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족산 산행지 양촌선생 3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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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5-09-22 00:14 조회1,644회 댓글3건본문
백족산 산행지 양촌선생 3대묘
▣ 양촌 권근 3대묘 ▣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 지방기념물 32호
양촌 권근(陽村 權近)과 그 아들 권제(權踶)와 그 손자 소한당 권람(所閑堂 權擥)의 3대묘소이다. 권근의 묘는 경기도 광주<☞오포)에 있었는데 세종 22년(1440) 현 장소로 이장한 것이다. 묘는 원형 봉분에 호석(護石)으로 봉축되었다. 봉분의 높이 1.8m, 둘레 25m이며 상석(床石) 2좌가 나란히 있고 묘갈이 2기, 장명등 1기, 거대한 문인석이 2기 있다. 양촌의 신도비는 비신(碑身)이 대리석으로 높이 215cm, 두께 33cm, 폭 116cm로 비문은 이개(李愷)가 글을 지었고 세종 29년(1447)에 세워졌다. 권근(1352~1409)은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로 대제학, 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길창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동국사략을 찬수하였고 시호는 문충이다.
권제의 묘는 그 아버지 양촌의 묘아래 있는데 양식은 양촌 묘와 같고 묘앞에 비갈 1기, 상석 1좌, 문인석 1좌, 장명등 1기가 있다. 권제(1387~1445)는 양촌의 차남으로 벼슬은 우찬성, 고려사를 편찬하고 용비어천가를 찬하였다. 시호는 문경이다.
손자 권람의 묘는 그 아버지 권제의 묘 아래 있는데 호석은 없고 상석, 묘갈, 문인석, 장명등이 갖추어져 있다. 신도비는 대리석으로 높이 210cm, 두께 23cm, 폭 99cm로이고 신숙주가 비문을 지었다. 권람(1416~1465)은 정난공신, 좌익공신, 길창부원군에 봉해지고 벼슬은 좌의정이며 시호는 익평이다.
《출전 : 음성군지 pp1287/1996》
▣ 권근(權近) 신도비 ▣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
권근(1352~1409)은 여말선초(麗末鮮初)의 학자로 본관은 안동, 자(字)는 가원(可遠), 호(號)는 양촌(陽村),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으로 공민왕 때 나이 18세로 과거에 급제, 춘추관 검열이 되었고 공민왕 23년(1374) 직강 응교에 임명,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에 이르렀다.
조선이 건국되고 조선 태조의 명으로 태조 2년(1393) 정총(鄭摠)과 함께 정릉(定陵)의 비문을 짓고, 중추원사(中樞院事)가 되었다. 태조 5년(1396) 표전(表箋)을 잘못 쓴 정도전(鄭道傳)을 대신하여 자진해서 명(明)나라에 건너가 해명을 잘하여 명황제로부터 지극한 예우를 받고 돌아왔다.
태종이 즉위하자 좌명공신(佐命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그 후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검열(檢閱)로부터 재상(宰相)에 이를 때까지 문한(文翰)에 서임되었다.
포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문장에 능하여 조정의 모든 글월을 찬술(撰述)하였다. 저서는 《양촌집(陽村集)》·《5경천견록(五經淺見錄)》·《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입학도설(入學圖說)》과 작품으로 《상대별곡(霜臺別曲)》이 있다.
권근은 고려 말에 죄에 연좌되어 충주로 유배당하여 이 고을 남쪽 양촌에 살았는데 이로써 호를 양촌(陽村)이라 하였다.
이 신도비는 대리석으로 되었고 이개(李愷)가 글을 지었고 세종 29년(1447)에 세웠다.
▣ 권제(權踶) 묘비 ▣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
권제(1387~1445)의 본관은 안동, 시호(諡號)는 문경(文景), 양촌 권근의 아들로 벼슬은 세종조에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고 증영의정(贈領議政)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에 봉해졌다. 묘역에는 석물이 갖추어져 있다.
