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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군지순례3(여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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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만 작성일02-04-05 09:34 조회1,83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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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군지(여주군지편찬위원회, 1989)



pp1336∼1338 40. 六友堂(육우당)



--옛 문헌에 천령현에 있다고 기록이 있을 뿐 현재 그 원래 위치는 알기 어렵다.



이 당은 고려 공민왕 때의 학자  若齋 金九容(척약재 김구용, 안동인 : 1338∼



1384)이 고려와 명나라의 국교가 난관에 부딪히자 行禮使(행례사)으로 명나라에



들어가다가 요동에서 체포 남경으로 압송되어 明帝(명제)의 명령으로 大里(대리)



로 귀양간 뒤에 천령(여주)에 와서 육우당을 짓고 은거하다가 병으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색이 記文(기문)을 짓고 鄭樞(정추 ; 호는 圓翁, 우왕의 師傅)가



賦(부)를 지었다.



(문온공 척약재 구용께서는 "홍무17년 우왕10년 1384년 1월15일 행례사로 명나라



에 갔다가 헌마지완(獻馬遲緩) 사유로 명제(明帝)에 의해 대리위(현 윈난성 따리)



로 유배가시던 도중 쓰촨성 루저우 영령현 강문참에서 순국하셨습니다. 루저우의



한자말은 노주( +盧州)로 종종 여주(濾州)로 잘 못 읽혀지고 기록되기도 합니다.



본 여주군지의 육우당은 척약재께서 1375년(우왕 1년) 이숭인. 정도전. 권근 등과



함께 북원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언사로 죽주(안성)에 유배되셨다가 얼마뒤



여흥(여주)으로 옮기셨는데 그 때 벼슬에서 벗어나 7년여 은유자적하셨을 때 본



육우당을 지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위의 여주군지 기록은 오기로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永嘉(영가) 金敬之(김경지)가 그 당을 이름하여 四友(4우)라 하였으니 대체로



康節先生(강절선생) 邵雍(등옹 ; 송대의 철학자) 雪月風花(설월풍화)를 취한 것이



다. 나에게 그 뜻을 설명하기 청하나, 그것을 배우기 원하지 아니하고, 또 겨를이



없어 응하지 못함이 오래되었다. 그가 驪興(여흥)에 있으면서 글을 보내어 말하기



를 〈지금 우리 외가에 있는데 강산의 아름다움이 나를 조석으로 위로하는 것이



홀로 雪月風花만이 아닌 까닭으로 여기에 강산을 더하여 六友(육우)라 하였으니,



선생은 가르침을 주시요〉하였다. 내 말하기를 〈내가 쇠하여 병든지 오래였다.



위로 천시가 이변하여도 내 모르고, 아래로 지리가 허물어져도 내 모를 뿐이다.



