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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 (8) 충렬공의 사위 채홍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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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1-07 14:28 조회1,5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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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철(蔡洪哲)
1262(원종 3)∼1340(충혜왕 복위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무민(無悶), 호는 중암거사(中菴居士).
1283년(충렬왕 9) 과거에 급제하여 응선부녹사(膺善府錄事)에 보임되고, 그뒤 다섯 차례 전직하여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로 장흥부(長興府)에 출보되었다가 물러나 14년을 한거(閑居)하며, 불교와 음악·의약 등을 연구하였다.
130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의부정(司醫副正)으로 부름을 받고,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였다.
1314년(충숙왕 1)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5도순방계정사(五道巡訪計定使)에 임명되어 5도의 양전(量田)과 부세(賦稅)의 균정(均定)에 대한 일을 맡아 1년간 재직하면서 민전(民田)을 탈취하는 등 사리를 취하여 일약 거부가 되었다.
이듬해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르고 이어 삼사사(三司事)·찬성사(贊成事)를 차례로 역임하고, 1320년 평강군(平康君)에 피봉(被封)되었다.
그러나 권한공(權漢功) 등과 더불어 당파를 맺고 권력을 휘두른 것이 화근이 되어 1321년 일당과 함께 장류(杖流)되고 집이 적몰당하였는데, 이에 원한을 품고 당시의 미묘한 정세를 틈타 권한공 등과 함께 원나라에 청원서를 올리는 등 심양왕 고(瀋陽王暠)를 왕위에 세우려는 운동을 벌였다.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하자 다시 찬성사로 기용되어 삼중대광(三重大匡) 순천군(順天君)으로 개봉(改封)되고, 순성보익찬화공신(純誠輔翊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문장과 각종 기예에 모두 능하였는데, 특히 의약과 음악에 조예가 깊었고 불교에 심취하였다.
일찍이 자기집 북쪽에 전단원(旃檀園)을 지어 선승(禪僧)을 기거하게 하는 한편 많은 사람들에게 의약과 의술을 베풀었으며, 집 남쪽에는 중화당(中和堂)을 두어 국로(國老) 8인을 맞아 기영회(耆英會)라 칭하였다.
〈자하동신곡 紫霞洞新曲〉이라는 음악을 작곡하였으며, 이곡(李穀)·이제현(李齊賢) 등과도 교유가 있었다.
《동문선》에 〈복주영호루 福州暎湖樓〉 등 시 몇 편이 있고, 저작으로 《중암집 中菴集》이 있다.

 

 

 

충렬공 묘지명 (1300년 이진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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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취 박씨(前娶 朴氏)는 공(公)보다 먼저 돌아가시어 또다시 손씨(孫氏)를 재취(再娶)하여 딸 한 분을 나셨는데 그 따님은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 채의(蔡宜)에게로 출가(出嫁)하였다.

 

고려사

처음에 김방경(金方慶)이 북방 국경 지방을 수비하고 있을 때에 용강(龍岡) 고을 관비(官婢)와 관계하여 한 여식을 낳았던바 채홍철이 그에게 장가들어 채하중(蔡河中), 채하로(蔡河老) 두 아들을 낳았다. 채하중은 따로 전기가 있다.

 

족보에 의하면 사위는 채홍철. 외손자 채하중, 채하로,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충렬공 묘지명에 기록된 채의와 채홍철은  동일인임에 틀림이 없다.

 

 

외손자 채하중

 

