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06(26-28세)
페이지 정보
김주회 작성일05-11-01 17:35 조회1,456회 댓글3건본문
(26세) 1366년 공민왕15
△누이(허강의 처)
신돈은 영산(靈山) 사람이요, 그의 모친은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 여종이다. 신돈은 어려서 중이 되었다. 이름은 신변조(遍照)요, 자는 요공(耀空)이다. 신돈은 그 어미가 천하여서 중들 사이에서도 한축에 들지 못하고 항상 산방(山房)에 거처하고 있었다.
밀직 허강(許綱)의 처 김씨(金氏)는 상락군(上洛君) 김영후(金永煦)의 손녀인데 허강이 죽으니 신돈이 문벌을 탐내어 그 과부에게 장가 들고자 했다. 김씨가 이 소문을 듣고 말하기를 “우리 주인이 평생에 남의 여자라고는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정히 나를 욕보이려고 한다면 나는 자결하고 말겠다”라고 하고 드디어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신돈이 이 말을 듣고 단념하였다. <고려사>
○형 김사렴(32세), 요승 신돈과 대립하였다.
1365년(공민왕 14) 왕이 신돈(辛旽)을 총애하여 벽상삼한삼중대광·집현전 대학사(壁上三韓三重大匡集 賢殿大學士)를 더하고 공신호를 내리자, 김사렴이 임금에게 상서해 가로되 "신돈은 바르고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이니 후에 반듯이 정치를 문란케 하여 고려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나아가서 종묘제전을 끊이게 할 위험인물이라" 상주하였다. 이때에 마침 좌사간 대부 정추(=정공권)와 우정언 이존오는 신돈에 관한 언론이 빌미가 되어 정추는 동래로 귀양가고 이존오는 장사감무로 좌천되니 조야가 벌벌 떨고 감히 신돈의 말을 입에 담지 못하는 터인데도 오직 김사렴만이 이와 같이 직언으로 성토하였기로 그 명성이 나라 안에 진동하였다. <1822 남공철의 고려명신전> *이때 김사렴도 폄축(좌천되어 유배됨)된 듯함.
○8촌 김제안(27세쯤), 공민왕이 반원개혁정치(反元改革政治)를 하고자 하여, 1366년 하남왕(河南王)에게 전녹생(田祿生)을 사신으로 보낼 때 군부좌랑(軍簿佐郎)으로 서장관이 되어 수행하였다. 연경에 이르렀을 때 하남왕과의 수교를 싫어한 원나라의 태자가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전녹생을 되돌려보낸 후 병을 핑계로 연경에 머물고 있다가 틈을 보아 홀로 하남에 가서 국서를 전달하였다. 이 공으로 하남왕의 상주에 의하여 중서병부낭중 첨서하남강북등처행추밀원사(中書兵部郎中簽書河南江北等處行樞密院事)가 되었다.
이때에 이숭인이 써서 보낸 시 2수가 <도은집>에 있다.
仲賢郎中에게 祝賀하여 주다 (이숭인)
(이름은 齊顔, 中書兵部郎中이 되었다.-本註)
---
사람을 燕에 보내면서 겸하여 仲賢에게 편지하다. (이숭인)
---
중현(仲賢) 정말 기발한 선비, 나와도 서로간에 친분이 있네
상종하기 10년이 넘었는데도 재주와 명망이 독보라 하네
가고 다시는 오지 않으니 나로 하여금 길이도 생각만 하게 하네
---
金仲賢이 살던 곳을 지나가다 (이숭인)
동산에는 봄이 가며 낙화가 날고,
사립문 닫았는데 푸른 이끼(蒼苔창태) 끼었구나.
시와 술로 지내 버린 10년이 꿈 같으며,
용산에 이 태양은 맑게도 지는구나.
이어 하남왕의 보빙사(報聘使) 곽영석(郭永錫)과 함께 돌아오자 공민왕은 그 노고를 치하하여 대언에 임명하려 하였으나, 신돈(辛旽)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음을 불쾌히 여겨 반대한 까닭에 내서사인이 되었고, 이어서 전교부령(典校副令)으로 좌천되었다.
김제안의 형 김구용의 <척약재학음집>에 교유시가 있다.
