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게시판

외갓댁, 고모댁 (4) 문영공 배위 공암(양천)허씨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5-10-24 15:52 조회1,684회 댓글2건

본문

2세 김순 (문영공) 배위 제평군부인 공암(양천)허씨

 

문영공(김순)배위 공암허씨는 父 수문전태학사 문경공 허공(許珙)과  母 파평윤씨 정당문학 윤극민의 삼남이녀중 막내따님이시며   祖父는  

예부상서 한림학사 허수(許遂)  증조 예빈시소경 지제고 허경이다.

 

김문영공(金文英公) 부인 허씨(許氏) 묘지명 및 서문

부인의 성은 허씨(許氏)이고, 중찬(中贊) 문경공(文敬公) 허공(許珙)의 둘째 딸이다. 조부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수(遂)이며, 증보부는 예빈소경(禮賓少卿) 경(京)이다. 어머니는 윤씨(尹氏)이며, 정당문학(政堂文學) 문평공(文平公) 극민(克敏)의 딸이다.
부인은 삼가고 신중하여 문경공이 사랑하였다. (부인의 어머니인) 윤씨의 장사(葬事)날이 을축(乙丑)일이 부인의 출생한 해(을축년 : 원종 6, 1265)에 해당한다고 하여, 사람들이 날짜를 점쳐 바꾸자 하였다. 문경공은 “내 딸은 반드시 복을 누릴 것이니 꺼릴 것 없다.”고 하였다. 좋은 사위를 택하여 처로 삼게 했다. 죽은 상락군(上洛郡)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이다. 김씨와 허씨는 모두 대족(大族)이다. 사치스러움과 부유함이 서로 높았는데, 부인은 예법으로 스스로를 지켜,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문영공이 만년에 노래 잘하는 기생을 좋아하였으나, 투기하는 기색이 없었다.
문영공이 죽은지 12년 뒤인 지순 임신(至順 壬申 : 충혜왕 2, 1332) 7月 신묘(辛卯)일에 병으로 별세하였다. 아들 넷과 딸 셋을 낳았다. 장남 영돈(永暾)은 봉상대부 전법총랑(奉常大夫 典法摠郞)이다. 둘째 영휘(永暉)는 흥위위 낭장(興威衛 郎將)이다. 그 다음 사순(思順)은 출가하여 자은종(慈恩宗) 대덕(大德)이다. 그 다음 영후(永煦)는 봉선대부 자섬사사(奉善大夫 資贍司使)이다. 장녀는 대광 청하군(大匡 淸河君) 정책(鄭漬)에게 시집갔으나, 먼저 죽었다. 다음은 대광 상당군(大匡 上黨君) 백이정(白頤正)에게 시집갔다. 막내는 강절성 참지정사(江淅省 參知政事)인 왕인별리가불화(王人別里哥不花)에게 시집갔다.
명(銘)하기를


유순하고 바르니,            

부덕을 갖추었고
너그럽고 정숙하며 온화하니,       

어미의 법도가 아름답구나.
문경공의 살피고 헤아림은 크고 밝으니,  

하물며 그 자식에게야?
상을 줌은 마땅히 더욱 정밀하여,    

군자와 짝하니 착하게 오래 살았네.
나는 무덤에 명(銘)하니,         

땅속에 묻혀 오래하기를

 

 

 

김순(金恂)
1258(고종 45)∼1321(충숙왕 8). 고려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귀후(歸厚). 방경(方慶)의 넷째아들이다.
1279년(충렬왕 5)에 과거에 급제하여 낭장(郎將)으로 학사(學士)·직강(直講)이 되었다. 아버지 방경이 일본을 정벌할 때 종군하고자 했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몰래 배에 올라 종군하고 돌아와서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다.
1297년 좌부승지, 이듬해 좌승지에 오르고 광정부사(光政副使)·승지(承旨)·성균좨주(成均祭酒)·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지민조사(知民曹事)를 역임했으며, 다시 삼사좌사(三司左使)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사직했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등용되어 1312년(충선왕 4)에 중대광(重大匡)·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1316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랐다.
성격이 관후하고 예서(隷書)를 잘 썼으며, 거문고와 퉁소를 즐겼다.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친정의 가계(이왕섭제공)