康節의 학문은 수리에 깊은 것인데, 이제 비록 강, 산 두자로써 그 위에 더 써서



강절과 같지 아니함을 보인다. 그러나 易(역)의 六龍(육룡). 六廬(육려)는 강절의



학문이 나은 것이니, 이 六(육)을 또한 강절에게 돌릴 뿐이다. 비록 그러나 이미



「강절의 학」을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어찌 말이 없



겠는가 말하자면 산은 우리 仁者(인자)가 즐기는 것이니 산을 보고 새 仁을 가지



고, 물은 우리 智者(지자)가 즐기는 것으로 강을 보면 智가 있는 것이다. 눈이 겨



울의 따뜻함을 누르는 것은 나의 기운을 가운데 보전시키고 달이 밤에 밝은 빛을



내는 것은, 나의 몸이 편안함을 보존함이다. 바람은 팔방이 있어 각각 철따라 나



의 망녕되게 움직임이 없는 것이요, 꽃은 사시가 있어 각각 類(류)로서 모이니,



내가 차례를 잃음이 없는 것이다. 또 더욱 경지씨는 마음이 깨끗하여 한 점의 티



끌도 없이 또 사는 곳이 산이 밝고 물이 푸르르니 밝은 거울과 비단 병풍이라 일



러도 욕됨이 없을 것이다. 눈은 孤舟 笠(고주사립)에서 더욱 아름답고, 달은 높



은 다락 술자리에서 더욱 아름답고, 바람은 낚시줄이(釣絲) 있어서 그 맑은 것이



더욱 맑고 꽃은 書榻(서탑)에서 그 그윽함이 더욱 그윽하여 지는 것으로, 네 철의



좋은 경개가 각각 그 극치를 다하여 강산의 사이에 經緯(가로.세로)하였다. 경지



는 어머니를 모시는 여가에 강에 배타고 짚신신고 산에 올라 洛花(낙화)를 세고,



청풍에 서서 눈을 밟고 중은 찾고, 달을 대하여 손을 부르니 사시의 즐거움이 또



한 그 극치를 다함이오니, 경지씨는 일세에 獨步(독보)하는 분이다. 同志(동지)를



벗함에 있어서도 위로 옛사람을 벗으로 하니, 옛사람을 하나 둘로 헤일 수 없는



것이요, 벗을 현금에 구하면 우리 같은 이로 어찌 적다하겠는가. 그러나 경지씨의



취한 것이 이와 같으니, 경지씨는 일세에 독보하는 분이다. 비록 그러나 천지는



부모요, 物(물)은 나의 한편이니, 어디에 가서 벗하지 못하겠소. 더욱 大蓋(대개)



의 산과 習坎(습감)의 물은 강습하여 많이 아는 것이랴, 참으로 나의 유익한 벗이



다.〉하고 육우당기에 짓는다.



--鄭樞(정추)의 賦(부)에 「저 여강지역을 바라보니 새로운 堂(당)이 있어 장려하



구나 아, 탁월한 높은 사람이여, 여기에 아름다운 손을 모았구나 그 벗함은 오직



여섯인데 보통 사람이 친할만한 것이 아니네. 만인이 더블어 평소에 그들과 알음



이여, 흉금이 속세의 티끌을 끓었네 아, 아름답구나. 저 양양하게 먼 흐름이여, 흐



름이 근원이 있어 쉬지 않누나 저 높고 아래가 두터움이여, 높으나 위태롭지 아



니하여 편안한 집일세 저 꽃다운 꽃봉우리의 찬란함이여, 속에 아름다움을 품었



다가 때가 되면 피는구나 저 달이 고움이여, 골고루 멀리 비치는구나 ○○가 맑



은 바람을 명하고, 騰六(등육)은 곧 나쁜 것을 가리어 숨겨 주누나. 서.동과 남.북



이 모두 그 어진 덕을 자랑하고 빛내누나 손과 주인의 서로 접함이여, 어찌 웃음



소리도 하하 하는고, 말을 주고 받는 談鋒(담봉)이 우뢰같음이여, 혹 낮을 다하고



저녁에 늦도록 하는구나. 만일 그 거처를 말하자면 太極(태극)을 집으로 하였고,



그 족속을 상고하면 六幕(육막 ; 천지 사방을 말한다)에 두루했네 천지가 이미 개



벽됨으로부터 형상이 나타나 법도대로로다. 세속에는 어두워서 늘 함께 하면서도



알지 못하는구나 아, 나의 혼미함이여, 저 장님과 무엇이 다르랴. 아름답다. 上洛



(상락)의 元孫(원손)이여, 일찍이 주역에 연구가가 있었도다 良朋(양붕)을 알아서



굳게 맺음이여, 진심으로 얻었음이로다. 이에 六一老人(육일노인)이 있어서 그 행



함이 빨라 자취 없구나 이미 八區(8구)를 두루 보고는 고향에 들려서 수일동안



묵었구나 드디어 당에 올라 손에게 읍하고, 주인을 불러 말하기를 〈어질구나 그



대가 여섯을 벗함이여 진실로 초월하게 세속에 벗어 났구나 그러나 그 득실에 어



찌 말이 없겠는가 바야흐로 그 기둥에 의지하니 물결이 밝고, 발을 걷으니 산이



푸르구나 봄동산에 흩어진 것은 紅錄(홍록)이요, 가을 하늘에 걸린 것은 희고 깨



끗한 달일세 바야흐로 무더울 때는 맑게 물결이 부딪히네 겨울의 따뜻함을 누름



이여, 흰 것을 뿌리누나. 이때에 혹 술에 대하여 箏(쟁)을 타고, 혹 난간에 기대여



피리소리를 듣누나. 정신이 화열하고 뜻이 맞으니 이 즐거움이 어찌 다하랴 물에



가까이 함을 즐기면 옷이 젖고, 자주 위험한 산을 타면 나막신이 꺾어진다. 색을



너무 사랑하면 천성을 치는 「伐 」것이오, 밝음을 구경하는 것이 심하면 눈을



상하고, 시원한 것을 먹기를 좋아하면 병이나고, 찬 것을 항상 범하면 凍傷(동상)



