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8)우리집과 내 어릴 적(6) - 군사를 일으키다
페이지 정보
솔내영환 작성일05-10-25 10:34 조회1,869회 댓글0건본문
우리집과 내 어릴 적(6) - 군사를 일으키다
큰 검은 갓을 쓰시고 동저고리 바람으로 일을 보고 계셨다. 방문 앞에 놓인 수철 화로의 약탕관에서 김이 나고 끓고 있는데 독삼탕 냄새가 났다. 선생이 잡수시는 것이라고 한다. 방 내외에는 여러 제자들이 옹위하고 있다.
그 중에도 가장 친근하게 모시는 이는 손응구(孫應九), 김연국(金演局), 박인호(朴寅浩) 같은 이들인데, 손응구는 장차 해월 선생의 후계자로 대도주가 될 의암 손병희(義菴 孫秉熙)로서 깨끗한 청년이었고, 김은 연기가 사십은 되어 보이는데 순실한 농부와 같았다. 이 두 사람은 다 해월 선생의 사위라고 들었다. 손씨는 유식해 보이고 '천을천수(天乙天水)'라고 쓴 부적을 보건대 글시 재주도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 일행이 해월 선생 앞에 있을 때에 놀라운 보고가 들어왔다. 전라도 고부(古阜)에서 전봉준(全琫準)이가 벌써 군사를 일으켰다는 것이었다. 뒤이어 또 후보(後報)가 들어왔다. 어떤 고을 원이 도유 - 동학도를 닦는 선비 - 의 전가족을 잡아 가두고 가산을 강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를 들으신 선생은 진노하는 낯빛을 띠고 순 경상도 사투리로,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우지"하시니 선생의 이 말씀이 곧 동원령이었다. 각지에서 와서 대령하던 대접주(大接主)들이 물끓듯 살기를 띠고 물러가기 시작하였다. 각각 제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자는 것이었다.
우리 황해도에서 온 일행도 각각 접주라는 첩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두건 속에 '해월인(海月印)이라고 전자로 새긴 인이 찍혀 있었다. 선생께 하직하는 절을 하고 물러나와 잠시 속리산을 구경하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어섰다.
벌서 곳곳에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모이고 평복에 칼 찬 사람을 가끔 만나게 되어 있었다. 광혜원(廣惠院) 장거리에 오니 만 명이나 됨직한 동학군이 진을 치고 행인을 검사하고 있었다. 가관인 것은 평시에 동학당을 학대하던 양반들을 잡아다가 길가에 앉히고 짚신을 삼기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증거를 보이고 무사히 통과하였다. 부근 촌락에서 밥을 짐으로 지어 가지고 도소(都所), 이를테면 사령부로 날라오는 것을 무수히 길에서 만났다. 논에서 벼를 베던 농민들이 동학군이 물밀 듯 모여드는 것을 보고 낫을 버리고 달아나는 것도 보았다. 서울에 이르러 경군 - 서울 군사 - 이 삼남(三南)을 향하여서 행군하는 것과 만났다. 9월에 해주에 돌아왔다.
황해도 동학당들도 들먹들먹하고 있었다. 첫째로는 양반과 관리의 압박으로 도인들의 생활이 불안하였고, 둘째로는 삼남 -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 으로부터 향응하라는 경통이 빗발치듯 왔다. 그래서 15접주를 위시하여 여러 두목들이 회의한 결과 거사하기로 작정하고 제1회 총소집의 위치를 해주 죽천장(竹川場)으로 정하고 각처 도인에게 경통을 발하였다.
나는 팔봉산 밑에 산다고 하여서 접 이름을 팔봉이라고 짓고 푸른 갑사에 '팔봉도소(八峰都所)'라고 크게 쓴 기를 만들고 표어로는 '척양척왜(斥洋斥倭)' 넉 자를 써서 높이 달았다. 그리고는 서울서 토벌하러 내려올 경군과 왜병과 싸우기 위하여 연비 중에서 총기를 가진 이를 모아서 군대를 편제하기로 하였다.