허공(許珙)은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역임하였으며, 윤극민(尹克敏)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1229(고종 16)∼1268(원종 09).12.10]와

혼인하였는데 부인(夫人)이 죽은 후에 동서(同壻)인 최징(崔澄)의 딸인 철원최씨(鐵原崔氏)와 혼인하였으니 허공(許珙)에게는 바로

처제(妻弟)의 딸이었다.
허공(許珙)은 초실(初室) 파평윤씨(坡平尹氏)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으니 동주사(東州事) 허정(許程), 양천군(陽川君)

허평[許評:허숭(許嵩)으로 개명(改名)], 찬성사(贊成事) 허관(許冠)의 세 아들과 언양김씨(彦陽金氏) 도첨의(都僉議) 김변(金 貝+幷),

안동김씨(安東金氏) 삼사사(三司使) 문영공(文英公) 김순(金恂)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후실(後室) 철원최씨(鐵原崔氏)와의 사이에서는

 2남 2녀를 두었는데 허총(許寵)과 허부(許富)는 아들이고 충선왕(忠宣王)의 계비(繼妃)인 순비(順妃)와 흥위위 보승 별장(興威衛保勝別將)

조연(趙璉)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다.

허공의 첫째 아들인 허정(許程)은 동주사(東州事)를 지냈으며 부인은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치사(致仕)한 행주기씨(幸州奇氏)

기홍석(奇洪碩)이다. 둘째 아들인 허평(許評)은 허숭(許嵩)으로 개명(改名)하였는데 검교 정승(檢校政丞) 양천군(陽川君)에 이르고

량숙(良肅)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부인은 서원염씨[瑞原廉氏:파주염씨(坡州廉氏)] 찬성사 상장군(贊成事 上將軍) 충정공(忠靖公)

염승익[廉承益:?∼1302(충렬왕 28)]의 딸이며 아들은 허종(許悰)이다. 허종(許悰)은 충선왕(忠宣王)의 딸 수춘옹주(壽春翁主)와

혼인하였으며 정안부원군(定安府院君)에 봉(封)해졌다. 허공의 셋째 아들 허관(許冠)은 충렬왕때 과거에 급제하여 호부산랑(戶部散郞)에

이르렀고 찬성사(贊成事)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부인은 중찬(中贊)으로 치사(致仕)한 여산송씨(礪山宋氏)  양의공(良毅公)

송분[宋王分:?∼1318(충숙왕 05).06.21(경술)]의 딸이다. 허관(許冠)의 아들인 허백(許伯)은 양천군(陽川君)의 봉작(封爵)을 받았다.

허백의 아들 허경(許絅)은 지신사(知申事)에 이르렀고 허경의 아들은 허금(許錦)이다. 허금은 공민왕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좌상시(左常侍),

전리판서(典理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허금의 아들은 허기(許心耆)이다. 허기의 아들은 부사(府使) 허비(許扉)이다.

허비는 전의이씨(全義李氏) 중추원사(中樞院使) 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의 딸과 혼인하여 허손(許蓀), 허훈(許薰), 허지(許芝),

허형(許형)의 네 아들과 이명민(李命敏), 이계정(李季貞)에게 출가한 딸을 두었는데, 이 후손들에게서 우의정(右議政)

허종[許琮:1434(세종 16)∼1494(성종 25)], 좌의정(左議政) 허침[許琛:1444(세종 26)∼1505(연산군 11)], 찬성(贊成)을 지낸 동애(東崖)

허자[許磁:1496(연산군 2)∼1551(명종 6)], 동의보감(東醫寶鑑)을 찬집(撰集)한 허준(許浚), 미수(眉수)

허목[許穆:1595(선조 28)∼1682(숙종 8)], 영의정(領議政) 묵재(默齋) 허적[許積:1610(광해군 2)∼1680(숙종 6)] 등 수많은 인물이 배출된다.