을 입는다. 내 일찍이 공자의 말씀을 들으니 친구도 충고를 자주하면 소원해 진



다 한다. 그 咸卦(함괘) 憧憧(동동)함이여 성인이 아름답게 여기는 바 아니네, 일



반사람의 정이 서로 좋아 함이여 헤아릴수 없구나 처음 사귀매 아교같이 붙었다



가 문득 노하여 눈을 흘기네, 이제 그 원인을 찾아보니, 物(물)과 내개 적이 된



까닭이네 비록 여섯 벗이 맑다하나 적이되니 일반이라 덕을 한결같이 한 대안이



있음이여, 천지를 초월하여 독립했구나 그 등을 등지니 그 몸을 보지 못하거든,



하물며 와서 흔드는 것을 볼 수 있음에랴. 어찌 그대의 여섯 벗을 버리고 대인을



따라서 배우지 않는가 하니, 주인이 이에 들판을 돌아보고, 빙그레 웃고 말하기



를, 그대의 하는 말은 내 들은 것과 다르네 저 方(방)과 物(물)이 類(류)로 모이



고, 무리로 나뉘어져서 법칙없음이 없는 것일세 대체로 대인의 학문은 반드시 비



고 고요한데, 저 벗의 좋고 좋지 아니함은 내 자신으로부터 損益(손익)할 것이네



그 物(물)이 없는 미묘한 진리에 돌아가 숨는 것보다, 차라리 손과 더불어 즐김이



나올 것 일세〉하고, 이어 노래하기를 〈달이 비침이여, 산 언덕이로다, 바람이



슬슬 불어 옴이여, 강이 스스로 물결치누나 꽃은 말을 아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눈물(雪水)은 차를 끓일 수 있네 이에 서로 크게 웃으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



인지 알 수 없네〉라 하기도 했다.



(한문 원본 생략)





pp1395 8. 貞翼公 李浣 神道碑(정익공 이완 신도비)



(전략)



p1397



--병자년에 자점이 元帥(원수)로서 정벙산성에 주둔했을 때에 별장이 되었다.



이해 11월에 수안군수로 임명되니 수안은 정방과 가깝기 때문이었다. 12월에 오



랑캐가 침범하니 정방중군을 차승하였다. 공은 식구를 거느리고 대부인을 뫼시고



산골짜기로 피난을 시키고 밤을 무릅쓰고 정방으로 향하였다. 한 관리가 꾀를 써



서 같이 가는 일에 빠지려하자 곧 그를 죽였다. 길에서 장교가 가족을 거느리고



산간으로 들어가는 것을 만나 역시 그를 참하고 나무를 깎아 글을 쓰기를 「몸이



장수되어 난리를 만나 도피한 자」라고 썼다. 정방에 이르러 공이 말하되 「오랑



캐의 기병은 수효가 많고 또 날래니 대적하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요해처에 복



병을 숨겨 두었다가 그 기세를 꺽어야 할 것이요,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모



든 장수를 칙명하여 각 도로 분산하여 근왕병을 모아 府中(부중)에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일전을 결정해야 할 것이고 불리하면 죽는 것이 옳습니다.」고 했다. 자



점이 결정하지 못하거늘 공이 수효가 얼마되지 않는 오랑캐의 기병이 성 아래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점에게 이르기를 「이는 염탐하는 기병이니 생각건대 대



진이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일거에 砲石(포석)을 발하여 오랑캐를 섬멸하겠노라.」



자청하였다. 자점이 그 말을 따랐다. 과연 적 삼.사백기가 먼저 이르니 자점이



성 아래로부터 북을 치고 군대를 지휘하거늘 공이 사람을 시켜 보고하되 「이는



선봉입니다. 반드시 대진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 결전을 하면 비록 섬멸할 수



있으나 이는 적은 것을 얻을 뿐 큰 것을 잃게 됩니다」라고 주청하였으나 자점



은 듣지 않았다. 공은 오히려 군사를 위로하여 「동요치 말라」하고 이르되 「큰



일의 성패가 이번 거사에 달려 있으니 죽어도 감히 자점의 말을 따르지 않으리



라」자점이 더욱 성내어 임금께서 내려 주신 상방검을 휘하에 주어 이르되



「李某(이모)의 부하를 모두 참하라」고 보냈다. 공은 분하여 꾸짖되 「대사를



그르쳤도다」하고 마침내 앞에 나아가 적을 유도하니 적이 우리의 단약함을 보고



추격하니 공은 한편 싸우고 또 도망을 쳤다. 騎將(기장) 金應海(옮기는이 주 :



김응하장군의 아우)가 적에게 위협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공이 활을 쏘아



백마를 타고 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사람을 죽이니 응해가 죽음을 면하였다.



