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충렬공연보 03 (54-6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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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09-19 18:58 조회1,638회 댓글0건본문
(54세) 1265년 원종6
○<1차 入元> 대장군(大將軍) 역임. 봄 정월에 광평공 순, 중서사인 장일과 함께 진봉사(進奉使)로 몽고에 가서 은혜에 사례하고 방물을 바침.
*나라의 노자돈(출장비)인 금, 은 등의 물품을 혹시 궐원이 있어 받을 사람이 없을 때는 행인(출장갔던 사람)들이 오직 써버린 바 있으나 김방경은 다 그대로 가지고 돌아와서 국고에 반납하였음.
○ 이때를 당하여 국가가 바야흐로 서북지방이 크게 위태하여 걱정되므로 백성들의 원에 따라 서북지방을 여러번 진압함.
△ 전취 박씨(前娶 朴氏) 죽음. 또다시 손씨(孫氏)를 재취(再娶)함.
*후에 딸 하나를 낳았는데, 통례문기후(通禮門 候) 채의(蔡宜)에게로 출가(出嫁)함.<김방경 묘지명>. 또한 용강 관비와의 사이에 딸을 낳았는데, 후에 통례문기후(通禮門 候) 채홍철(1262-13 )에게 출가하여 채하중, 채하노를 낳았다고 함.<고려사>,<1340년 채홍철 묘지명>. *손씨는 용강관비와, 채의는 채홍철은 동일 인물인 듯함.
△ 손자 자(資) 태어남.
*김선(?1245-, +설인검의 딸)---1녀(?1262-, +나윤), 1자(?1265-), 2승용(1268-), 3승택(?1271-), 4승우(?1274-)
(55세) 1266년 원종7
(56세) 1267년 원종8
(57세) 1268년 원종9
△ 일찍이 서북면(西北面) 병마사로 있었을 때 그 지방 사람들에게 좋은 정치를 하여 인심을 얻음.
△ 모상(금녕송씨)을 당하여 고향(안동)에 갔다가 돌아옴.
○<1차 무고사건>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됨. 2월, 중방(重房) 반주(班主) 전분의 무고로 강직되어 남경(南京-지금의 서울) 유수로 보내짐.
*김방경은 왕실의 편에 서서 개경환도를 추진하면서 김준 등의 무신세력과 대립하면서 발생한 사건인 듯함.
○ 서북면의 여러 고을들에서 왕에게 글을 올려 남경으로 부임한 지 겨우 사흘만에 판례빈성사로 승진되고 다시 서북면 병마사가 되어 다시 서북면을 진무함.
△ 그후 중앙 정부(강화도)에 들어와서 형부상서, 추밀원 부사로 됨.
○ 손자 승용(承用, 1268-1329) 태어남.
*승용은 후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이 밀직사(密直使)에까지 이르렀는데 청렴하다고 칭하였음.
*김선(?1245-, +설인검의 딸)---1녀(?1262-, +나윤), 1자(?1265-), 2승용(1268-), 3승택(?1271-), 4승우(?1274-)
<시대상황>
/1268년 원종이 강윤소(康允紹)·임연(林衍) 등을 시켜 김준을 참살함.
(58세) 1269년 원종10
○<2차 入元> 추밀원부사 역임. 임연에 의해 원종이 폐위되었을때, (9월 경술일)알탈아불화, 대장군 최동수와 함께 표문(表文)을 가지고 원나라에 감. 세자가 황제에게 군대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므로 몽가독(蒙哥篤)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되었는데, 중서성, 세자, 이장용(李藏用) 등과 협의하여 원나라 군대가 대동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함.
○ 동경(東京, 요양)에 이르러 왕(원종)이 이미 왕위에 다시 오르게 되었고 또 원나라에 입조(入朝-예방)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그냥 머물러 있으면서 왕이 오기를 기다림.