채하중(蔡河中)
?∼1357(공민왕 6). 고려 후기의 관인. 본관은 평강(平康). 몽고 이름은 하라티무르(哈刺帖木兒). 홍철(洪哲)의 아들이다.
1319년(충숙왕 6) 호군(護軍)으로 있으면서 조적(曺頔)과 더불어 심양왕 고(瀋陽王暠)에게 아첨하여 나라의 틈을 엿보아 왕위를 빼앗으려고 기회를 노려 참소하다가 왕이 원나라에 가서 머무르게 되고, 국인(國印)을 거두게 되자 1321년 원나라의 사신 김가노(金家奴)와 함께 귀국하여 원제(元帝)가 심양왕 고를 고려왕으로 책봉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호군 이련(李璉)이 돌아와 국왕은 잘 있다고 하므로 재추(宰樞)가 비로소 속은 것을 알았다. 이해 9월 다시 원나라에 가서 심양왕을 시종하였는데, 뒤에 원제가 왕에게 인장을 주어 환국하도록 하니 조적 등과 함께 또 원나라에 머무르고 있는 무뢰배의 자제 2, 000명으로 하여금 연명(連名)하게 하여 성(省)에 글을 올려 왕을 참소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1342년(충혜왕 3) 조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왕을 시종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고, 철권(鐵券)을 하사받았으며, 이듬해 여러 도의 직세(職稅)를 감면하여 줄 것을 청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사공(司空) 강호례(姜好禮), 정당문학(政堂文學) 정을보(鄭乙輔),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김상기(金上琦)·설현고(薛玄固), 밀직제학 장항(張沆) 등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였고 뒤에 평강부원군(平康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354년(공민왕 3) 원나라에 있으면서 다시 재상이 되기를 꾀하고 있는데 마침 원나라가 장사성(張士誠)을 정벌하기 위하여 용사를 구하자, 원나라로부터 환국하여 응원병을 청하니 고려에서는 유탁(柳濯)·염제신(廉悌臣) 등 장수와 병력 2, 000명이 동원되었다.
1356년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가 다음해 승(僧) 달선(達禪)의 반역사건에 연루되어 허위자백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으니, 거리에 내다가 목을 베었다.

 

 


평강채씨

 

 평강 채씨 (平康蔡氏)

 

 1> 시조 :  채송년[蔡松年]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평강(平康)은 강원도 북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부양현 또는 사내현이었는데      통일신라 경덕왕 때 광평으로  고쳐서 부평군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 1018년에 평강으로
     개칭하고 동주(東州)에 예속시켰다.  
 
     
평강채씨(平康蔡氏)의 시조 채송년(蔡松年)
은 1230년 최향의 난이 일어나자,
     병마사로 이를 평정하여 대장군에 올랐고, 그후 금자광록대부로 태사, ·문하시랑 평장사,
     상호군 등을 거쳐 태자 태사에 이르렀다.
     그의 맏아들
정(楨)
이 중서시랑 평장사로 평강군에 봉해졌고,
     둘째
자화(子華)
는 문하시랑 평장사, 상장군, 판이부사 등을 지냈으므로,
     후손들은 본관을 평강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평강채씨는 특히 조선조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는데,
     그중 빼어난 인물은 정승
종린(宗璘)의 7대손 세영(世英)
을 들 수 있다
     세영(世英)은 중종과 명종대에 걸쳐 호조판서, 좌참찬을 역임한 명신으로 일찍이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 사림(士林)들이 화를 입게 되자, 대궐에 들어가
     승지 김근사한테서 사필(史筆)을 빼앗아 들고 임금께 말하기를
     "신은 간신이  아니고 제 소임 밖의 일을 말씀 드리는 것은 죄가 되오나 이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러는 것인지 죄명을 들고자 하나이다."
     하고 말하니 좌우에 있던 관원(官員)들이 모두 겁을 내어 목을 움츠렀다고 한다.

     특히 그는 벼슬에 있는 동안 기묘, 을사의 사화(士禍)로 많은 선비들이 화를 입었으나
     홀로 남아 창안백발(昌顔白髮)이 조정에서 빛났으며, 평소 장중하여 아무도 그를 범하지
     못했다고 하며 학문이 깊었고 천문,의약에는 물론  중국어에까지 통달하여 크게 명성을 날렸다.

     그외 철종때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동건(東健)이 고종때 개성부 안무사를 거쳐
     수군통제사와 형조 판서에 올랐으며,  
동식(東軾)의 아들 광묵(光默)
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홍성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아들
규대(奎大)
와 함께 전사하였다.  

     
영찬(永贊)
은 최익현의 의병에 가담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경남 하동군 화개동에서
     광양 의병장 백낙구(白樂九)와 합세하여 순천을 공격하다가 체포되어 고금도에 유배,
     이듬해  다시 항일전을 전개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여 평강채씨 가문을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평강채씨(平康蔡氏)는 남한에  총 14,326가구,      59,95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충북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

전북 옥구군 성산면 도암리, 고봉리

     함남 홍원군 삼호면 중평리

전북 옥구군 임피면 영창리

     함북 경원군 용덕면 용향동

전북 부안군 주산면 동정리

     함북 경원군 경원면 송천동

전남 보성군 복내면 용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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