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02(2-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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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0-21 17:59 조회1,462회 댓글0건본문
(2세) 1342년 충혜왕복위3
○조부 김영후(51세), 심양왕 고(瀋陽王暠)의 모반에 참가하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의 호를 받고,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되었다.
<시대상황>
1342년에는 식화(殖貨)에 힘써 의성창(義城倉)·덕천창(德泉倉)·보흥창(寶興倉)의 포 4만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전포를 열게 하였다.
○정도전(鄭道傳) 태어남
*정도전(鄭道傳) : 1342(충혜왕 복위 3)∼1398(태조 7).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학자.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봉화호장 공미(公美)의 고손자로, 형부상서 운경(云敬)의 맏아들이다. 선향(先鄕)은 경상북도 영주이며, 출생지는 충청도 단양 삼봉(三峰)이다.
아버지와 이곡(李穀)의 교우관계가 인연이 되어, 이곡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박의중(朴宜中) ·이숭인(李崇仁) ·이존오(李存吾) ·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 ·윤소종(尹紹宗) 등과 교유하였는데, 문장이 왕양혼후(汪洋渾厚)하여 동료사우의 추양(推讓)을 받았다.
(3세) 1343년 충혜왕복위4
○조부 김영후(52세), 봄 2월 갑진일에 왕이 용사(勇士)들을 거느리고 씨름을 구경하다가 밤에 좌우사 낭중 김영후와 같이 북궁(北宮)에서 술을 마시었는데 김영후가 취하여 누우니 왕이 곁에 있던 사람들을 시켜 그를 부축하여 말 위에 올려 앉히고 마부를 불러 이르기를 “네 주인 낭중이 자기 타던 말을 나에게 선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튿날 김영후가 이내 그 말을 왕에게 바쳤다.<고려사> 1343년(충혜왕4)에 征東省郞으로 있었다. <안축의 근재집중 상주객관중영기>
11월 원나라의 자정원사(資政院使) 고용보(高龍普) 등이 충혜왕을 잡아갈 때 시종한 백관들이 모두 도망갔으나 홀로 김영후만은 왕을 호위하고 있으면서 1장 8척의 창을 맞았다.<고려사>
<시대상황>
1343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
○정운경(鄭云敬), 1343년(충혜왕 복위 4) 밀성군지사(密城郡知事)가 되었다. 당시 재상 조영휘(趙永暉)가 밀성인에게 대여하였던 포(布)의 징수를 종용하였으나 이를 묵살하였다.
(4세) 1344년 충혜왕복위5 충목왕원년
○조부 김영후(53세) 1344년 10월 충목왕이 즉위하자 찬성사가 되었다.
<시대상황>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 사용하였고,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이에 원나라에 가 있던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그곳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림으로써 원나라에 끌려가서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다가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다. 시호는 헌효(獻孝)이고, 원나라의 시호는 충혜이며,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
○충목왕(忠穆王) 즉위
1337(충숙왕 6)∼1348(충목왕 4)
고려 제29대왕
재위 1344∼1348
본관은 개성(開城)
○이제현(李齊賢),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은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하여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하여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정운경(鄭云敬), 다음해 복주목의 판관에 전임되어서도 정실에 기울지 않으며 송사(訟事)를 잘 처리하였다. 삼사판관을 거쳐 서운부정(書雲副正)이 되어
○안진(安震), 1344년(충목왕 즉위년)밀직부사로서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안산군(安山君)으로 봉해졌으며,
*안진(安震) : ?∼1360(공민왕 9). 고려 말의 문신. 본관은 순흥(順興). 호는 상헌(常軒).
(5세) 1345년 충목왕1
○조부 김영후(54세), 정월 정방이 부활하였을 때 찬성사로서 제조관(提調官)이 되었다. 12월에는 좌정승으로 원나라에 가서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우정승에 승진되었다.