허공의 넷째 아들 허총(許寵)은 판관(判官)과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허공의 다섯째 아들 허부(許富)는 선부전서(選部典書)에 이르렀으며 부인은 교하노씨(交河盧氏)로서

양효공(良孝公) 노영수[盧穎壽:노영수(盧英壽):?∼1385(우왕 11)]의 딸이다. 노영수는 우왕(禑王)의 비(妃)인 의비(毅妃)의 아버지이다.

허부의 아들은 허신(許信), 허순(許順), 허유(許猷), 허저(許 ), 허완(許完)이다. 허유(許猷)는 공신(功臣)으로 양천군(陽川君)에

 책봉(策封)되었다. 허유의 아들은 허서(許瑞)이다.

 

허공의 셋째 딸은 충선왕(忠宣王)의 계비(繼妃)인 순비(順妃)이다.
순비는 1271년(원종 12)에 태어났으며, 고려 제 24대 원종(元宗)의 친조카인 왕현(王日玄)에게 시집가서 3남 4녀를 두었다. 왕현이 죽자

홀로 지내던 허씨가 조카인 허종(許悰)의 집에 있었는데, 허종의 장인 충선왕(忠宣王)이 허종의 집에 들렀다가 눈에 띄게되니 충선왕이

그녀를 맞아 들여 순비(順妃)로 봉하였다. 순비(順妃)로 인해 충선왕의 외동딸 수춘옹주와 혼인한 허종(許悰)에게는 충선왕(忠宣王)이

고모부이면서 장인이 되었다. 순비(順妃)는 왕현(王日玄)과의 사이에서 낳은 셋째딸이 원(元)나라의 황태자비가 되어 그 영향이 컸다.

순비는 1335년(충숙왕 복위 4)에 65세로 졸하였다.(이상 전의이씨 이왕섭 자료 제공)

 

 

허공(許珙)(양천허씨 홈에서 인용)

1234년(고려 고종20)~1291년(충렬왕17). 고려의 문신.
추밀원 부사를 지낸 허수(許遂)의 아들이다.
시조로부터 10세손이다.

자는 온궤이고, 초명은 허의(許儀),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우리 양천허씨의 원류계파(原流系派)를
이룬 동주사공 허정.판도좌랑공 허관. 대제학공 허부의 부친이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위(奇偉)하였으며, 1258년(고종 45)에 평장사(平章事) 최자(崔滋)의 문하에서
병과로 급제, 승선(承宣) 유경(柳敬)의 추천으로 최령(崔寧)·원공식(元公植)과 함께
내시(內侍)로 추천되어
정사점필원(政事點筆員)이 되니,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정방3걸(政房三傑)이라 불렀다.
이후 국학박사(國學博士)를 거쳐 합문지후(閣門祗候)를 제수 받았다.

1267년(원종 8) 호부시랑(戶部侍郞)이 되어 신종 ·희종 ·강종 등 3조(朝)의 실록을 찬수하였다.
1269년 우부승선 ·이부시랑 ·어사대지사(御史臺知事)가 되었으며, 이때 권신 임연(林衍)이 그의 딸을
며느리로 삼고자 청혼하였으나 거절하여 미움을 샀다.
그해 임연이 왕을 폐하고 안경공(安慶公) 창 을 세울 때,
많은 조신들이 살해되었으나 부인의 장례 때문에 양천에 가서 있었던 관계로 화를 면하였다.
그 뒤에도 전선(銓選)을 맡을 적격자가 없어 추밀원첨서사(簽書事)로 중용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추밀원지사로 성절사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온 뒤, 1276년 밀직사사 겸 지공거(知貢擧)를 거쳐 세자조호(世子調護) ·밀직사판사를 지냈다.
1279년 첨의부지사(僉議府知事)로 있을 때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위하여 고려에 전함의 건조를 명하자
전함 90척을 건조하게 되었는데, 경상도도지휘사로 이를 지휘하였다.
당시 전라도 도지휘사 홍자번(洪子藩)이 일을 반도 마치지 않았을 때 이미 마치고 돌아오니
그 유능함에 크게 탄복하였다.