○ 당시에 최탄(崔坦), 한신(韓愼)이 반란을 일으켜 여러 고을의 수령들을 죽였으나 오직 박주(博州)의 장관인 강분과 연주(延州)의 장관인 권천(權闡) 두 사람만은 예의에 맞게 대우하면서 “김공(김방경)의 덕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강분, 권천 두 사람이 김방경의 매부들이었기 때문이었음.
<시대상황>
/임연, 1268년(원종 9)에 정권을 장악한 김준과 왕의 사이가 벌어진 것을 알고 환자(宦者) 강윤소(康允紹)와 최은(崔$은05)·김경(金鏡)과 함께 김준을 죽이고 그의 여러 아들과 그 무리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내었다.
이때 원나라와 화의가 진전되어 자신의 위치가 불안해지고 또 왕과의 사이도 벌어지자 삼별초와 육번도방(六番都房)을 거느리고 재추(宰樞)와 더불어 왕의 폐립을 논한 뒤 원종 대신 동생 안경공 창(安慶公?)을 옹립하고, 자신은 교정별감(敎定別監)이 되었다.
/원종, 1269년에는 태자 심을 몽고에 보냈으며, 친몽정책과 개성환도를 추진하다가 임연(林衍)에게 폐위당하여 동생 안경공 창(安慶公)이 왕위에 올랐으나, 원의 도움으로 4개월 만에 복위되어 곧 몽고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해에 서경의 최탄(崔坦) 등이 임연(林衍)을 타도한다는 구실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59세) 1270년 원종11
○ 봄 정월 초하루 신축일에 왕이 박주(博州)에 이르러, 기유일에 이장용, 곽여필과 함께 동경(요양)으로부터 왕의 행궁(行宮)에 와서 뵈었음. 동지추밀원사 어사대부에 배명됨.
○ 몽가독과 함께 서경(평양)으로 옴. 최탄 등이 몽고 군대를 이용하여 고려의 허한 틈을 타서 변란을 일으키려고 은밀히 꾀하면서 몽가독에게 뇌물을 후하게 주어 그를 꾀이었으나, 그때마다 계책을 써서 그 음모를 저지시킴.
*이후 최탄 등은 임연 등을 제거하기 위해 서경을 진압해 줄 것을 몽고에 청하여, 몽고에서는 서경에 동녕부를 설치하고 최탄을 총관에 임명하여 자비령 이북의 땅을 몽고 영토에 편입시킴. 이후 꾸준히 반환을 요청하여 1290년 돌려받음.
○<삼별초의 반란> 여름에(1270년 6월 3일) 삼별초(三別抄-좌우 별초와 신의군의 통칭)가 반란을 일으켜 인민(人民)들을 강제로 몰아서 바다로 나가 남으로 내려감. 군사 60여 명을 인솔하고 몽고의 송(宋) 만호 등의 군대 천여 명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여 반적들의 배가 영흥도(靈興島)에 정박하고 있어 이것을 공격하려 하였는데 송만호가 겁을 내어 말리었으므로 반적들이 달아나 버림
○<전라도 탈환> (8월 19일)반적이 진도에 들어가 여기를 거점으로 하고 여러 고을들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였음. (9월)신사전 대신에 전라도추토사(全羅道追討使)로 임명되어 몽고 원수 아해(阿海)와 더불어 군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반적을 토벌하게 되어 전주와 나주를 탈환함.
*토적사(討賊使) 상장군 변윤(邊胤), 장군 조자일(趙子一), 공유(孔愉) 등이 반적들이 금성(錦城-나주)을 공격하는 것을 보고도 구원하지 않았던 사실을 탄핵하는 글을 왕에게 올렸고 섬에다 귀양 보내자고 요청했으나 왕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만 철직만 시키었다.
○<진도에서 삼별초 토벌> 아해와 더불어 삼견원(三堅院)에 주둔하고 진도를 건너다 보면서 진을 침.
○<2차 무고사건> 때마침 반남(潘南) 사람 홍찬(洪贊), 홍기(洪機)가 아해에게 참소하여, 아해는 김방경을 철쇠로 얽어 매게 하고 졸병 50명으로 하여금 서울(개경)에로 압송해 가게 하니 보는 사람마다 모두 원통하다고 하였으며 심지어 슬퍼서 우는 사람들까지 있었음.