<시대상황>
(6세) 1346년 충목왕2
○조부 김영후(55세), 5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큰 조부 김영돈(62세), 찬성사(贊成事)로 원나라에 가서 의복·음식 등을 보내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김영돈 묘지명>
병술년(충목왕 2, 1346)에 첨의찬성사 우문관대제학 전춘추관사(僉議贊成事 右文館大提學 典春秋館事)가 되고, □월에 원의 서울로 갔다. 천자가 불러 □ 불(不)□□무(無)하니, 황제가 그 충직함을 가상하게 여겨 □백(百)□를 맡아 □□지(旨)를 정리하였다. 공이 고려로 돌아와 □□□□ 임금에게 아뢰니, □□□정리도감(整理都監)에 억울하거나 잘못된 일을 호소하는 사람이 하루에도 무려 천여 명이나 되었다.
□□□ 공은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 이에 관원을 가려서 그들과 더불어 끝까지 파고들어 사람들의 원통함을 씻어주고 시비를 가렸으며, 속이거나 잘못된 일을 바로 잡으니, 권세를 가진 자들의 원망과 비방이 모두 공의 몸으로 쏠리게 되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어주(御酒)와 어의(御衣)를 내리니 원로[耆老]들이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탄식하였다.
<시대상황>
1346년에는 이제현 등으로 하여금 앞서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하게 하고, 또 충렬·충선·충숙 세 왕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다.
○이곡(李穀), 이제현(李齊賢)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 編年綱目》을 증수하고 충렬·충선·충숙 3조(三朝)의 실록을 편수하였으며,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정으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았다.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으나,
*이곡(李穀) : 1298(충렬왕 24)∼1351(충정왕 3). 고려 말엽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한산출생. 한산이씨 시조인 윤경(允卿)의 6대손으로, 찬성사 자성(自成)의 아들이며, 색(穡)의 아버지이다.
○정운경(鄭云敬), 1346년 하정사(賀正使)의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그뒤 성균사예·보문각지제교(寶文閣知製敎)를 지내고,
○안진(安震), 1346년에는 이제현(李齊賢) 등과 더불어 충렬·충선·충숙 3조(朝)의 실록을 찬수하였다.
○조준(趙浚) 태어남
*조준(趙浚) : 1346(충목왕 2)∼1405(태종 5).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吘齋) 또는 송당(松堂).
문하시중 인규(仁規)의 증손으로, 판도판서 덕유(德裕)의 아들이다. 아들 대림(大臨)이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함으로써 태종과는 사돈이 된다.
원래 평양조씨는 이름없는 집안이었으나, 인규의 대에 이르러 몽고어를 잘하여 역관(譯官)으로서 출세, 충선왕의 국구(國舅)가 되면서 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는 6형제 중의 5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제가 아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항상 개탄하였으므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였다.
(7세) 1347년 충목왕3
○큰 조부 김영돈(63세), 왕후(王煦)와 함께 귀국하여 원나라에서 왕의 실덕을 묻자 소인들의 장난이라 변명하니 이를 정리하라는 원나라의 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정치도감을 설치하고 판사가 되어 폐정을 시정하던 도중, 불법행위를 하던 기삼만(奇三萬)을 순군옥(巡軍獄)에 가두어 죽게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일로 원나라로부터는 치하를 받았으나,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의 심한 반발에 부닥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의 지지로 곧 석방되었다.
이미 여러 사람의 노여움으로 □ 어렵게 되자 공은 □ 배척당하게 되어, 7월에 벽상삼한 삼중대광 상락부원군(壁上三韓 三重大匡 上洛府院君)이 되고 공신의 호칭은 전과 같았으나, 마침내 종적을 감추고 두문불출하면서 다시는 정리(整理 : 整理都監)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 억울함을 풀지 못한 자들도 □ 임금이 공을 기용함으로써 우리의 가슴을 씻어 주었다.
공은 일찍이 덕수현(德水縣) 동쪽의 강과 산이 아름다운 곳에 별장[野莊]을 지었는데, 매 번 문득 가면 열흘이나 한 달을 머무르니 마치 장차 세상을 버린 것 같았다. 청탁을 □(가려내고?)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도우니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았다.