나는 본시 산협장생이요, 또 상놈인 까닭에 산포수 연비가 많아서 다 모아본즉 총을 가진 군사가 7백 명이나 되어 무력으로는 누구의 접보다도 나았다. 인근 부호의 집에 간직하였던 야간의 호신용 무기도 모아 들였다.
최고 회의에서 작정한 전략으로는 우선 황해도의 수부인 해주성을 빼앗아 탐관오리와 왜놈을 다 잡아 죽이기로 하고 팔봉 접주 김창수로 선봉장을 삼는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병서에 소양이 있고 또 내 부대에 산포수가 많은 것도 이유이겠지만 자기네가 앞장을 서서 총알받이가 되기 싫은 것이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쾌히 선봉이 되기를 허락하고 다른 부대더러 뒤에 따라오라 하고 나는 '선봉(先鋒)'이라고 쓴 사령기를 들고 말을 타고 선두에 서서 해주성을 향하여 전진하여서 해주성 서문 밖 선녀산에 진을 치고 총공격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이윽고 총지휘부에서 총공격령이 내리고 작전 계획은 선봉장인 나에게 일임한다는 명령이 왔다. 나는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본부에 아뢰고 곧 작전을 개시하였다. 지금 성내에 아직 경군은 도착하지 아니하고 오합지중(烏合之衆)으로 된 수성군(守城軍) 2백 명과 왜병 일곱 명이 있을 뿐이니 선발대로 하여금 먼저 남문을 엄습케 하여 수성군의 힘을 그리로 끌게 한 후에 나는 서문을 깨뜨릴 터인즉 총소(總所) - 도소에 대한 말이니 총사령부라는 뜻 -에서 형세를 보아서 허약한 편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총소에서는 내 계획을 채용하여 한 부대를 남문으로 향하여 행진케 하였다.
이때에 수명의 왜병이 성 위에 올라 대여섯 방이나 시험 사격을 하는 바람에 남문으로 향하던 선발대는 도망하기를 시작하였다. 왜병은 이것을 보고 돌아와서 달아나는 무리에게 총을 연발하였다. 나는 이에 전군을 지휘하여서 서문을 향하여 맹렬한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돌연 총소에서 퇴각하라는 명령이 내리고 우리 선봉대는 머리도 돌리기 전에 뒤에 따르던 군사가 산으로 들로 달아나는 것이 보였다. 한 군사를 붙들어 퇴각하는 까닭을 물으니 남문 밖에 도유 서너 명이 총에 맞아 죽은 까닭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니 선봉대만 혼자 머물 수도 없어서 비교적 질서있게 퇴각하여 해주에서 서쪽으로 80리 되는 회학동(回鶴東) 곽감역(郭監役) 댁에 유진하기로 하였다. 무장한 군사는 축이 안 나고 거의 전부 따라와 있는 것이 대견하였다.
나는 이번의 실패에 분개하여서 잘 훈련된 군대를 만들기에 힘을 다하기로 하였다. 동학 도유거나 아니거나 간에 장교의 경험이 있는 자는 비사후폐(秘事厚幣)로 초빙하여다가 군사를 훈련하는 교관으로 삼았다. 총쏘기는 말할 것도 없고 행보하는 법이며 체조며 온갖 조련을 다하였다. 좋은 군대를 만드는 것이 싸움에 이기는 비결이라고 믿은 것이었다.
하루는 어떤 사람 둘이 내게 면회를 청하였다. 구월산 밑에 사는 정덕현(鄭德鉉), 우종서(禹鍾瑞)라는 사람들이었다. 찾아온 까닭을 물었더니 그 대답이 놀라웠다. 동학군이란 한 놈도 쓸 것이 없는데 들은즉 그대가 좀 낫단 말을 듣고 한 번 보러 왔다는 것이다. 옆에 있던 내 부하들이 두 사람의 말이 심히 불공함을 분개하였다. 나는 도리어 부하를 책망하여 밖으로 내어보내고 나서 이상한 손님과 셋이서 마주앉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