1280년 문학참사(文學參事) ·세자보(世子保)가 되고,
1284년(충령왕10) 수국사(修國史)를 겸해 원부(元傅).한강(韓康)등과 함께 {고금록(古今錄}을 찬술하였다.
1288년 첨의중찬(僉議中贊)이 되어 재차 지공거를 겸하였고, 1290년(충렬왕 16) 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합단(哈丹)이 침입하였던바 이때 홍자번과 더불어 서울을 수비하였다.
이때에 유언비어가 있어 적(賊)이 이미 가까이 들어왔다 하므로,
민심이 흉흉하여 조신들이 모두 강화로 피난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홀로 “어찌 유언비어를 믿고 마음대로 국도(國都)를 옮기리오!” 하며 반대하였다.

이듬해인 1291년 원나라와 함께 합단(哈丹) 공격에 출전했다가 병사하였다.

청렴하기로 유명하였으며, 1310년(충선왕 2)에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경공(文敬公) 묘지<題額>

돌아가신 광정대부 첨의중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전리사사 세자사(匡靖大夫 僉議中贊 修文殿大學士 監修國史 判典理司事 世子師)이고 추증된 시호가 문경(文敬)인 허공(許公) 묘지
공의 이름은 공(珙)이고, 자는 산휘(山輝)이며, 공암현(孔嵒縣) 사람이다. 증조 이섭(利涉)은 전구서승(典廐署丞)이고, 조부 경(京)은 예빈소경 지제고(禮賓少卿 知制誥)이며, 아버지 수(遂)는 은청광록대부 추밀원부사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翰林學士丞旨)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하였는데, 현종대왕(顯宗大王)의 왕자인 대사(大師) 왕충(王冲)의 6대 외손이다. 어머니는 신정군부인 장씨(新定郡夫人 張氏)로 합문지후(閤門祗候) □우(□友)의 딸이다. 시조[鼻祖]로부터 공에 이르는 무릇 11대의 세계(世系)에 벼슬아치가 잇달아 배출되고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서로 이어져 내려 왔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재능과 도량이 뛰어났다. 19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23세에 문음(門蔭)으로 바로 복두점녹사(幞頭店錄事)에 임명되었다. 무오년(고종 45, 1258 )에 권신(權臣)들이 제거되고 정치가 왕실로 돌아가게 되자, 문사(文士)를 간택하게 되어 정당(政堂)에 들어갔다. 공은 그 때 아직 급제하지 않았으나 학문의 재능과 행정 능력에 있어서 능히 따를 만한 자가 없었으므로, 이에 선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곧 이어 내시(內侍)로 들어가고 대악서승(大樂署丞)에 임명되었다. 그 해에 제2생(第二生)으로 바로 과거에 응시하여 제5인으로 급제하고, 대학박사(大學博士)로 옮겨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제수되고, 이후 비서랑 호부원외랑 국학직강 이부낭중 직보문각 국자사업 충사관수찬관 조산대부 호부시랑 보문각대제 지제고 동궁시강학사(秘書郞 戶部員外郞 國學直講 吏部郎中 直寶文閣 國子司業 充史館修撰官 朝散大夫 戶部侍郞 寶文閣待制 知制誥 東宮侍講學士)를 거쳤다.