마침내 적을 유인하여 산골짜기에 까지 들어와 일거에 포석을 발하여 크게 적을



무찔렀다. 공이 군사를 거두어 성안으로 돌아오니 성안은 모두 개가를 올리며 서



로 축하하였다. 그러나 공만은 유독 그 기회를 잃어버림에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다음날 대진은 온 들을 뒤덮고 진격해 오니 그 기치가 모두 누런색이었다. 공



이 이르되 「이것이 배한의 군대입니다」 자점이 또 복병을 설치하여 기회를 기



다리려 하거늘 공이 아뢰어 「어제 패잔병이 반드시 돌아가 일을 보고하였을 것



이니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니 마침내 공의 말과 같았다.



(후략)





pp1746 仁祖反正(인조반정)의 성공



--그러나 인조반정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다른 두가지의 직접적인 원인이 있었



다. 그 하나는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로 「殺弟 母



(살제폐모)」의 패륜을 범한 것이고, 또 하나는 척족이나 대북 일파에 偏惑(편혹)



하여 다른 당파 및 백성들을 너무 학대한 것이다. 이에 尹善道(윤선도). 李 (이



회), 龜川君(귀천군)  (수), 錦川君(금천군) 誠(성) 등이 자주 상소로서 잘못 들을



지적했으나, 보람도 없이 竄逐(찬축)되었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 가장 심하게 박



해받은 것은 서인들로서 광해군 말기 즉 1620년대에 들었을 때에는 조정에서 서



인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서인 가운데서는 1620년대 초부터



역모의 혐의가 있었던 사람은 함흥판관을 지낸 李貴(이귀)와 儒生(유생) 金自點



(김자점)이다. 이 두사람은 다같이 栗谷(율곡 이이)과 牛溪(우계 성혼)의 문하에



서 수학한 사람들이요. 이귀의 딸이 김자점의 아우 김자겸의 부인이었으니까



사돈지간이기도 했다. 먼저 양사에서 이귀. 김자점 두사람이 큰일을 꾸민다고 들



고 일어나자 김자점은 재빨리 이귀의 딸인 弟嫂(제수)를 궁중에 들여보내 광해군



이 가장 총애하는 상궁 김씨를 뇌물로 포섭하였다. 그리하여 정언 韓惟翔(한유상)



이 후원에서 광해군에게 「이귀. 김자점 등이 오래 전부터 딴 생각을 품고 서궁



과 내통하며 큰일을 꾸미려 합니다. 장차 무슨 화근이 될지 알 수 없으니 미리



단속하도록 해야 합니다」하니 광해군의 곁에 있던 김상궁이 「김자점이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이 여자의 말만 옳다고 생각되고



또 女色(여색)외에 딴 것은 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뒤에 다시 조사해 보라」하



고 말았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이귀. 김자점 등이 당시에는 김상궁



과 내통하여 광해군에게 잘 보이려고 한 것 뿐만 아니라, 타도해야 할 대상을 이



이첨 등의 대북으로 잡고 있었던 듯하다는 사실이다. 그 무렵의 당쟁의 경향으로



봐서 어떤 당파이건 타도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대부분 반대당이지 왕은 아니었



던 때문이다. 얼마 후 이귀. 김자점 등의 음모설이 또 누설되어 대사헌 南瑾(남



근)과 대사간 兪大建(유대건) 등이 왕에게 그 두사람을 잡아들이기를 주청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때에도 김상궁의 말에 넘어가서 머리를 내저었다. 이때에 이



귀는 평산부사로서 김자점외에 曉星嶺別將 申景 (효성령별장 신경진)과도 모의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평산일대에 虎患(호환)이 심하여 파발길이 끊어지다시피



했다. 이귀는 함정. 기계 등을 이용해서 큰 호랑이를 잡아 바치며 「호랑이들이



황해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제멋대로 왕래하고 있으니 평산. 장단. 송도 등지에서



힘을 합쳐 호랑이를 잡게 해 주시요」하여 왕의 승낙을 얻었다. 이에 이귀의 군



사는 평산뿐 아니라 장단. 송도 일대를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게 되고, 이귀 등은



장단부사 李曙(이서)와도 모의 하였다.



