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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순례2(광주군=廣州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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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4-04 15:23 조회1,80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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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군지(광주군지편찬위원회, 1990)





사진으로 경기도 기념물 90호인 허난설헌의 묘소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pp272∼275 2) 병자호란의 경과.



--(전략)



인조 14년 4월 후금의 태종은 칭제하여 국호를 淸(청)으로 바꾸었다. 春信使羅



德憲(춘신사라덕헌) 등이 즉위식에 참여했으나, 毆打(구타)를 당하면서도 끝내



허리를 굽히지 않았으며, 청은 이에 왕자의 인질과 斥和主唱者(척화주창자)의



압송을 요구했으나 이것도 묵살하고 말았다. 조선 내의 主和論者(주화론자)의



동정을 관망하던 청은 주화론이 열세에 몰리자 동년 12월 제2차 침입을 단행하



여 왔다. 이 무렵 明(명)나라는 이자성의 란, 장헌충의 란 등이 일어나 국운이



이미 기운 뒤였으므로 청의 조선 침입을 견제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



--후금이 「君臣의 義(군신의 의)」를 요구해 오면서부터 조선의 排金政策(배



금정책)은 더욱 확고하여 졌고 그에 대비한 서북로의 방어체제 확립은 시급해



졌다. 이에 전술한 바의 남한산성을 비롯한 중앙군영 병력의 확장이 있었고 서



북로의 병력 배치에도 가능한 조치들이 취해 졌다.



정묘호란으로 서북로의 군사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특히 청천강 이북의 지역



은 많은 군사의 손실이 있어서 한때 청북 抛棄論(포기론 ; 원문은 棄가 아닌



兼자임)이 나올 정도였다. 예컨대, 淸北(청북)의 첨단인 의주부의 경우 인조 12



년 현재 本州居民(본주거민)은 200戶(호)에 600口(구) 밖에 되지 않았다. 청북



抛棄論(포기론 ; 원문은 棄가 아닌 兼자임)은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란후



방어선의 초점은 淸南(청남)의 안주에 두어졌다. 안주는 병사의 入守地(입수지)



였다. 同王(동왕) 10년까지의 서북로 병력강화는 주로 안주를 중심으로 행해 졌



으며 11년 1월에 안주 중심의 방어 강화로 청북일대가 거의 放棄狀態(방기상



태)가 되어 버렸음을 바로잡기 위해 林慶業(임경업)을 청북방어사로 삼아 의주



를 중심으로 한 청북 방어력 강화에 힘을 경주했다. 그리하여 병자호란 직전인



동왕 14년 7월에 義州固守軍(의주고수군)은 武科(무과) 청북입격자 1,300여, 청



남입격자 2,600여, 황해도입방군 2,000여, 淸北復 兵(청북복수병) 230여, 남군



1,600여, 도합 7,000여를 확보할 수 있었다. 청북의 인력, 물력은 크게 衰殘(쇠



잔)하여 타도의 赴防軍(부방군)의 지원으로 다소의 군사력 강화는 이루어졌지



만, 결코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서북로의 이와같은 실정 때문에 군사력 강화에 두가지 견해가 엇갈렸다. 하



나는 위에 말한 안주 중심의 병력 집중론이었고, 다른 하나는 평안도 자체의



물력과 인력을 회복할 만한 시간의 여유를 주고 그동안의 방어 중심은 차라리



江都(강도). 남한산성을 주축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전자는 金 (김류). 金時讓



(김시양). 金自點(김자점) 등 都體府(도체부)의 군권을 장악한 파의 견해였고,



후자는 李貴(이귀). 李曙(이서) 등 畿甸(기전) 일대의 중앙군영의 병권을 쥔 파



의 견해였다. 후자는 도체찰사영의 남한산성에로의 移置(이치)를 주장하기까지



했지만, 동왕 11년의 이귀의 병사, 동왕 12년의 이서의 와병 등이 전자의 견해



를 유리하게 했다.



--동왕 7년 11월 오랜동안 도체찰사의 직에서 서북로의 방어를 맡아온 張晩(장



만)이 사망한 뒤 김류가 그 뒤를 이어 도체부의 군권을 쥐었으며, 동왕 9년에



부체찰사 김시양에게 한동안 도체찰사의 직을 물려주고, 동왕 11년에는 자파의



김자점을 도원수로 삼았으며, 동왕 14년 3월 후금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다시 도체찰사가 되었다. 정묘이래 병자호란까지의 군권은 실상 김류 일파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따라서 방비책도 주로 그들의 견해에 치중되었고 그동안



이서에 의해 강화된 남한산성 중심의 방비는 소홀히 된 점이 없지 않았다.