37세인 기사년(원종 10, 1269)에 추밀원우부승선 이부시랑 한림시독학사 태자우찬선대부(樞密院右副承宣 吏部侍郞 翰林侍讀學士 太子右贊善大夫)에 임명되고, 조청대부 대복경 지어사대사 국자감대사성 한림학사(朝請大夫 大僕卿 知御史臺事 國子監大司成 翰林學士)에 이르렀는데, 모두 지제고(知制誥)[三字]를 겸하면서 덕화(德化)를 이루는 데 참여하였다. 40세인 임신년(원종 13, 1272)에는 은청광록대부 첨서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銀靑光祿大夫 簽書樞密院事 翰林學士承旨)에 임명되고, 곧 이어 추밀원부사 우산기상시 동지원사(樞密院副使 右散騎常侍 同知院事)에 올랐다. 조정이 원의 관제(官制)를 피하게 되자 중의대부 밀직사사 감찰제헌 세자원빈 판밀직(中議大夫 密直司使 監察提憲 世子元賓 判密直)에 임명되었다. 47세인 기묘년(충렬 5, 1279)에는 광정대부 지첨의사 보문서대학사 동수국사 참문학사 판판도사 집현전대학사 수국사 판군부사사(匡靖大夫 知僉議事 寶文署大學士 同修國史 叅文學事 判版圖事 集賢殿大學士 修國史 判軍簿司事)가 되고, 54세인 병술년(충렬 12, 1286)에는 첨의시랑찬성사 수문전대학사 판전리사사(僉議侍郞贊成事 修文殿大學士 判典理司事)가 되었다.
정해년(충렬 13, 1287) 여름 상국(上國, 元)의 변방에 일이 생기자, 7월에 임금이 군사를 거느리고 전투를 돕게 되었다. 공이 임금을 호종하기를 청하였으나, 남아서 우리 조정을 지킬 사람이 마땅하지 않다고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다시 글[奏]을 올려 “신이 비록 용기가 없으나 지금 임금께서 외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터에 신이 어찌 마음 편안하게 앉아서 밥을 먹고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 말이 지극히 간절하였으므로 임금이 허락하였다. 임금이 돌아오게 되자, 그 공을 가상하게 여겨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승진하여 임명하였다.
신묘년(충렬 17, 1291) 6월 하순에 처음 가벼운 병이 들었는데, 오래 되면서 점차 위독해져서 8월 초8일 인시(寅時)에 집에서 돌아가셨다. 향년 59세이다. 임금이 부음을 듣자 슬퍼하고 추모하여 곧 셋째 아들 관(冠)에게 8품의 관직을 내려주고, 담당 관리에게 일을 도와주도록 명하였다. 보현원(普賢院)의 서산 기슭에 장례지내고, 시호를 문경공(文敬公)이라고 하였다.
공은 성품이 본래 지조가 굳건하며 순박하고 신중하고 검소하였으며, 그럴싸하게 꾸미며 자랑하거나 아첨하지 않았다. 중요한 지위에 있던 15년 동안 사람을 평가하면서 항상 잘못된 일이 없는지 다시 살펴 구제하도록 하였으며, 재상의 지위에 있던 20년 동안 더욱 충성스럽고 조심을 다하여 끝까지 신하의 절조를 드러내었다.
약관의 나이에 벼슬하여 시중으로 임명되기까지 항상 총애와 영예를 누리면서 한 번도 견책을 받거나 탄핵된 일이 없었다. 세 차례 과거[禮闈]를 주관하여 밝고 강한 이를 가려 뽑았는데, 문하의 훌륭한 인재들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중의 반은 대각(臺閣)에 있다.
기축년(충렬 15, 1289) 11월에 임금과 세자가 천자의 궁정에 조회하러 갔을 때 공은 권행상서성사(權行尙書省事)로 있었다. 경인년(충렬 16, 1290) 정월에 삭방도(朔方道)를 지키는 장수가 “구적(寇賊, 哈丹賊)이 우리의 강토를 쳐들어오려고 하여 인심이 흉흉하니 어떻게 하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종실과 재보(宰輔)와 은퇴한 원로 재상들이 대궐에 모여서 난리를 피할 일을 논의하였는데, 모두들 “인민을 거느리고 섬으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홀로 단정하여 말하기를 “사람을 보내 다시 구적들을 살피게 하여 그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한다면, 그 때 섬으로 들어가 사직을 편안하게 하여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금 임금이 원[王庭]을 방문하고 있는데, 조정의 대신들이 어찌 함부로 도읍과 백성을 옮기는 일을 가볍게 거론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여러 논의가 이에 잠잠해졌다. 