▣ 권람(權擥) 신도비 ▣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
권람(1416~1465)은 세조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字)는 정경(正卿), 호(號)는 소한당(所閑堂)으로 찬성사(贊成事) 권근(權近)의 손자이며 찬성(贊成) 권제(權踶)의 아들이다. 문종 즉위년(1450) 식년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감찰을 거쳐 이듬해 교리로서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함께 편찬하던 수양대군(首陽大君)과 뜻이 통하여 그의 참모가 된 뒤 양정(楊汀) 등 무장을 포섭했다. 단종 원년(1453)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한 계유정난(癸酉靖難) 때에 앞장서서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우부승지에 특진하고 세조가 즉위하자 이조참판에 발탁되었고 이어 좌익공신(左翼功臣) 1등으로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고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다.
세조 4년(1458) 수찬관(修撰官)으로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하고 우찬성에 승진, 이듬해 좌찬성,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세조 8년(1462)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이듬해 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활을 잘 쏘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시호(諡號)는 익평(翼平)이며 세조조에 배향되었다.
묘역에는 석물이 갖추어져 있으며 이 신도비는 신숙주(申叔舟)가 찬(撰)하고 권반(權攀) 서(書)이다.
《이상 출전 : 음성군지 pp1296~1300/1996》
▣ 문충공(文忠公) 사우 ▣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
문충공 부조묘는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 마을에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 (1352년~1409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하기 위하여 세운 사우이다.
현재 문충공 부조묘는 정면 3각 측면 3간반 겹처마 맞배지붕 초익공계의 목조기와집으로 앞의 1간은 퇴간이다. 부조묘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고 앞에 삼문을 세웠다.
부조묘에는 <문충공부조묘>라는 편액을 걸었다.
▣ 문경공(文景公) 사우 ▣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
방축리 능안마을 서쪽 묘하(墓下)에 우치한 권제(權踶)의 부조묘이다.
권제(1405~1459)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아들이며 권준의 형으로 태종 14년(1414)친과문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사당의 건물구조는 목조와가《木造瓦家》로 전면 3간, 측면 1간의 팔작집으로 담장과 일각문(一角門)이 설치되어 있고, 「文景公祠宇」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능안에는 양촌(陽村)이 3대의 묘소와 사당이 있는데 문경공 권제의 사당은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쇄락되어 1960년경 안동권씨(安東權氏) 중종과 유림에 의하여 재건된 것이다.
▣ 안숙공(安肅公) 사우 ▣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산7
안숙공 부조묘는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능안 마을에 안숙공 권준(1405년~1459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하기 위하여 세운 사우이다.
문경공 부조묘 오른쪽 옆에 있다. 권준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안동, 자는 오미, 정난공신으로 길창부원군 근의 아들이다.
음보로 태종 4년(1422년)에 종묘부승이 되고, 이듬해 형·이조 좌량을 거쳐 지평을 지내고 세종 20년(1483년)에 한성부소윤, 세종 26년(1444년)에 음죽현감이 되었다. 문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단종 1년(1454년)에 이조참판으로 세조가 정권 장악을 위해 반대파를 제거할 때 이에 참석하여 정난공신 2등에 오르고 안주군에 진봉되었다. 이어서 이조판서·함길도관찰사가 되었다. 세조 5년(1459년)에 죽으니 시호는 안숙이라 하였다.
현재의 사우는 정면 3간 측면 3간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앞의 1간은 툇간이다.
부조묘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고 앞에 삼문을 세웠다. 부조묘에는 "안숙공 부조묘"라 쓴 편액이 걸려 있다.