*삼별초 반란 진압차 출정한 몽고 원수와의 대립으로 인해 발생한 사건인 듯함.
○(윤 11월) 왕이 즉시로 달로화적에게 청하여 다시 김방경으로 하여금 반적들을 토벌하게 하고 그에게 상장군의 벼슬을 줌.
(12월, *김구金坵의 고주표告奏表에는 11월 22일) 통군참지정사(統軍參知政事)로 진도에 이르러, 고려군 戰船들만 진공했는데 삼별초 戰船들의 역습을 받아 모두 도망침. 홀로 적선들 가운데로 돌입했다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함. 김천록(金天祿)과 시위병이었던 허송연(許松延), 허만지(許萬之) 등과 장군 양동무(楊東茂)의 도움으로 포위를 뚫고 나옴.
*장군 안세정(安世貞), 공유(孔愉) 등이 구원하러 오지 않았던 죄를 들어서 그들을 베려고 하였으나 아해가 말림
<시대상황>
원종, 1270년 임연이 죽자 그 아들 임유무(林惟茂)를 교정별감에 임명하여 실권을 행사하게 하였으나, 그가 모반하므로 주살함. 그해 태자와 더불어 몽고로부터 돌아와 개성환도를 실현.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배중손(裴仲孫)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三別抄)가 항전을 일으키자 3년 만인 1273년에 진압.
(60세) 1271년 원종12
○ (4월) 왕이 안세정과 공유의 관직을 박탈하고 또 장군 인공수(印公秀)를 보내 아해가 위축되어 비겁하게도 싸우지 아니 하였던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하니 황제는 아해를 파직시키고 흔도를 그 대신으로 임명하였으며 홍찬 등을 참형에 처할 것을 조서로 명령함.
○(5월 15일) 흔도와 더불어 전략을 토의하고 진도를 공격함. 흔도와 함께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벽파정(碧波亭)으로부터 쳐들어감.
*영녕공(永寧公)의 아들 왕희(熙)와 왕옹(雍) 및 홍다구(洪茶丘)는 좌군(左軍)을 거느리고 장항(獐項=노루목)으로부터 들어갔으며, 대장군 고을마(高乙?)는 우군(右軍)을 거느리고 동면(東面)으로부터 쳐들어감.
적군이 붕괴되는 것을 보고 그를 추격하여 남, 여 만여 명과 전함 수십 척을 획득하였는데 남은 적들은 탐라로 달아남. 진도에 들어가서 쌀 4천 석과 재물, 보배, 기구, 병기 등을 얻어 모두 왕경에로 운반해 가게 하였고, 역적들에게 강요당하여 항복하였거나 추종하였던 양민(良民)들은 모두 자기 생업에 다시 종사하게끔 하고 개선하였음. 왕은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김방경을 맞이하게 하고 그의 공적을 평가하여 수태위 중서시랑 평장사의 벼슬을 더하여 주었음
△ 손자 승택(承澤, ?-1358) 태어남.
*후에 김혼의 딸과 결혼. 중서 평장사에 이름. 시호는 양간(良簡).
*김선(?1245-, +설인검의 딸)---1녀(?1262-, +나윤), 1자(?1265-), 2승용(1268-), 3승택(?1271-), 4승우(?1274-)
<시대상황>
충렬왕, 1271년 원나라에 가서 세조에게 혼인 허락을 받고, 이듬해 귀국시에 몽고풍속인 변발(辯髮)과 호복(胡服)을 하여 고려인들은 탄식, 우는 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61세) 1272년 원종13
○ 회갑이 됨.
○ 셋째아들 순(1258-1321), 나이 15세쯤[志學]에 문음(門蔭)으로 벼슬하여 장생서승(掌牲署丞)이 됨. *뒤에 별장(別將)으로 바뀌면서 어견룡행수(御牽龍行首)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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