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원공 연보자료 07(29-3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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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1-03 18:07 조회1,445회 댓글3건본문
(29세) 1369년 공민왕18
<시대상황>
(30세) 1370년 공민왕19
○8촌 김구용(33세), 1370년 외조부 閔思平의 문집 <급암집>을 편찬 간행하였다. 현재 보물 제708호로 지정되어 있음.
○민사평처 김씨 별세. 갑인년 9월 19일에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그 해 12월 15일에 고을(여흥) 남방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제민이 이름을 구용(九容)이라 고치고, 그 아들 흥위위 녹사(興威衛錄事) 명선(明善)을 이색에게 보내어 행장에 의하여 명(銘)을 청하여 이색이 묘지명을 찬하였다. 이때 형 김사안(33세쯤)은 밀직부사를 지냈다. <1370년 이색 찬, 처외조모 민사평처김씨(김륜의 딸) 묘지명>
<시대상황>
2년 뒤 1370년 이성계로 하여금 동녕부(東寧府)를 치게 하여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점령, 국위를 떨쳤다.
○정도전(鄭道傳), 1370년에 성균관의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으며,
(31세) 1371년 공민왕20
○8촌 김구용(34세), 1371년 민부의랑 겸성균직강이 되었다.
<시대상황>
○최영(崔瑩), 1371년 신돈이 처형되자 곧 소환되어 다시 찬성사가 되었다.
○정도전(鄭道傳), 이듬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되고 5년간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정공권(鄭公權), 1371년 신돈이 제거된 뒤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다시 발탁되었다.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조준(趙浚), 1371년(공민왕 20)책을 끼고 수덕궁(壽德宮)앞을 지나가자, 왕이 보고 기특히 여겨 마배행수(馬陪行首)에 보하였다.
(32세) 1372년 공민왕21
○8촌 김구용(35세), 1372년 총부의랑이 되고,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중국에 갔다. 전교령에 제수되고, 이듬해 7월 귀국하였다. 이때 중국에 온 정몽주(자 달가)와 교유한 시문이 <척약재학음집>에 실려 있다.
<시대상황>
그뒤 1372년, 명문자제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고,
○정몽주(鄭夢周), 13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파선을 당하여 일행 12인이 익사하고, 정몽주는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출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 등을 거쳐,
(33세) 1373년 공민왕22
<시대상황>
○최영(崔瑩), 1373년 육도도순찰사(六道都巡察使)가 되었는데, 이때 군호(軍戶)를 편적(編籍)하여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고 또 나이 70세 이상이 되는 자로부터 쌀을 거두어 군수(軍需)에 보충함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다.
○이색(李穡),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하여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34세) 1374년 공민왕24 우왕원년
<시대상황>
○최영(崔瑩), 이듬해 경상·전라·양광도도순문사가 되었는데, 이때 육도도순찰사가 되어 6도를 소동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대사헌 김속명(金續命) 등의 탄핵을 받았으나, 도리어 김속명이 파면되고 진충분의선위좌명정란공신(盡忠奮義宣威佐命定亂功臣)의 호가 하사되었다.
그해 명나라가 요구하는 제주도의 말 2,000필에 대하여 제주도의 호목(胡牧)이 300필만 보내옴으로써 제주도를 치기로 되었는데, 이때 양광·전라·경상도도통사(楊廣全羅慶尙道都統使)가 되어 도병마사 염흥방(廉興邦)과 함께 전함 314척과 군사 2만 5600명으로 제주도를 쳐서 평정하였다.
○우왕(禑王) 즉위
1365(공민왕 14)∼1389(공양왕 1)
고려의 제32대왕
재위 1374∼1388
본관은 개성
어릴 때의 이름은 모니노(牟尼奴)이며, 신돈(辛旽)의 시비(侍婢)인 반야(般若)의 소생으로 전해진다.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실각하자 당시 후사가 없던 공민왕이 근신(近臣)에게 자기가 전에 신돈의 집에 행차하여 그의 시비와 상관해서 아들을 낳은 바 있음을 밝힘으로써 공민왕의 아들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뒤 신돈이 주살된 직후에 궁중에 들어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하여졌으며, 백문보(白文寶)·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를 사부로 삼아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는 궁인 한씨(韓氏)의 소생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1374년에 공민왕이 시해되자, 이인임(李仁任)·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서 옹립되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초부터 북원(北元)이나 명나라와의 복잡한 외교문제가 계속 발생하였고, 더욱이 왜구의 침탈이 극심하여 매우 불안정한 정세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인임과 최영(崔瑩)이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가운데 정사를 돌보지 않고 환관 또는 악소배(惡少輩)들과 사냥이나 유희를 일삼았다.
댓글목록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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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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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익원공 후손으로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한층더 가을이 깊어가고 있어요.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이 한켠에서 뭉클 뭉클
일어나고 있네요.
타국에서 가을은 더 쓸쓸하겠지요
행복하고 아름다운 추억 많이 쌓으시기 바랍니다.
솔내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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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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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0년 후기의ㅣ 역사가 정리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안김의 역사가 포함되어서요..
어려운 작업인데 노력에 감사드립니디.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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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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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역작을 잘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