▣ 양촌 권근 일가의 일화 ▣
방축리 마을을 지나 5리쯤을 더 들어가면 능안이라는 여섯 집 정도의 작은 마을이 있다. 마을이 보이는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3m는 족히 될 듯한 두개의 큰 신도비와 산등성이에 석물들이 양촌 일가의 묘소가 보인다. 묘소아래 오른쪽 공지에 세워진 두개의 신도비는 오른쪽 것이 양촌 권근의 신도비이고, 30m쯤 떨어진 왼쪽에 있는 것이 양촌의 손자인 소한당 권람의 신도비이다. 본래 두 비석사이에 양촌의 아들 문경공 권제의 신도비가 있었으나 국법으로 3대의 신도비를 세우는 것이 금지되어 제의 신도비는 땅에 묻었다고 한다. 묘는 위로부터 양촌, 지재, 소한당의 순서로 3대의 묘가 1500여평 정도의 산등성이 위에 웅장한 문인상들과 함께 배열되어 있어 과거의 영화를 잠작케 한다. 특히 양촌의 묘는 봉분의 아랫부분을 팔각호석으로 둘러 만들어지고 문인석 네개와 가운데 석등까지 있어 왕릉을 방불케 할 정도이다. 또 묘비나 상석이 부인 것과 별개의 것으로 되어 있어 이채롭다. 이들 양촌 일가는 두 왕조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본래 크고 넓은 도량을 가진 큰 인물이기 때문에 거기에 따른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여기서 우리 후예들이 아끼고 배워야 할 애기들을 간추려서 마음의 양식으로 삼고자 한다.
(1) 양촌 권근 이야기
권근(1352~1409년)은 고려왕조의 말기에서 조선왕조의 초기에 걸쳐 크게 활약한 대학자요, 문학가였다. 고려의 충신이었던 공은 태조 이성계가 개국한 뒤에 공을 달래어 데려가려 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태조는 전에 한동네에 살아 교분이 두터운 공의 아버지 희를 통해서 양촌의 출사를 종용했다.
이때 공의 아버지 희가 공의 아들 규를 길렀는데 장성하였어도 아직 혼인을 아니하였더니 태조의 딸 경안공주와 혼인을 시켜 손녀사위로 삼았다. 어느날 태조가 희에게 이르기를 “권근이 이미 나를 잊었는가! 전조 왕씨를 위하여 수절하는 것이 아름답기는 하지마는 그대의 나이가 이미 높았는데 근이 어찌와서 보지 아니하는가? 어찌 충성에만 두텁고 효도에는 부족하냐”하니 대답하기를 “근이 어찌 늙은 아비를 잊어버리겠습니까! 몸에 병이 많아 일어날 수가 없어 그러는 것입니다. 근래 그 편지를 보니 오래지 아니하여 臣을 보러 올 것입니다”하니 태조가 심히 기뻐하며 “근이 어느날 길을 떠나고 어느날 서울에 돌아오느냐”하였다. 희가 꾸며서 대답을 하고 곧 사람을 보내어오기를 재촉하였다. 공이 할 수 없이 충주 양촌에서 나서매 감사(현 도지사)는 떠났다고 장계를 올리고 곳곳에 장막을 치고 음식을 차려놓고 기다렸다.
차마 서울로 직접 오르지 못하고 빙빙돌아 수원까지 왔는데 희가 사람을 보내 재촉하기 때문에 한강에 이르니 ‘희’가 친히 맞이하여 종일토록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고 비밀리에 이야기를 한 뒤에야 공이 강을 건너 성안으로 들어와 대궐에 이르렀다. 태조가 손님을 맞는 예편전에서 대접하고 팔도의 경치를 그린 병풍을 손에 들어 가리키면서 “어느 樓 어느 정자에 나를 위해 記를 지어 나라의 명승지를 자랑하게 하라”하니 공이 물러나와 지어 올리었다.
태조가 곧 지제교를 임명하니 공이 어쩔 수 없이 명을 받고 나와 양촌으로 돌아가는 날에 상소를 올렸다.
전조(고려조) 정몽주는 충신이니 표창하고 증직을 내려 절의를 숭상하도록 간청하였다. 이를 전해들은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논박하여 아뢰기를 “난신이 어찌 충신이 될 수 있습니까? 근의 말은 망발입니다”하였으나 태조는 여러 사람의 논박을 물리치고 그의 말을 쫓았다. 당시의 선비들이 공을 宗主(유학의 우두머리)로 여기었는데 이 일이 있은 후로는 모두 머리를 돌리고 침을 뱉었다 한다.