寄仲賢 /중현에게 주다 (김구용)
雨絶風淸意欲秋。夜深明月照書樓。捲簾危坐發長嘯。隔檻蟲聲足貢愁。
次韻 /중현의 시에 차운하다. (김구용)
夢覺東山雲忽堆。那知街上散銀杯。今年春色應無盡。杏?飄香半未開。
김방려(1324-1423)의 <축은집>에 김영돈(1285-1348)과의 교유시 여러 수가 실려 있다. <축은집>에는 그 외에도 우리 가문의 김구용(1338-1384), 김제안(?1340-1368), 김사형(1341-1407)과의 교유시도 여러 수가 실려 있다. *김방려는 김영돈의 문하생일 가능성이 많고 이를 인연으로 우리 가문 여러 선조님과의 교류가 평생 이어진 것으로 볼수 있다.
<시대상황>
○이존오(李存吾),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1366년 우정언이 되어 신돈(辛旽)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샀으나, 이색(李穡) 등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뒤 공주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울분 속에 지내다가 죽었다.
신돈의 전횡을 풍자한 시조 1수를 비롯, 3수의 시조가 《청구영언》에 전한다.
○정공권(鄭公權), 1366년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신돈(辛旽)을 탄핵하다가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였으나, 이색(李穡)의 구원으로 동래현령으로 좌천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신돈의 등용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많은 물의가 있었다.
1365년, 왕이 신돈을 총애하므로 이제현(李齊賢)이 신돈의 골상(骨相)은 옛날 흉인(凶人)의 것과 같아 후환을 끼칠 것이라 하여 왕에게 가까이하지 말 것을 요청한 바 있었으며,
1366년에 간관 정추(鄭樞)와 이존오(李存吾) 등이 탄핵을 하다가 도리어 폄축(貶逐)을 당하기도 하였다.
1367년 10월에는 오인택(吳仁澤)·경천흥(慶千興)·김원명 등이 제거하려고 밀의(密議)하다가 발각되어 장류를 당하였으며,
1368년 10월에도 김정(金精)·김흥조(金興祖)·김제안(金齊顔) 등이 그를 죽일 것을 모의하다가 계획이 누설되어 장류되던 도중에 살해를 당하였다.
◀1360년대 중반, 공민왕은 신돈을 기용하여 권문세족, 신진 유학세력 등 기존의 세력을 멀리 하면서 새로운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후에 신돈이 타락하게 되면서 우리 가문과도 많은 충돌을 하게 되는 것 같다. 1366년 김사렴은 정추, 이존오에 이어 신돈을 탄핵하다가 박해를 당하고, 1368년 김정, 김제안 등은 신돈을 제거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죽음을 당하게 된다. 김제안은 사천김씨로, 김정은 수안김씨로 분적하게 되고, 일설에 김사렴을 해주김씨의 원조로 삼고 있는 것은 바로 이때의 사건으로 인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27세) 1367년 공민왕16
○8촌 김구용(30세), 1367년(공민왕16) 성균관(成均館)이 중영(重營)되자 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후학의 훈화에 노력하여 성리학을 일으키는 선봉이 되었다.
○8촌 김제안(28세쯤), 1367년 익재 이제현이 별세하자 만사를 지었다.
익제이문충공만사(益齊李文忠公挽辭) (김제안)
文章道德獨兼全(문장도덕독겸전) : 문장과 도덕을 홀로 온전히 겸하였고
問禮聞詩二十年(문례문시이십년) : 예를 묻고 시를 듣기 이십 년이었구나
一曲顔回誰解聽(일곡안회수해청) : 한 곡조를 안희 외에 누가 알아 들으리
從今我欲絶琴絃(종금아욕절금현) : 지금부터 나는 거문고 줄을 끊고자 한노라
휴가(休暇) (김제안)
天下紛紛事鬪爭(천하분분사투쟁) : 천하는 어지러이 싸움만 일삼거니
黎民何日見昇平(려민하일견승평) : 백성들은 그 언제나 태평 세월 만나보리
水沈煙裏茅堂靜(수침연리모당정) : 물안개에 잠긴 초가집이 고요하니
時復挑燈憶孔明(시부도등억공명) : 때때로 등불 돋우며 공명을 그리워하네
기무설사(寄無說師) /무설사에게 보냄 (김제안)
세상은 서로 서로 옳다 긇다 다투는데 / 世事紛紛是與非
여러해 더럽힌몸 낸들 어이 씻을손가 / 十年塵土汚人衣
봄바람 부는곳에 꽃지고 새울거늘 / 落花啼鳥春風裏
청산은 어이하여 알고도 모른는듯 / 何處靑山獨掩扉
김제안(金齊顔) 1367년경 代言 仲賢
<시대상황>
○이제현 죽음. 묘지명은 이색이 찬하였다.
