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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 (10)우리 집과 내 어릴 적(8) - 청계동 안 진사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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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1-05 09:27 조회1,635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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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과 내 어릴 적(8) - 청계동 안 진사의 집으로

이종선은 함경도 정평 사람으로서 장사차로 황해도에 와서 살던 사람이다. 총사냥을 잘하고 비록 무식하나 사람을 거느리는 재주가 있으므로 내가 그를 화포령장(火砲領將)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종선을 매장한 나는 패엽사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부상동 정덕현 집으로 갔다. 내게서 그 동안 지낸 일을 들은 정씨는 태연한 태도로,

"이제 형은 할 일 다한 사람이니 편안히 쉬고서 유람이나 떠나자"

하고 내가 이종선의 원수 갚을 말까지도 눌러 버리고 말았다. 이동엽이가 패엽사를 친 것은 제 손으로 저를 친 것과 마찬가지다, 경군과 왜병이 이동엽을 치기를 재촉한 것이라고 하던 정씨의 말이 그대로 맞아서 정씨와 내가 몽금포 근처에 숨어 있는 동안에 이동엽을 잡혀가서 사형을 당하였다. 구월산의 내 군사와 이동엽의 군사가 소탕되니 황해도의 동학당은 전멸이 된 셈이었다.

몽금포 근동에서 석 달을 숨어 있다가 나는 정씨와 작반(作伴)하여 텃골에 부모를 찾아뵈옵고 정씨의 의견을 좇아 청계동 안 진사를 찾아 몸을 의탁하기로 하였다. 나는 패군지장으로 일찍 적군이던 안 진사의 밑에 들어가 포로의 대우를 받을 것을 불쾌히 생각하였으나 정씨는 안 진사의 위인이 그렇지 아니하여 심히 인재를 사랑한다는 말과 전에 안 진사가 밀사를 보낸 것도 이런 경우를 당하면 자기에게 오라는 듯이라고 역설하므로 나는 그 말대로 한 것이었다.

텃골 본향에서 부모님을 뵈온 이튿날 정씨와 나는 곧 천봉산(千峰山)을 넘어 청계동에 다다랐다. 청계동은 사면이 험준하고 수려한 봉란으로 에워 있고 동네에는 띄엄띄엄 40, 50호의 인가가 있으며, 동구 앞으로 한 줄기 개울이 흐르고 그곳 바위 위에는 '청계동천(淸溪洞天)'이라는 안 진사의 자필 각자가 있었다. 동구를 막는 듯이 작은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그 위에는 '포대'가 있고 길어귀에 파수병이 있어서 우리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명함을 드리고 얼마 있노라니 의려장(義旅長)의 허가가 있다 하여 한 군사가 우리를 안내하여 의려소인 안 진사 댁으로 갔다. 문전에는 연당이 있고, 그 가운데는 작은 정자가 있는데 이것은 안 진사 6 형제가 평일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곳이라고 한다. 대청 벽상에는 의려소 석 자를 횡액으로 써 붙였다. 안 진사는 우리를 정청에 영접하여 수인사를 한 후에 제일 첫 말이,

"김 석사가 패엽사에서 위험을 면하신 줄을 알았으나 그 후 사람을 놓아서 수탐하여도 계신 곳을 몰라서 우려하였더니 오늘 이처럼 찾아주시니 감사하외다"

하시고 다시,

"들으니 구경(俱慶) 하라 하시던데 양위 분은 안접하실 곳이 있으시오?"

하고 내 부모에 관한 것을 물으신다.

내가 별로 안접하실 곳이 없는 뜻을 말하였더니 안 진사는 즉시로 오일선(吳日善)에게 총 멘 군사 30명을 맡기며,

"오늘 안으로 텃골로 가서 김 석사 양위를 뫼셔 오되, 근동에 있는 우마를 징벌하여 그 댁 가산 전부를 반이해 오렷다"

하고 영을 내렸다. 이리하여 우리 집이 청계동에 우접하게 되니 내가 스무 살 되던 을미년 2월 일이었다.