--이 때에 와서 음모의 범위가 확대되어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다른 왕을 추대하



기로 하여 당시에 인망이 높던 金 (김류 전부사)를 거사의 총책임자로 내세우기



로 계획되었다.





--그러자 양사에서 다시 들고 일어나므로 광해군은 그들의 말을 들어 이귀를 파



직시켰다. 뒤이어 조정에서 이귀를 잡아가려 한다는 말이 전해졌다. 이에 당황한



이귀는 그의 동지들과 신속히 연락을 취하여 거사 날짜를 정하고, 선조의 후궁



인빈이 낳은 定遠君(정원군)의 아들 綾陽君(능양군) 倧(종)을 옹립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곧 문신 崔鳴吉(최명길). 張維(장유). 沈器遠(심기원) 등도 가담하였



다. 이 때에도 李而 (이이반)에 의해 비밀이 누설되어 광해군은 도승지 이덕형.



병조판서 權縉(권진) 등을 불러 숙위하고, 도감대장 李興立(이흥립)에게 궁궐을



수비하게 하였으며, 서울의 각 문에도 군사들을 배치하였다. 그러나 궁궐의 수비



를 맡은 도감대장 이흥립이 그와 사돈간인 장유의 설득에 의해 이귀 등을 도와



주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광해군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1623년(광해



군 15년) 3월 12일 장단으로부터는 이서의 군사, 伊川(이천)에서는 이중노의 군사



가 모여들어 홍제원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능양군의 親



率(친솔) 아래 창의문을 향해 진군하였다. 대궐은 이미 포섭되어 있던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을 얻어 무난히 점령되었고 그 길로 왕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



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곧 인조이다. 이 때의 정황을 상세히 살펴보면 내응



한 이흥립의 군졸들은 궁문을 열고 김상궁은 김자점이 보낸 酒饌(주찬)으로 연



회를 베풀었다. 취흥이 도도하던 광해군은 반란군이 이미 궁중에 침입하였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 북문으로 빠져 달아나 의관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체포되



어 서인으로 강등 당하고 강화로 귀양가게 되었다. 이 날 즉위한 인조는 대북파



의 李爾瞻(이이첨). 鄭仁弘(정인홍). 李偉卿(이위경) 등 수십명을 참형에 처하고



200여명을 귀양보냈다. 한편 이 반정에 공을 세워 집권한 서인 이귀. 김류 등 33



명은 3등으로 나누어 靖社功臣의 勳號(훈호)를 받고 각기 등위에 따라 벼슬을 얻



었다. 그러나 이 공훈이 공평치 못하여 후일 서인 사이에 반목을 일으켜 1년 후



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는 요인이 되었다.



--3월14일 아침 능양군은 이귀 등에게 옹위되어 돈화문 안으로 들어서서 백관의



하례를 받았는데 도승지 이덕형 만은 좀체로 능양군에게 하례하지 않을 기세이다



가 이귀 등이 김대비의 명령으로 반정했다고 말하자 그제서야 하례하며 「옛 임



금을 죽이는 일은 말라」고 한마디 했다 한다. 또한 인조의 즉위와 더불어 그때



까지 영의정이었던 밀양부원군 朴承宗(박승종)은 전날 이이첨과 달리 대비의 폐



위나 栽害(재해) 등에 적극 반대한 보람도 없이 아들 自興(자흥 경기감사)과 함께



과천 三幕寺(삼막사)로 피해 내려가 자살하였다.



--한편 왕이나 김대비 및 이귀 등은 광해군을 처형하고 싶어 했으나 이덕형 등이



만류하므로 광해군, 왕비 유씨, 폐세자와 그의 부인 박씨 등은 먼저 강화로 추방



하였다. 그 뒤 얼마안가 폐세자는 탈주에 실패하여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광해군



은 泰安(태안). 喬桐(교동). 濟州(제주) 등지로 轉謫(전적)되다가 1614년(인조 19



년)에 세상을 떠났다.





※ 혹 본 여주군지 내용중 사실과 다르거나 제가 미처 확인하지 못하여 누락된



- - 선조분들의 기록이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김재원 -

▣ 김정중 - 윤만 대부님 !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

▣ 김영윤 - 어려운 시군지 전국 순례를 너무도 재미있게 하고 계십니다.

▣ 김태서 - 귀한 자료 잘보았습니다

▣ 김항용 - 잘 보았습니다.

▣ 김영환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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