기념물 제223호) 으로 지정되어 있는 구릉의 하단부입니다. 김해여고 뒤편과 산복도로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재골 약수터 가는 길 중간에 있습니다. 승용차를 이용하실 경우, 동김해IC에서 활천고개를 지나 산복도로를 통해 삼계, 진영 쪽으로 가시다가 왼쪽편에 보이는 절개된 산봉우리 모양의 언덕 하단부에 백운대라는 비석이 있는 곳이 송악단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주변환경은 동상대상지구 택지개발사업으로 인해 구획정리되었으며, 잔존한 유적 등은 없습니다.


이후 10.5일 대마도(對馬島) 정복, 10.14일 일기도(一岐島) 진격, 10.17일 웅도(鷹島) 습격, 10.19일 하카타만 서부 이마쓰(今津) 상륙, 남방 소하라(祖原)산 점거,  10.20일 하카타만 중앙부에 상륙했다. 왜병(倭兵)이 갑자기 이르러 중군(中軍)을 쳐서 검(劒)이 좌우로 부딛쳤으나 김방경은 의연하여 조금도 물러가지 않고 한 효시(嚆矢)를 빼어 소리를 가다듬어 크게 외치니 왜(倭)가 놀라 피하여 달아나므로 박지량(朴之亮)과 김흔(金)·조변(趙)·이당공(李唐公)·김천록(金天祿)·신혁(新奕) 등이 힘껏 싸워 왜병(倭兵)이 크게 패하여 엎어진 시체가 삼대와 같았다.

홀돈(忽敦)이 말하기를, “몽인(蒙人)이 비록 싸움에 익숙하였으나 어찌 이에 비하리오.” 하였다. 모든 군사가 같이 싸워 해가 저무니 이에 해산(解散)하였다.


<하카타만 해상으로 물러남> 10월20일 밤, 연합군은 勝勢에도 불구하고 陸上 교두보에서 野營하지 않고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를 타고 하카타灣에 떠 있던 군함 千料舟로 물러났다. 육지에서 宿營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夜襲(야습)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김방경이 홀돈(忽敦)·홍다구(洪茶丘)에게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1,000리(里)에 현군(縣軍) 하면 그 칼날을 가히 당치 못한다 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비록 적으나 이미 적경(敵境)에 들어와서 사람마다 스스로 싸우고자 하니 즉 맹명(盟明)이 배를 태우고 회음(淮陰)이 물을 등짐이라 다시 싸우기를 청한다.” 하매

홀돈이 말하기를, “병법(兵法)에 ‘소적(小敵)이 견수(堅守)하면 대적(大敵)에게 사로잡힌다.’고 하였으니 피핍(疲乏)한 군사를 채찍질하여 날로 불어나는 무리를 당적함은 완전한 계책이 아니니 회군(回軍)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였다.


하카타만 대폭풍우로 궤멸적 타격을 입고, 11.20일 합포(合浦)로 귀환했다. 합포에 이르러 노획한 기장(器仗)을 제(帝) 및 왕에게 바치니 왕이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장일(張鎰)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김방경을 먼저 돌아오도록 명하여 상주국 판어사대사(上柱國判御史臺事)를 더하였다.


○ 둘째아들 김흔, (25세) 1274년(충렬왕1) 일본원정 때는 아버지를 따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참가하였고, 귀환한 후에 진주목사를 지냈다. *이때 수(綬)에서 흔(小斤)으로 개명한 듯함.


△ 손자 승우(承祐) 태어남. *승우는 후에 상서(尙書)에 이르렀음.

*김선(?1245-, +설인검의 딸)---1녀(?1262-, +나윤), 1자(?1265-), 2승용(1268-), 3승택(?1271-), 4승우(?1274-)



<시대상황>

/충렬왕, 1274년 5월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원종이 죽자 원나라에서 돌아와 왕위에 올랐다.

결혼한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와서 몽고양식의 생활을 하고 사사로이 부리는 사람도 원나라에서 데려옴으로써 고려왕실에는 몽고의 풍속·언어 등이 퍼지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1254-1324)는 1271년 부친과 숙부와 함께 고향 베니스를 출발.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미르, 중국 신강, 내몽골을 거쳐 1274년 여름 쿠빌라이의 여름수도인 상도(上都)에 도착. 이후 17년 동안 ‘대카안’ 쿠빌라이의 신하로 머물다가 1290년 말 중국을 떠나 1295년 베니스에 도착. 1298년 제노아의 감옥에서 루스티겔로 라는 사람을 만나 자신의 놀라운 견문에 대해 구술하고 그로 하여금 기록하게 한 것이 <동방견문록(원제:세계의 서술)>이다. 1324년 70세를 일기로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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