옛 사람이 아뢰기를 “군자가 몸을 세우는데 한번 패하면 만사를 그르친다”하였으니 어찌 삼가할 일이 아니랴!
선비 신광한의 집에 공의 초상이 있는데 김안국(조선 전기의 명신, 조광조와 같은 김광필의 제자로 성리학의 대가)은 절을 하면서 ‘사람이 뜻을 세워 나아가는 일은 자기의 사정에 따라 할 일이니 내가 이러라 저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형인 권애는 “자식이 있어서 불효하면 불욕이지만 나라에 불충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이니 나 하나의 체면만 내세워 세속적인 것에 급급하면 어쩌나”하고 충고함에 따라 공은 출사를 결심하였다. 즉 그는 출사의 명분을 효에서 찾았던 것이다.
《충북전설지》
(2) 태종과 권제의 이야기
권제(1387~1445)는 고려 말 우왕 때 태어나 세종27년에 작고한 양촌의 둘째 아들이다. 자는 중의 또는 중안, 호는 지재이다.
공신의 자제로 출사하여 사헌부감찰에 승진하고 1414년(태종 14) 태종의 친시에 장원급제하고 대제학을 거쳐 동지, 추중원사가 되고 우찬성을 지냈다.
총명하고 박학하였으며 고려사를 편수하고 세종조에 용비어천가를 짓는데 참여하였다.
1414년(태종 14) 왕의 친시 때의 일화이다.
태종이 친히 시험을 보며 선비를 뽑을 때 독권관(과거볼 때에 시험 답안지를 읽는 고시관) 하륜이 우등에는 세 사람의 시험지를 들으니 태종이 이르기를 “마땅히 향을 태우고 장원을 뽑던 옛 일에 의할 것이다.”하고 손가는 대로 시험지를 뽑고 보니 권제였다. 태종이 기뻐하여 “내 일찌기 권근의 죽음을 슬퍼하였더니 이제 장원에 그의 아들을 얻고 보니 저으기 위안이 된다.”하고 하륜을 돌아보며 “이 방(榜)은 나의 문생이니 경들은 자기의 문생으로 보지 못할거요.”하였다. 그해서 하륜 등이 신방(新榜)의 인사를 받지 못하였다 한다.《충북전설지》
(3) 세조와 권람의 이야기
권람(1416~1465)은 자는 정경, 호는 소한당, 시호는 익평이며 제의 아들이며 양촌의 손자이다. 문종 때 친시에 급제하고 세조정난 때에 한명회와 같이 공을 세워 일등공신으로 이조참판이 되고 길창부원군에 진봉되었고 우의정의 벼슬까지 지냈다. 출세에 힘써서 사치가 대단했다 한다. 그의 집은 후주당이라 하여 목멱산(현 서울 남산) 북쪽 기슭, 비서감 동쪽바위 벼랑에 있었는데 세조가 그 집에 갔을 때 그 서쪽 벼랑에 돌샘이 있으므로 이름을 어정(御井)이라 하였다.
그 위에 소한당의 유적이 있다. 젊을 때부터 대가집의 자제답게 글 읽기를 좋아하여 책을 지고 명산 고적을 찾아서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반드시 한명회와 더불어 함께 다녔으며 이르는 곳마다 글을 읽으며 문장을 지어서 회포를 풀고 벼슬길에는 마음이 없었다. 하루는 어떤 친구가 과거를 보라고 권하였다. 부질없이 새삼스레 무슨 과거냐고 일축하다가 생각을 고쳐 과거를 보기로 했다. 과거에 응하여 초시부터 시작하여 모조리 세번이나 장원을 했다. 평소의 실력과 닦은 학문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말해주고 있다.