내가 청계동에 머문 것은 불과 4,5 삭이지마는 이 동안은 내게는 심히 중요한 시기였다. 그것은 첫째로는 내가 안 진사과 같은 큰 인격에 접한 것이요, 둘째로는 고 산림(高山林)과 같은 의기 있는 학자의 훈도를 받게 된 것이었다.

안 진사는 해주 부중에 10여 대나 살아오던 구가의 자제였다. 그 조부 인수(仁壽)가 진해 현감을 지내고는 세상이 차차 어지러워짐을 보고 세상에서 숨을 뜻을 두어 많은 재산을 가난한 일가에게 나누어 주고 약 3백 석 추수하는 재산을 가지고 청계동으로 들어오니 이는 그곳이 산천이 수려함과 족히 피난처가 될 만한 것을 취함이었다. 이때는 장손인 중근이 두 살 적이었다.

안 진사는 과거를 하려고 서울 김종한(金宗漢)의 문객이 되어 다년 유경(留京)하다가 진사가 되고는 벼슬할 뜻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와서 형제 여섯 사람이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고 뜻 있는 벗을 사귀이기로 낙을 삼고 있었다. 안씨 6 형제가 다 문장 재사(文章才士)라 할 만하지마는 그 중에서도 셋째인 안 진사가 눈에 정기가 있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있고, 기상이 뇌락(磊落)하여 비록 조정의 대관이라도 그와 면대하면 자연 경외(敬畏)하는 마음이 일어났다.

내가 보기에는 그는 퍽 소탈하여서 비록 무식한 하류들에게까지도 조금도 교만한 빛이 없이 친절하고 정녕하여서 상류나 하류나 다 그에게 호감을 가졌었다. 얼굴이 매우 청수하나 술이 과하여 코 끝이 붉은 것이 흠이었다. 그는 율을 잘하여서 당시에도 그의 시가 많이 전송되었고, 내게도 그가 득의의 작을 흥 있게 읊어주는 일이 있었다. 그는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를 자필로 써서 벽장문에 붙이고 취흥이 나면 소리를 높여서 그것을 낭독하였다.

그 때에 안 진사의 맏아들 중근은 열 세 살로서 상투를 짜고 있었는데 머리를 자주 수건으로 질끈 동이고 돔방총이라는 짧은 총을 메고 날마다 사냥을 일삼고 있어 보기에도 영기가 발발하고 청계동 군사들 중에 사격술이 제일이어서 짐승이나 새나 그가 겨눈 것은 놓치는 일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그의 계부 태건과 함께 언제나 함께 사냥을 다니고 있었다. 그들이 잡아오는 노루와 고라니로는 군사들을 먹이고 또 진사 6 형제의 주연의 안주를 삼았다. 진사의 둘째 아들 정근(定根)과 셋째 공근(恭根)은 다 붉은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를 땋아 늘인 도련님들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진사는 이 두 아들에게 대하여서는 글을 아니 읽는다고 걱정도 하였으나 중근에 대하여서는 아무 간섭도 아니하는 모양이었다.

고 산림의 이름은 능선(能善)인데 그는 해주 서문 밖 비동에 세거하던 사람으로서 중암 조중교(重菴 趙重敎)의 문인이요, 의암 유인석(柳麟錫)과 동문으로서 해서에서는 행검으로 굴지되는 학자였다. 이도 안 진사의 초청으로 이 청계동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내가 고 산림을 처음 대한 것은 안 진사의 사랑에서여니와 그는 날더러 자기의 사랑방에 놀러 오라는 말을 하므로 나는 크게 감복하여서 이튿날 그의 집에 찾아갔다. 선생은 늙으신 낯에 기쁨을 띠시고 친절하게 나를 영접하시고 아드님 원명(元明)을 불러 나와 상면케 하였다. 원명은 나이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데 자품은 명민한 듯하나 크고 넓음이 그 부친의 뒤를 이을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원명에게는 15, 16세나 된 맏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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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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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 내용, 잘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