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빈(明嬪)의 아버지, 휘빈(徽嬪)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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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4-04 18:23 조회1,830회 댓글0건본문
조선 태종의 후비인 明嬪은 안정공파의 파조이신 안정공 金九德선조의 따님이시며
문종의 세자시절 첫번째 세자빈인 휘빈((徽嬪)의 아버지는 金五文 선조이시며
김오문은 안정공 김구덕의 아드님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올립니다.
1. 명빈이 金九德의 따님이라는 자료
조선왕조실록 태종 022 11/11/20(정축) / 김씨를 명빈으로, 노씨를 소혜 궁주로, 김씨를 숙공 궁주로 책봉하다
김씨(金氏)를 봉하여, 명빈(明嬪)을 삼고, 노씨(盧氏)는 소혜 궁주(昭惠宮主)를,
김씨(金氏)는 숙공 궁주(淑恭宮主)를 삼았다.
임금이 김구덕(金九德)에게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여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 등에게
이르기를, “판각(判閣)이나 근시(近侍)의 벼슬은 빈(嬪)의 아비로 시킬 수 없을까?” 하니,
대답하였다. “전례(前例)로는 마땅히 군(君)을 봉하여야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옛적에 한(漢)나라에서 유씨(劉氏)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사정(事情)은 다르나, 군(君)을 봉할 수 없고, 또 후세에 예(例)로 삼으면 불가하다.
” 임금이 말하였다. “천자(天子)가 황후(皇后)에게 제후(諸侯)가 부인(夫人)에게 천지(天地)
일월(日月) 같아서 높고 낮은 것이 등급이 있는데,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남편이 아내에게
굴한다.’ 하였으니, 만일 헌수(獻酬) 기거(起居)를 예(禮)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예조 참의(禮曹參議) 허조(許稠)가 대답하였다. “경적(經籍)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남편은 아내의 벼리[綱]가 되는데, 어떻게 항례(抗禮)할 수가 있겠습니까?”
조선왕조실록 세종 039 10/03/10(임진) / 판돈녕부사 김구덕의 졸기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이 졸(卒)하였다. 구덕은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이니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이다. 나이 19세에 진사(進士)·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補職)되었다. 여러 번 사헌 규정(司憲糾正)으로
천전(遷轉)되어 잡단(雜端)과 형조 의랑(刑曹議郞)을 거쳐 나가서 단양(丹陽)·청풍(淸風)·
한주(韓州)의 세 군의 군수(郡守)가 되었다. 사헌 중승(司憲中丞)으로 전직되어
지사간(知司諫)으로 옮기고, 또 해주(海州)·광주(廣州)·청주(淸州)의 세 주(州)의 목사(牧使)와
연안 부사(延安府使)와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다. 딸이 태종전(太宗殿)으로 뽑혀
들어와 명빈(明嬪)이 되었으므로 동지총제(同知摠制)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승진되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들어와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또 한성윤(漢城尹)으로서
들어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고, 조금 후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졸(卒)하매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안정(安靖)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화합함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성품이 온량(溫良)하여 사람들을
예(禮)로서 대접하고 평소에 사장(詞章)을 좋아하여 시(詩) 읊기를 폐하지 않았다.
아들은 김오문(金五文)이었다.
2. 휘빈이 김구덕의 아들인 김오문의 따님이라는 자료
조선왕조실록 세종 036 09/04/09(정묘) / 김씨를 왕세자의 휘빈으로 봉하다
김씨(金氏)를 왕세자(王世子)의 휘빈(徽嬪)으로 봉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강사포(絳紗袍)를 입고 근정전(勤政殿)에 거둥하여 문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판부사 최윤덕(崔閏德)과 병조 참판 성엄(成)을 보내어 왕세자빈에게 책인(冊印)을 주었다.
판돈녕 김구덕(金九德)이 그 아들 총제(摠制) 김오문(金五文)을 데리고 대궐에 나아와
임금께 사은하였다.
세종 045 11/07/20(갑자) / 폐빈 김씨의 아버지 김오문과 그의 형 김중엄 및 호초의 아버지 이반을 파면하다
전 총제(摠制) 김오문(金五文)과 원주 목사(原州牧使) 이반(李蟠)의 직첩(職牒)을 거두고,
돈녕부 승(敦寧府承) 김중엄(金仲淹)의 관직을 파면시켰다.
감오문(金五文)은 폐빈(廢嬪) 김씨의 아버지이고, 김중엄은 그의 형이며, 호초(胡椒)는
이반(李蟠)의 첩의 딸이었다.
디지털한국에서 자료
김구덕(金九德) ?∼1428(세종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상락군(上洛君) 묘(昴)의 아들이다. 19세에 진사시·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다. 이어서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을 지냈고,
1396년(태조 5) 형조의랑(刑曹議郎)에 올랐다. 이때 형옥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뒤 외직으로 나가 단양·청풍(淸風:현재의 堤川)·
한주(韓州:현재의 韓山) 등 3개 고을의 군수가 되어 선정을 폈고, 정종 때는
사헌부중승(司憲府中丞)이 되어 당시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로서 권력을 부리던 최
운해(崔雲海)를 탄핵, 음죽(陰竹)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어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올랐고,
다시 외직으로 나가 해주·광주·청주목사를 지냈다. 이어서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는데,
그때 그의 딸이 태종전(太宗殿)에 간택되어 명빈(明嬪)이 되자, 벼슬이 올라 우군동지총제
(右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12년(태종 12) 한성부윤을 지내고, 이어서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이듬해 다시 한성부윤을 지내며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윽고 지돈녕부사를 거쳐 판돈녕부사에 이르렀고,
1427년(세종 9)에는 손녀가 세자빈에 간택되었다. 그가 죽자 나라에서는 3일 동안
철조(輟朝)하였고, 조문을 내려 치제하였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여 남과 다투지 않았고
사람을 대함에 예로써 하였다. 문장에 능하였으며, 음악을 좋아하였다.
시호는 안정공(安靖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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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원 -
▣ 김정중 -
▣ 김태서 - 귀한 자료 잘보았습니다.
▣ 김윤만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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