또 공이 어머니를 위해서 잔치를 벌였더니 학발(鶴髮, 학의 털)이 마루위에 덮히고 초헌과 일산이 문을 메워 높은 손님들이 끊을 사이 없었고 당시의 영의정이었던 세조가 잔치에 참가하여 친히 그의 어머니께 헌수했다 한다.《충북전설지》
《이상 출전 : 음성군지 pp1452~1455/1996》
▣ 권근의 묘자리와 수레의산 전설의 샘 ▣
수레의산(679m)은 신비의 산이며 숨어있는 산이다. 상여바위 아래 잘록이에 있는 신비의 샘은 전설의 샘으로 불리고 있다. 실화와 이해하기 어려운 샘에 얽힌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산행 들머리인 생극면 차곡리 서북쪽 방축리 능안 마을(수레의산 줄기)에 양촌 권근과 그의 아들 권제와 손자 권람 3대묘가 있다.
태종 때 양촌이 별세하자 광주에 묘소를 마련했다. 그 뒤 세종이 양촌에게 하사한 방축리 능안으로 양촌의 묘소를 이장하게 되었다.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는 혀재의 자리로 이장할 때 있었던 이야기가 수레의산의 연못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산역이 한창 진행 중인 때 그곳을 지나던 노승이 산세를 둘러보며 살피다가 문득 목마르다며 상좌승을 시켜 물을 얻어오게 했다. 상좌승은 시키는 대로 산역 현장의 상주에게 표주박을 내밀며 "이 샘에 물이 나거든 물을 한 바가지 얻어 마시고자 합니다" 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중이 천대를 받던 시기에 감히 양반댁, 그것도 나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정승(권준 권람)에게 표주박을 내밀고, 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선친의 유골을 모실 묘의 광(구덩이)을 파는 현장이었다. 더군다나 물이 나는 것을 극히 꺼리는 묘소인데도 샘 어쩌고 하며 물을 청했으니 노승은 죽을죄를 지은 것이다.
당장 산역 현장에는 벼락이 떨어질 것 같았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주의 불호령이 내렸다. 노승은 잡혀와 무릎이 꿇리고 심한 매질을 받게 했다. 그러나 노승은 "근처에서 갑자기 목이 말라 인기와 우물은 보이지 않고 이 곳이 물이 날 곳이기에 샘을 파는 줄 알고 물을 청하여 죽을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능청을 떨며 뻗댔다. 이 말을 조롱으로 안 정승은 더욱 화가 났으나 "틀림없이 물이 날 곳이니 조금 더 파보면 어떻겠느냐"는 노승의 말에 혹시나 해서 화를 누르고 구덩이를 더 파보게 했다.
그때 광중에서 물이 난다고 일꾼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상주는 그때에야 노승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노승을 깎듯이 모시고 대책을 물었다. 노승은 10리 저쪽 산의 형국이 생극이니 수레의산은 생태극으로, 그 지기를 받은 묘지는 생지의 산이므로 상여바위 아래에 연못을 파면 여기 묘소의 물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노승은 염불을 하고 나서 하관시간이 되었으니 우선 왕겨를 가져다 물줄기를 막은 뒤 물 수(水) 자를 쓴 부적을 깔고 하관하게 했다. 처음에는 10리나 떨어진 곳이고 또 그곳이 묘소보다 더 높아 이쪽 물이 그곳으로 빨려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으나, 물이 날 것을 알아낸 노승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달리 방책도 없어 노승의 말에 따르기로 하고 사람을 산으로 보내 연못을 파게 했다. 산에 연못을 파자 과연 왕겨와 물 수(水)를 쓴 부적이 나오고 묘소의 물을 잦아들었다.
그 뒤 양촌의 후손들이 3년마다 연못을 손질하고 물꼬를 트고 나면 안동 권씨 문중에 경사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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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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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산행때에 좋은 자료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들를 시간이 있나요? 그리고 상촌두요?
김윤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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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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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점보에서 승용차로 10분 이내거리 입니다. 상촌도 10분이내 거리구요.
김행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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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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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많이 배웁니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