적의 동향을 살펴보니 과연 구적이 여진(女眞) 땅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 상당히 우러러보았다.
공은 처음 정당문학(政堂文學) 윤극민(尹克敏)공의 큰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근시낭장(近侍郎將) 정(정)으로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기(奇)□□공의 딸과 결혼하였고, 2남은 조현대부 장군 감찰시사(朝顯大夫 將軍 監察侍史) 평(評)으로 찬성사 상장군(贊成事 上將軍)인 염(廉)□□공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3남은 대창서승(大倉署丞) 관(冠)이다. 장녀는 정승대부 판비서시사 문한시강학사 지제고(正丞大夫 判秘書寺事 文翰侍講學士 知制誥) 김변(金賆)에게 시집갔고, 2녀는 승사랑 비서소윤 지제고(升仕郞 秘書少尹 知制誥) 김순(金恂)에게 시집갔다.
(공은) 뒤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최징(崔澄)공의 여섯째 딸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 총(寵)이고, 2남은 동면도감판관(東面都監判官) 부(富)이며, 장녀는 수태위 상주국 평양후(守太尉 上柱國 平陽侯) 현(昡)에게 시집갔으며, 2녀는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 조연(趙璉)에게 시집갔다.
조정에 등용된 인사들이 (공의) 한 가문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니, 아, 공의 평생은 이미 온전한 아름다움을 갖추었다. 그러나 하늘은 어찌하여 홀로 그의 장수를 아까워하는가.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일이 조물주가 명을 주고 빼앗는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잠시 (공의) 보살핌을 받았고, 또 묘지명을 청하여 왔으니, 서툴게나마 서술하여 글을 짓는다.
명(銘)하여 이른다.
우리 공은 조용하고 검소하고 겸손하였으며
총명하여 약관의 나이에 성균관[泮宮]에 높이 올라갔다.
기약한 대로 과거에 급제하여 정당(政堂)의 동쪽에 들어가
오로지 각각의 인물을 가려 뽑고 임금을 도우며 충성을 다하였다.
일찍이 재상의 지위에 오르니 복과 녹이 모두 풍족하였고
56세에 우뚝하게 시중(侍中)이 되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뜻을 두니 음공(陰功)이 많이 있으며
세 차례나 과거[棘院]를 주관하여 영웅을 다 뽑았다.
□ 허물을 보이지 않고 한결같이 잘 지켰으나
하늘은 어찌 수(壽)를 내리지 않아 죽음이 급하게 다가왔는가.
5남 4녀를 두었으니 자손이 창성하고
왕손(王孫)이 사위가 되어서 가풍(家風)을 다시금 떨치게 되었으니
가계가 10세를 연이어 오면서 선을 행한 것이 모여진 것이로다.
나는 오직 오래된 인척(姻戚)으로 슬픔과 기쁨을 다하여 애통해 하며
좋은 돌에 명(銘)을 새겨 말갈기 같은 무덤에 봉하여 넣는다.
지원(至元) 28년 신묘년(충렬 17, 1291) 9월 일 쓰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하)』(2001)]