지정(至正) 27년 정미(1367) 가을 7월에 --- 익재 선생 이공이 병으로 사제(私第)에서 졸하니 나이 81세였다. 태상(太常)에서 시호를 문충공(文忠公)이라 내리고, 그해 10월에 유사(有司)가 위의를 갖추어 우봉현(牛峯懸) 도리촌(桃李村)의 선영 아래 장사하였으며,
학자로서의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이96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하여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으며,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과 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보아 그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이색(李穡), 1367년 대사성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신유학의 보급과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박상충(朴尙衷), 1367년(공민왕 16)성균관생원의 수를 늘려 100인으로 하고 오경사서재(五經四書齋)를 마련하여 생원을 교수하게 하였는데, 이때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과 함께 경술(經術)의 사(士)로 교관을 겸하게 되었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예조정랑에 이르렀다. 이때 고례(古禮)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을 지어 사전(祀典)을 썼다. 뒤에 전교령(典校令)이 되었는데,
*박상충(朴尙衷) : 1332(충숙왕 복위 1)∼1375(우왕 1). 고려 말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성부(誠夫). 밀직부사 수(秀)의 아들이다.
(28세) 1368년 공민왕17
○8촌 김구용(31세), 1368년 전교부령이 되었다.
○8촌 김제안(29세쯤), 전 밀직부사 김정(金精) 등과 더불어 신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전 홍주목사 정휘(鄭暉)의 고발로 인하여 기밀이 누설되어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히어 국문을 받고 귀양가던 도중에 신돈이 보낸 사람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시대상황>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자, 이인임(李仁任)을 보내어 명나라와 협력하여 요동(遼東)에 남아 있는 원나라의 세력을 공략하였으며,
○김정(金精) : ?∼1368(공민왕 17). 고려 말기의 문신. 좌부대언(左副代言)·좌대언(左代言)·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65년(공민왕 14)에 황원군(黃原君) 최백(崔伯)과 함께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68년 김흥조(金興祖)·조사공(趙思恭)·유사의(兪思義)·김제안(金齊顔)·김구보(金龜寶)·이원림(李元林)·윤희종(尹希宗)·조린(趙璘)·김광재(金光載)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는데, 조사공이 이 사실을 자기와 평소 친히 지내고 있던 홍주목사(洪州牧使) 정운(鄭賱)에게 말하자, 정운은 밀직제학(密直提學) 한천(韓蕆)과 더불어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 이춘부(李春富)에게 밀고하였으며, 이춘부가 궁궐에 들어가 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왕명으로 순군옥(巡軍獄)에 갇힌 뒤 유배되었고, 신돈에 의하여 일당과 더불어 죽음을 당하였다.
○권근(權近), 1368년(공민왕 17)성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급제하여 춘추관검열·성균관직강·예문관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댓글목록
김좌회님의 댓글
![]() |
김좌회 |
---|---|
작성일 |
주회님
익원공 자손으로 부끄럽습니다.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함에도 ............
그러나 글이나 자료정리는 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귀국하시면 익원공 문중에서 감사패라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한가지 부탁을 드린다면 문헌과 출처등 주를 달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김주회님의 댓글
![]() |
김주회 |
---|---|
작성일 |
익원공 연보자료를 간단히 정리하려고 하다가 가족관계와 주변상황을 살피다 보니 범위가 자꾸 넓어지고 있습니다. 일단 익원공 4형제 기록은 모두 적으면서, 특히 가까웠던 척약재 3형제와 이제현, 이색,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 조준 등의 연보를 간단하게나마 함께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척약재 기록은 워낙 방대하고, 특히 <척약재학음집>과 여러 문집을 모두 섭렵해 보아야 정확한 연보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척약재 연보는 다음 기회에 다른 분의 손에 맡기고 간단히 적고 있습니다.
제목에서 보듯이 연보자료이므로 존칭문제나 문맥의 교정 등은 생략하고 있습니다. 정리된 연보를 작성할때 교정하고자 합니다.
솔내대부님! 조선왕조실록에서 익원공과 아들 손자대까지의 기록 검색이 가능하시면 한번 더 도와 주시옵기를 바랍니다.
김은회님의 댓글
![]() |
김은회 |
---|---|
작성일 |
주회 아우님 가족모두 건강하신지요.
그리고 익원공 연보 정리를 하셨네요.
후손으로서 부끄럽고 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