--김류 계열의 방비책은 도원수 김자점의 활약에서 집약된다. 김자점은 안주



중심의 방어력 집중에서 한걸음 나아가 의주 - 안주 - 평양 - 황주 - 평산의



방어선을 견실히 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것은 물론 안주의 방어력을 약화시



키려는 것이 아니라 안주성이 지켜지지 못했을 경우에 대비한 것이었다. 이에



의주는 청북방어사, 안주는 평안병사, 평양은 평양감사, 황주는 도원수, 평산은



도체찰사의 入據地(입거지)로 삼았다. 그런데 김자점은 이들 각 요충지의 방어



를 산성 중심으로 재편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즉, 의주의 백마산성, 평양의 자



모산성, 황주의 정방산성, 평산의 장수산성을 각각 보수하여 주병력을 산성에



배치하였으므로 府內(부내)는 거의 無兵(무병)의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각 산



성간의 연락은 봉수에 의존토록 하였다. 이러한 방어책은 물론 소수의 병력으



로 효과적으로 대적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었지만, 실제 적침에 당하여서는 커



다란 실책으로 나타난다. 즉 청은 조선의 산성 중심의 방어 태세를 미리 알고



선봉 기병은 산성의 조선군을 피하여 도성에로 진격해 들어왔던 것이다. 더우



기 봉수에 의존한 통신은 봉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어서 도원수가



적침을 알지 못하는 사태까지 초래하여 조정에의 보고가 적의 도착 이틀 전에



야 닿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중략)



--청군의 선봉은 16일에 산성에 이르고 청 태종은 15년 정월 1일에 산성하 탄



천에 20만 청군을 결진하였다. 포위 당한 성중의 조선군은 18일에 어영대장 元



斗杓(원두표)가 出城(출성)하여 적 6명을, 19일에 총융사 具宏(구굉)이 20명을,



20일에 어영군이 적 10여명을, 22일에 다시 어영군이 10여를, 그리고 訓局(훈



국)이 30여를 살해하는 적은 성과를 올렸지만 성중의 사정은 참담하였다. 더욱



이 산성 지원에 나선 諸道(제도)의 군사도 충청감사 鄭世規(정세규)의 군이 험



천에서, 경상좌병사 許完(허완), 우병사 민영의 군도 광주 쌍령에서, 전라병사



金俊龍(김준용)은 용인 광교산 勝捷(승첩)에 이어 수원에서, 평안감사 洪命耉



(홍명구)는 금화에서, 부원수 申景원(신경원)은 맹산철옹에서, 도원수 김자점의



군은 토산에서 각 패배 또는 전사하자, 성중은 점차 고립무원이 되어 전의를



상실하여 갔다.





pp368∼369 2. 임경업의 爲國哀情(위국애정).



--병자호란의 피해는 임진왜란에 버금 갈 정도였다. 임진란에 바다의 영웅 이



순신이 있었다면 병자호란 때는 영웅 임경업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의주부윤



이었던 임경업은 북방의 수비군을 증강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건의했지만 인조



반정에 이괄의 난까지 치른 조정은 그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인조 14년 12월 6일 압록강변 일대 봉화대에서 한꺼번에 횃불이 올랐다. 임



경업이 우려했던 대로 청 태종은 예친왕(禮親王), 예친왕(睿親王), 예친왕(豫親



王)등 삼왕(三王)과 마부태(馬夫太), 용골대(龍骨大)등 원수(元帥)들을 앞세워



13만 대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임경업은 도원수(都元帥) 김자점(金自點)에게 파발을 보낸 다음 의주 남쪽



백마산성으로 들어갔다. 성 안에는 노약자까지 합쳐 겨우 8백, 임경업은 성 안



사람을 총동원하여 한 사람이 횃불을 2개씩 들게하고 곳곳에 허수아비를 세워



병정을 가장한 후 연이어 대포를 쏘아댔다. 청태종(淸太宗)은 변경의 수비가 의



외로 강한 것으로 알고 주춤하다가 의주를 피해 남하(南下), 엿새만에 서울에



당도했다.



--인조는 왕자(王子)등 왕족들을 강화도에 먼저 피난시킨 후 뒤따라 강화로 들



어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다가 청나라 장수 마부태가 벌써 홍제원에 이르러 한



강 일대를 차단, 마포 대안 양천평(良川坪)에 진을 치고 강화 통로를 끊어놓아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했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 어영대장 이서, 수



어사 이시백, 어영부사 원두표 등에게 총병력 1만 3천으로 성채를 지키게 하고



각도의 감사(監司), 병사(兵使)들에게는 근왕병(勤王兵)을 급파하도록 했다. 그



러나 16일 아침에 이미 서울을 함락한 청군은 곧 남한산성을 포위, 산성으로



들어가는 근왕병을 차단해 버렸다. 18일엔 원두표가, 20일엔 신경진이 성 밖에



나가 청병 30여명을 베는 등 다소 전과를 올렸으나 대세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



했고 평안감사 홍명구, 경상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 이역현감 김홍익, 남포현



감 이경 등이 달려왔으나 모두 전사했다. 또 도원수 김자점, 강원감사 조정호,



함경감사 민성휘, 의병장 김식회 등도 참패 당했고 다만 전라병사 김준용은 용



인 광교산에서 적장 양고리를 사살하는 등 승첩을 올렸으나 끝내 패하고 말아



남한산성은 계속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pp1332∼1333 12. 허난설헌묘.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90호.