 

 

친정 형제

 

허부(許富)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문관. 본관은 공암(孔巖:陽川). 첨의중찬(僉議中贊) 공(珙)의 아들이다.
충숙왕 때 우대언이 되었는데, 1320년(충숙왕 7) 과시(科試)를 관장하여 정을보(鄭乙輔) 등 80여인을 뽑았다.
그런데 글자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방두(榜頭)에 있는 1인만 뽑고, 나머지는 우열을 가리지 않고 봉한 이름을 열어보고 차례로 이름을 썼으므로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고 한다.
이해 선부전서(選部典書)가 되었다.

 

허숭(許嵩)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공암(孔巖:陽川). 초명은 평(評). 첨의중찬(僉議中贊) 공(珙)의 아들이다.
1279년(충렬왕 5) 김방경(金方慶)의 아들 흔(欣) 등 의관자제(衣冠子弟)25명 중의 한 사람으로 뚤루게(禿魯花)가 되어 대방공 징(帶方公澂)을 따라 원나라에 갔으며, 1286년 궁전배장군(弓箭陪將軍)으로서 낭장(郎將) 김심(金深)·설지충(薛之忠)·왕유소(王維紹) 등 9명과 원나라에 갔다.
또, 1291년 장군으로서 상장군 유비(柳庇)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세자의 환국을 요청하였다.
1297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가 되고, 1307년에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하였다.
충선왕이 즉위하여 관제를 개혁하자 민조상서(民曹尙書)가 되었고, 이후 동지밀직사사 판봉상시사 동지자정원사(同知密直司事判奉常寺事同知資政院事)를 거쳐 1310년(충선왕 2) 양천군(陽川君)으로 봉해지고, 이어 검교정승(檢校政丞)을 제수받았다. 시호는 양숙(良肅)이다.

 

 

친정 조카

 

허백(許伯)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공암(孔巖:陽川). 첨의중찬(僉議中贊) 공(珙)의 손자이며, 충렬왕대에 호부산랑(戶部散郎)으로 찬성사(贊成事)에 증직된 관(冠)의 아들이다.
1317년(충숙왕 4) 병과로 급제, 1344년(충목왕 즉위년) 판전민도감사(判田民都監事)가 되고, 이어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라 이제현(李齊賢)과 더불어 서연에서 시독하였으며, 같은해 밀직사사로 승진하였다.
1347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곡(李穀)과 더불어 진사를 취하고 김인관(金仁琯)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1349년(충정왕 1)찬성사가 되고, 1356년(공민왕 5)  중서시랑동평장사(中書侍郎同平章事)가 되어 양천군(陽川君)에 봉하여졌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허유(許猷)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본관은 공암(孔巖). 첨의중찬(僉議中贊)을 지낸 공(珙)의 손자로, 충숙왕 때에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지낸 부(富)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교하노씨(交河盧氏) 영수(潁秀)의 딸이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강릉대군 기(江陵大君祺:恭愍王)를 따라 원나라의 연경(燕京)에 가서 숙위하였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통례문판관으로 서북면찰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다음해 감찰장령에 재직중 앞서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한 공으로 3등공신이 되었으며, 뒤에 판합문사(判閤門事)에 이르렀다. 이후 홍건적이 침입하자 병마사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으나 이때 사감으로 장군 최복량(崔福良)을 죽인 일로 왕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홍건적 격퇴 후 정승 김용(金鏞)에 의하여 섬에 유배되어 봉졸(烽卒)로 충군(充軍)되었으나 곧 소환되어 얼마 후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홍건적의 침입 때 서울을 수복하고 왕을 호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양천군(陽川君)의 전횡을 비방하였다가 그의 미움을 사 청주로 유배되었다

 

 

 

 

 

 

 

 

 
 
     
 

 

 

 

댓글목록

김태서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태서
작성일

  아침 저녁으로 코끝이 맹맹하니 쌀쌀합니다.
환절기 건강 꼭 챙기세요.

김항용님의 댓글

profile_image 김항용
작성일

  우리 직계 선조님 연구에서 이제는 외가댁, 고모님댁들에 관한 연구로까지 확대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내용들을 정리하여 홈에 넣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