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익원공 연보자료 03(12-17세)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5-10-23 19:03 조회1,400회 댓글2건

본문

 

(12세) 1352년 공민왕1

○조부 김영후(61세), 8월 복창부원군(福昌府院君)에 봉해지고 기미일에 서연(書筵)을 열고 김해 부원군 이제현(李齊賢), 한양 부원군 한종유(韓宗愈), 전 찬성사 허백(許伯)과 김자(金資), 안산군 안진(安震), 영창군 김승택(金承澤), 밀직부사 안목(安牧), 전리 판서 백문보(白文寶) 등이 날을 바꾸어 시독(侍讀)하면서, 서연(書筵)에 입시하여 변정도감(辨整都監)을 파할 것을 주장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칭탁하고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시대상황>

1352년 변발·몽고식 의복 등의 몽고풍속을 폐지하였으며,


○최영(崔瑩), 1352년(공민왕 1)에 안우(安祐)·최원(崔源) 등과 함께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여 호군(護軍)이 되었다.

*최영(崔瑩) : 1316(충숙왕 3)∼1388(우왕 14). 고려의 명장·재상. 본관은 동주(東州). 평장사(平章事) 유청(惟淸)의 5세손, 사헌규정(司憲糾正) 원직(元直)의 아들이다.


○정운경(鄭云敬), 1352년(충정왕 3) 전법총랑(典法摠郎)에 이르렀다.


○이색(李穡), 1352년(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권근(權近) 태어남

*권근(權近) : 1352(공민왕 1)∼1409(태종 9). 고려말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안동. 초명은 진(晉), 자는 가원(可遠), 호는 양촌(陽村). 보(溥)의 증손이다.



(13세) 1353년 공민왕2

△형 김사렴(19세), 어려서부터 學問에 뜻을 두었고 文詞에 富하여 공민왕(재위 1351~1374) 초에 登第하여 정몽주, 이색과 더불어 直諫으로 善俱하여 著名하였다. <1592이전 편찬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


○8촌형 김구용(16세), 1353년(공민왕2) 송천봉(宋天奉)이 감시한 진사시에 합격하고, 친시에 왕명으로 모란시(牡丹詩)를 지어 장원하여 왕으로부터 산원직(散員職)을 받았다.

*김구용(金九容) : 1338~1384, 고려말의 문신. 본관은 안동.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小易,若齋), 육우당(六友堂). 1338년(충숙왕복위7) 태어나서 외가에서 자라며 외조부 민사평(閔思平)에게 수학하였다.

*익재 이제현과 우곡 정자후, 그리고 죽헌 김륜 은 모두 철동(수철동=앵계리 동쪽)에 살았다. 이들은 당대의 문장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단한 분들이어서 [철동삼암-鐵洞三庵]이라 불리웠다. 정승 죽헌(김륜)이 돌아가시자 그의 사위인 급암 민사평이 그집에 살게 되었으며, 이 집에서 척약재(문온공 김구용)과 내서사인공 김제안 형제가 외할아버지인 급암선생께 수학하였다. 물론 이 삼암 선생에게서도 어린시절 많은 지도를 받아서, 삼암(익제,우곡,죽헌)의 학맥이 급암에게로 이어지고, 또 척약재와 김제안공에게로 이어져 왔다.


<시대상황>

○이제현(李齊賢),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안진(安震), 1353년(공민왕 2) 조일신이 제거되자 그 일파가 모두 처형되었는데,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곤장을 면하는 대신 동(銅)을 바치게 하였다. 뒤에 정당문학이 되었다.


○정운경(鄭云敬), 이듬해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로 전주목사로 나가 치적이 있었으며,


○이색(李穡),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정공권(鄭公權), 1353년(공민왕 2) 문과에 급제하였고 예문검열을 거쳐 좌사의대부에 올랐다.

*정공권(鄭公權) : 1333(충숙왕 복위 2)∼1382(우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추(樞). 자는 공권(公權)인데, 뒷날 자를 이름으로 썼다. 호는 원재(圓齋).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보(溥)의 아들이다.



(14세) 1354년 공민왕3

<시대상황>

○최영(崔瑩), 1354년에 대호군이 되었다. 이때 원나라에서 고려에 원병을 청하자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 40여명의 장수와 함께 군사 2,000명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갔는데, 그때 원나라의 승상(丞相) 탈탈(脫脫) 등을 좇아 중국 고우(高郵) 등지에서 싸우고


○이색(李穡),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에 1등, 전시(殿試)에 2등으로 합격,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내고 귀국하여 전리정랑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15세) 1355년 공민왕4

○8촌형 김구용(18세), 1355년 과거에 합격하였다. 덕령부 주부(德寧府注簿)가 되고,


<시대상황>

○최영(崔瑩), 이듬해에는 회안로(淮安路)에서 적을 막았으며 팔리장(八里庄)에서 싸워 용맹을 떨쳤다. 1355년에 원나라에서 귀국하였는데,


○이색(李穡),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우현보(禹玄寶),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이 되었다. 이어 집의·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우현보(禹玄寶) : 1333(충숙왕 복위 2)∼1400(정종 2).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공(原功). 적성군(赤城君) 길생(吉生)의 아들이다.



(16세) 1356년 공민왕5

○조부 김영후(65세), 1356년(공민왕5, 병신년) 2월 갑술일에 원나라에서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親仁保義宣力奉國彰惠靖遠)이라는 공신호를 내린 것에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뒤 상락후(上洛侯)에 봉해졌다. 


<시대상황>

1356년 몽고의 연호·관제를 폐지하여 문종 때의 제도를 복구하는 한편, 내정을 간섭하던 원나라의 정동행중서성이문소(征東行中書省理問所)를 폐지하고, 원나라의 황실과 인척관계를 맺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일파(奇轍一派)를 숙청하였으며, 100년간이나 존속해온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폐지하고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내정에 있어서는 1352년 그동안 인사행정에 폐단이 많았던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하여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해방시키는 등의 개혁정치를 베풀었다.


○이제현(李齊賢), 1356년 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은 1356년(공민왕 5)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에 내응, 원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비로소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이성계 :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손자 춘(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하였다.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다.


○정운경(鄭云敬) : 1356년(공민왕 5) 병부시랑에 올라 무반의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최영(崔瑩) : 고려에서는 이듬해부터 배원정책(排元政策)을 쓰게 되어 서북면병마부사(西北面兵馬副使)로 서북면병마사 인당(印璫)과 함께 원나라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격하여 파사부(婆娑府:九連城) 등 3참을 쳐부수었다.


○이색(李穡), 다음해 귀국하여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하여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7세) 1357년 공민왕6

<시대상황>

○이제현(李齊賢), 다음해에 치사하고 관직에서 아주 물러났다.

 

○정운경(鄭云敬), 이듬해 비서감보문각직학사(祕書監寶文閣直學士)로 옮겨 강릉도(江陵道)와 삭방도(朔方道)의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되어 백성을 안찰하였으며,


○최영(崔瑩), 1357년 동북면체복사를 거쳐 이듬해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楊廣全羅道倭寇體覆使)가 되어 배 400여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伏兵)을 이용하여 격파하였다.


○이색(李穡),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 시행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정몽주(鄭夢周), 1357년(공민왕 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정몽주(鄭夢周) : 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 고려의 문신·학자. 본관은 영일(迎日). 경상도 영천출생. 초명은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운관(云瓘)의 아들이다.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주회
작성일

  족보에서 익원공과 아들 손자 부분을 보았으면 합니다. 가능하신 분은 첨부하여 주세요.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익원공 선조님에 대한 종합적인 연보작성이 되고 있습니다.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