--소 재 지 : 초월면 지월리 산 29-5.



--허난설헌의 묘는 현재의 묘성에서 약 500여m 오른쪽에 있었으나 서울-대전



간 중부고속도로 개설로 인해 1985년 11월 24일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새로 조성된 묘성은 안동김씨 서운관정공파 종중에서 선영의 묘를 모두 이



곳에 이장하였는데 허난설헌의 묘는 이 가운데서 맨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그



리고 묘 앞에는 1985년 11월 24일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에서 건립한 시비가 서



있는데 높이 275m, 폭 108㎝이라 비의 구조는 넓은 화강석 기단 위에 오석으로



된 비문석과 그 위에 자연석 비 갓돌이 얹혀 있다.



--선영과 허난설헌 묘성 둘레에는 이전후 곡장을 설치하였다. 시비중에는 哭子



(곡자) 시가 새겨져 있는데 그 대상이 어려서 죽은 두 자녀의 무덤이 난설헌



묘 우측 전면에 나란히 있고 1978년 3월에 건립된 묘비가 있으며 그 비문은 문



학박사 李崇寧(이숭령)이 지었다.



--허난설헌은 조선 명종 18년(1563년)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의 딸로 출생



하여 선조 22년(1589년)에 27세를 일기로 요절한 조선조의 대표적이며 천재적



인 여류시인이다. 본명은 楚姬(초희)이며 호는 난설헌, 본관은 양주(양천의 오



기)이다



--또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이기도 하다. 강릉에서 태어나서 시인 이



달에게 글을 배웠는데 천재적인 시재를 발휘했으며 천품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용모를 타고나 어렸을 때 여신동이라고 까지 칭송이 자자하였다. 7세 때 지은



廣寒殿白玉樓上樑文(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상촌 신흠 초당사의 작품에 比肩



(비견)한다 하였다. 성장하여 金誠立(김성립)과 결혼하였으나 결혼생활이 원만



하지 못할 閨怨(규원)과 친정이 逆獄(역옥)에 연루되는 겹친 禍厄(화액)에서 오



는 고뇌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로 여성 특유의 감상을 노래하여 애상



적인 시풍의 독특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그의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



라 시인 주지번에게 주게 되자 중국에서 난설헌집이라는 시집이 간행되어 격찬



을 받았으며 1711년경 일본에서도 난설헌시집이 간행되어 애송되었다. 서포 김



만중은 "海東鬪秀중에 오직 난설헌만이 있을 뿐" 이라는 찬사를 글로 남겼으며



서애 유성룡은 난설헌집 발문에서 "사물을 느끼고 회포를 일으키며 시절을 근



심하고 세속을 걱정함은 열사의 풍이 있으며 속된 냄새라고는 풍기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난설헌시비의 제자는 陽堤(양제) 金在峻이(김재준) 썼고 전면에는 哭子詩(곡



자시)의 원문과 譯詩(역시)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은과 같다.





哭子(곡자) : 아들 딸 여의고서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 올 해는 사랑스런 아들을 잃다니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숙숙白楊風(숙숙백양풍) :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鬼大明松楸(귀대명송추) : 도깨비 불무덤에 어리 비치네



紙錢招汝魂(지전초여혼) : 소지 울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玄玄酒○汝丘(현현주○여구) : 무덤에 냉수를 부어 놓으니





pp1356 안동김씨 - 초월면 도평리



--안동김씨의 시조 김숙승(고려 때 공부시랑과 평장사를 역임)은 신라 경순왕



의 손자이며 대안군 김은열의 둘째 아들이다.



--도평리 안동김씨는 숙승의 5대손 綬(수)를 중시조로 하는 서운관정공파로서



秀信(수신 1790년생)이 세거를 시작하였다.



※ 혹 본 광주군지 내용중 사실과 다르거나 제가 미처 확인하지 못하여 누락된



- - 선조분들의 기록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김주회 - 덕분에 문중사와 향토사 공부를 잘 하고 있습니다. 고맙게 잘 읽고 있습니다.

▣ 김정중 - 저두요

▣ 김항용 - 잘 보았습니다. 전국의 군지(향토지)를 이 기회에 검색, 정리해 놓으시면 우리 문중사의 귀한 역사 자료물이 될 것 같습니다.

▣ 김은회 - 중부 고속도로변에 묘역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김영환 -

▣ 김은회 - 김성립 .허난설헌 묘역

▣ 김재원 -

▣ 김태서 - 귀한 자료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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