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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2) 죽산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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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0-17 16:04 조회1,53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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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박씨 1세 (박기오 = 朴奇悟) _ (죽산박씨 홈에서 옮김)2000.7월. 2002.2월. 2004.09.30 정리중(

중시조 /고려초 태조조 ^삼한 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정1품 태보 삼중대광太保 三重大匡 ^봉 죽주백竹州伯 ^익,시호 충정공 /고려초

유공자로 양 식읍 죽주.  본래 신라 종성 박씨인대 자 경주에서 고려초에 이거. 죽주 즉, 죽산. 죽산박씨 1세(죽산 박씨 시조)이다.
(박혁거세의 30대 손이며, 신라경명왕이 할아버지이다)


* 죽산박씨 시조 박기오(호:충정)는 신라 경명왕(박씨29세.신라54대왕)의 넷째 아들 죽성대군(죽산대군) 언립의 아들로, 고려초에 공을세워

삼한벽상공신 태보 삼중대광으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이르러 계림군鷄林君에 봉해졌다가 후에 죽주백으로 개봉改封되고

 竹州(죽주-죽산의 옛이름)를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다. 따라서 그의 후손들은 본관을 죽산(竹山)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고려때의 죽주竹州가 세월이 흘러 죽산竹山으로 개칭 되었기 때문에 竹州朴氏 = 竹山朴氏

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다는 말은 죽산박씨의 시조 朴奇悟 는 국가를 위하여 큰 공을 세웠으므로 죽주(죽산)라는 땅을 왕으로부터

하사 받았다는 것이다.
고려때의 죽주는 현재 경기도 용인시 및 안산시를 말하고 있다.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신라왕족(新羅王族)의 후예(後裔)로 경명왕(景明王)의  넷째 왕자(王子)인 죽성대군(竹城大君)

언립(彦立)으로부터 문호(門戶)가 열리게 되었다.
 죽산박씨족보(竹山朴氏族譜)에 의하면 죽성대군 언립(彦立)의 아들 기오(奇悟)가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창업(高麗創業)에

공(功)을 세우고 태조(太祖)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태보(三重大匡太保)에 올라 죽주백(竹州伯)에 봉해지고

식읍(食邑)으로 죽산(竹山)을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죽산을 본관(本貫)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죽주백(竹州伯) 기오(奇悟)의  손자 충숙(忠淑)이 고려 현종(顯宗)때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참지정사(參知政事)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으며, 7세손 정유는  고려 예종과 인종대에  걸쳐 20여년 간 대간(臺諫)으로

 있으면서 왕(王)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우부승선(右副承宣)을 거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겸 태자좌빈객(太子左賓客)에 이르렀다.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육화(育和: 정유의 아들)의 아들로 기사(騎射)에 능했던 인석(仁碩)은 명종(明宗)초에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여  

북원(北原)에 은거(隱居)했다가 선종(宣宗)이 즉위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와 형부 원외랑을 지내고, 초토판관(招討判官)으로

경주(慶州)의 초적(草賊)을 토벌하는 데 공(功)을 세워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전법판서(典法判書) 휘(暉)의 아들 전지(全之)는 외교(外交)와  정치이론에 밝아 원(元)나라에까지 명성을 떨치고 충선왕(忠宣王)이

복위(復位)하자 연흥군(延興君)에  봉해진 후 1321년(충숙왕 8)때  공신(功臣)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왕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한편 정당문학으로 죽산군(竹山君)에 봉해진 문보(文珤)의  증손(曾孫) 원형(元亨)은 세종(世宗)과 세조(世祖)때의 명신(名臣)으로

벼슬이 영의정에까지 이르렀으며, 사체(事體)에  명달하고 전고(典故)에 밝아 외교(外交)의 일인자로 손꼽혔다.
 일찍이 중국(中國) 사신(使臣) 장영(張寧)이 그의 인품을 평하기를 "그대와  같은 재주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  났더라도 숙향(叔向)과

자언(子彦)의 밑에는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극찬했다.
특히 그는 영상(領相)에까지  올랐으면서도 일평생을 청렴하고 검소하게 생활함으로써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임금에게 바른말을

잘해 세종은 그를 가리켜 급암(汲 : 직언을 잘한 한나라의 충신)이라 불렀다.
 그의 아들 안성(安性)이 벼슬이 높아지기도 전에 그의 생일에 술상을 차려 올리니 그는 받아 마시며 아들을  앞에 앉혀놓고 아래와 같은

계명시(戒命詩)를 내렸다.


 <오늘밤 등불 앞에 두어 순배 술을 드니/ 너의 나이 헤어보매 서른 둘 청춘이라/ 우리집 가보로는 청백 그뿐이니/ 이걸 잘 지녀서 무한히  전해내려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안성(安性)의 후대에서는 광해군(光海君) 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낸 홍구(弘耉)가 유명했다.
 그는 도정(都正)을 지낸 난영(蘭榮)의 아들로 선조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과 정언(正言)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는

전라도어사(全羅道御史)가 되어 군량미 조달에 수완을 보였으며, 1601년(선조 34)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진하부사(進賀副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광해군의 혼탁한 정국에서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삭직되었으며, 이  괄(李  适)의 난 때

광해군의 복위를 도모했다는 조카 윤장(允章)의 사건에 연루되어 심문을 받던 중 자결했으나 숙종(肅宗)때 신원(伸寃)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인조(仁祖)때 무과에 급제하여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권지중군(權知中軍)으로 용만(龍灣)전투에서 순절한

신룡(信龍)과 정유재란(丁酉再亂)에 공을 세워 정난이등공신 (靖難二等攻臣)에 책록되고,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진 명현(名賢: 원형의

후손)이 유명했으며, 광해군 때 무과에  급제한 명룡(命龍)의 형인 성룡(成龍)이 용만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는 정묘호란 때  안주(安州)

방어전에서 단신으로 화살을 쌓아놓고 적 수백명을 섬멸했으며 손가락을 다쳐 활을 쏘지 못하게 되자 혼자 칼을 들고 적진에 뛰어들어

용전하다가 전사하여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고 안주 충민사(忠愍祠)에 제향되었다.
 일문(一門)에서  충(忠)·효(孝)·열(烈)을 배출한  계성(繼成)은 임진왜란 때 권  율(權  慄)의 막하에서 행주대첩(幸州大捷)에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에는 구례(求禮) 전투에서 순절하자 그의 부인도 뒤를 따라 자결했으며,  아우 승성(承成)과 사촌동생 언정(彦貞)도 싸움터에서

순절하여 이름을 떨쳤다.
 재흥(載興)의 아들 종유(宗儒)는 영조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경전(經傳)과  

백가(百家)에 통달했고,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했으며, 고종(高宗)때 항일운동(抗日運動)을 주도했던 주현(周鉉)은  

가산(家産)을 풀어 군자금을 제공했다가 일경(日警)에게 체포되어  심한 고문 끝에 순절하여, 평북(平北) 선천(宣川)에서 항일운동에

공헌했던 치조(治祚)·치의(治毅)·건채(健采)  등과 함께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이어온 죽산 박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부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남한(南韓)에 총 10,864 가구, 45,05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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