<시대상황>
1347년에는 정치도감(整治都監)을 두고 계림군공(鷄林郡公) 왕후(王煦), 좌정승 김영돈(金永旽) 등 33명을 속관(屬官)으로 삼아 여러 도의 토지를 측량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의 토지를 빼앗고 불법을 자행한 기황후의 친척인 기삼만(奇三萬)의 옥사를 계기로 원나라의 간섭을 받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이숭인(李崇仁) 태어남
*이숭인(李崇仁) : 1347(충목왕 3)∼1392(태조 1). 고려 말기의 학자이며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 자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陶隱). 본관은 성주(星州).
(8세) 1348년 충목왕4
○큰 조부 김영돈, 무자년(충목왕 4, 1348) 7월 무신일(13일)에 병이 들어 64세로 몰하였다. 빈소를 성 안의 공의 집으로 옮겼는데 조정의 사대부들이 모두 슬퍼하고 서로 조문하였다. 8월 병술일에 덕수현 앙동산(德水縣 仰洞山)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추증하여 문숙(文肅)이라고 하였다. 안진이 묘지명을 썼다.
*증조부 김순은 1321년 집에서 별세하여 장자 김영돈 등이 덕수현 마산(德水縣 馬山)에 장례를 지냈고, 1942년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임계면(臨溪面) 가정리(佳井里) 마산(馬山) 동쪽 기슭에서 묘지명이 발견되었다.
<시대상황>
1348년에는 진휼도감(賑恤都監)을 두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시호는 현효(顯孝), 원나라의 시호는 충목(忠穆)이며, 능은 명릉(明陵:開城 소재)이다.
○이제현(李齊賢),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뒷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정운경(鄭云敬), 1348년(충목왕 4) 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
○이색(李穡), 1348년(충목왕 4)원나라에 가서 국자감의 생원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9세) 1349년 충목왕5 충정왕원년
<시대상황>
○충정왕(忠定王) 즉위
1337(충숙왕 복위 6)∼1352(공민왕 1)
고려 제30대왕
재위 1349∼1351
본관은 개성(開城)
(10세) 1350년 충정왕1
○조부 김영후(59세)의 집에 충렬공 행장이 비장되어 있었으나, 해가 도래되어 종이가 떨어지고 먹빛이 변해져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쓰게 하고, 안진이 발문을 썼다. <1350 김방경행장, 안진 발>
<시대상황>
1350년에 왜구가 고성(固城)·죽림(竹林)·거제(巨濟) 등에 침입한 것을 합포(合浦:馬山)의 천호(千戶) 최선(崔禪) 등이 물리쳤는데, 이로부터 왜구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여 순천부(順天府)에 침입하여 조선(漕船)을 약탈하기도 하고 뒤이어 합포·장흥(長興)·동래(東萊) 등지에도 침입하였다.
○이곡(李穀), 1350년(충정왕 2) 원나라로부터 봉의대부 정동행중서성좌우사낭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郎中)을 제수받았고,
(11세) 1351년 충정왕2 공민왕원년
<시대상황>
1351년에 왜구가 자연도(紫燕島:仁川)·남양(南陽) 등지를 침범하였다.
또, 그해 윤택(尹澤)·이승로(李承老) 등이 왕이 어려서 국정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원나라에 청하여 강릉부원대군 기(江陵府院大君祺:공민왕)를 왕에 오르게 하고 충정왕은 강화에 추방되었다가 이듬해 독살을 당하니 나이 15세였다. 총릉(聰陵:開城)에 장사지냈으며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공민왕(恭愍王) 즉위
1330(충숙왕 17)∼1374(공민왕 23)
고려 제31대왕
재위 1351∼1374
본관은 개성(開城)
○이곡(李穀), 그 이듬해 죽었다. 그는 일찍이 원나라에서 문명을 떨쳤고 원나라의 조정에 고려로부터 동녀를 징발하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는 중소지주 출신의 신흥사대부로, 원나라의 과거에 급제하여 실력을 인정받음으로써 고려에서의 관직생활도 순탄하였다. 그는 유학의 이념으로써 현실문제에 적극적으로 대결하였으나, 쇠망의 양상을 보인 고려 귀족정권에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색(李穡), 1351년(충정왕 3)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귀국하여
○이제현(李齊賢),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여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네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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