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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외갓댁, 고모댁(9)항주고려혜인사대장경희사기(杭州高麗慧因寺大藏經喜捨記)및 이안기(移安記)-원관 시주, 김순(문영공)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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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1-11 15:52 조회1,2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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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
항주고려혜인사대장경희사기(杭州高麗慧因寺大藏經喜捨記)
한림원직학사 조열대부 본국중대광 수첨의정승 우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 판선부사 치사 민(閔)□□ 지음.
중대광 상락군 김순(金恂)이 글씨와 제액(題額)을 씀.

진리의 참된 모습으로 보면 텅 비어 있고 공적(空寂)하여 이름도 없고 형상이 없으며, 본래 중생이 없고 부처님도 없다. 어찌 생겨나고 없어짐, 즐거움과 괴로움이 그 속에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 생명 있는 것들이 참된 것을 저버리고 허망한 것으로 나아가면서 태어나고 죽고 오고 가는 것이 저절로 있게 되고 그로부터 죄와 복이 생겨나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여기에서 나오게 된다. 죄와 복이 생겨남에 다시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있고, 그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이 나오는 것이 사람 몸에 그림자가 따르는 것과 같다. 이에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당 등 여러 윤회의 세상이 뒤섞여 생겨나니 이것이 이른 바 중생이다. 괴로움은 지옥보다 괴로운 것이 없고, 즐거움은 천당보다 즐거운 것이 없다. 그러나 천당의 과보가 다하게 되면 또한 다섯 가지 쇠퇴함[五衰]의 괴로움이 있게되며 자기 업보를 따라 아래세상으로 떨어져 세 가지 나쁜 세상[三途]을 면할 수 없게된다. 그러므로 천당의 즐거움은 자만할 것이 못된다. 그런 가운데에 한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 중생이면서 큰 자비심을 일으키고, 큰 자비심으로 인해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을 내고,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으로 평등하고 올바른 깨달음을 이루니 곧 부처님이시다. 부처님은 평등하고 큰 자비의 마음으로 중생들을 다 같은 아들로 보시지만 중생들은 근기가 같지 않아서 하나의 가르침으로 구제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근기에 맞추려고 하여 3승(三乘)12분교(十二分敎), 8만 4천의 경전 등이 있게 되었으니 세상의 훌륭한 의사가 여러 병자들을 낫게 하기 위하여 천여 가지의 약을 쓰고 만 종류의 처방을 만드는 것과 같다. 일부러 많은 약을 쓰고 처방을 넘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병에 따라 약이 다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처음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가르침을 베푸심에 녹야원(鹿野園)에서 시작하여 쌍수(雙樹) 아래에서 열반하실 때까지 77년 동안 설법하신 법문(法門)이 적지 않게 되었다. 1천 년 뒤에 그 가르침이 동쪽으로 전해지게 되니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금인(金人)을 본 이래로 인도의 범본(梵本 :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불경)이 중국말로 번역된 것이 무려 5천여 권이나 되었다. 경(經)과 율(律)은 모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론(論)은 모두 여러 보살들이 지은 것이니『역경(易經)』에 대하여 십익(十翼)을 지은 것과 같고『춘추(春秋)』에 대하여 삼전(三傳)이 있는 것과 같다. 여러 경전들이 가지고 있는 공덕을 간략하게 들자면 어떤 경전은 그 이름이나 두 구절의 내용을 듣기만 하여도 칠보(七寶)만으로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를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것보다 뛰어나며, 또한 반 구절의 게송만 이해하여도 100 항하사(恒河沙 : 갠지스 강가의 모래의 수)만큼의 중생들을 가르쳐서 아라한과(阿羅漢果 : 진리를 깨달아 열반에 든 성인의 경지)를 얻게 하는 것보다 뛰어나다. 그 중에 밀교(密敎)에서는 그림자가 경전을 읽는 것을 지나가기만 하여도 이익이 있다고 하며 혹은 (경전) 한 글자의 공덕으로 능히 죄를 없애고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며, 계율은 하루만 지켜도 능히 부처의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만일 능히 1권의 경전을 만들고, 한 구절의 뜻을 듣고, 한 글자의 공덕에 의지하고, 하루동안 계율을 지키는 것이 족히 천 번 태어나고 만겁(萬劫)이 지나도 만날 수 없는 큰 행복이 될 것이다. 하물며 대장경을 만들어 해마다 펴서 읽는다면 어찌 앞에서 이야기한 공덕의 만만배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큰 재력을 가진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데, 세상의 부귀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재물을 모음에 만족할 줄 몰라 이익을 추구하는 데에는 열심이지만 착한 일을 하는 데에는 게으르다. (땅이) 네 산에 미치고 다섯 집안의 재산을 합하였다고 하여도 서로 다투고 빼앗은 후에는 어찌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설혹 분양(汾陽)과 같이 부자가 된다고 하여도 도대체 죽은 후에 무슨 이익이 될 것인가. 지금 세상에서 홀로 초연하여 세상을 벗어난 밝은 앎을 가지고 계신 분은 오직 우리 퇴옹(退翁) 원(元) 상공이 계실 뿐이다. 상공은 벌열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과거에 합격하셨고 명예롭고 중요한 관직을 거쳐 재상의 지위에 오르셨다. 관직에서 물러나신 후[急流] 노담(老聃 : 노자(老子)의 이름)의 만족함을 알라는 가르침을 생각하고 좋은 인연을 깊이 믿으며 사령운(謝靈運)이 집에서 승려처럼 지낸 것을 흠모하였다. 일찍이 돌아가신 첨의중찬 안(安)공과 함께 정성스러운 서원을 세워 대장경 1부를 만들어 사명산(四明山 : 중국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 남쪽에 있는 산)에 있는 천동선사(天童禪寺)에 봉안하였는데, 그러고도 아쉬움이 있어 이제 다시 비용을 계산한 후 재산을 모두 들여 대장경 1부를 찍어 대각국사(大覺國師)께서 세우신 도량에 봉안한다. 땅이 뛰어나고 사람이 훌륭하며 법보(法寶 : 대장경을 가리킴)가 갖추어져 있다고 하여도 만일 매년 이를 펼쳐 읽어서 그 행복과 이익을 불러오지 않는다면 좋은 밭을 많이 사고 좋은 씨앗을 멀리서 구하고서도 밭을 갈 줄 모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에 매년 대장경을 읽을 수 있는 비용을 아울러 희사하니 훌륭하고 전에 없던 일이다. 바라는 바는 오직 황제폐하의 성수(聖壽)가 만만세(萬萬歲)에 이르고 황태후께서 억년 만년 사시며, 심왕(瀋王 : 충선왕을 가리킴)과 국왕(당시의 고려국왕인 충숙왕을 가리킴)께서도 각기 오래 사시고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극락에 피어있는) 보배 연꽃에 오르시는 것, 그리고 사생(四生)육도(六道)의 모든 생명 있는 존재들이 모두 혜택을 입어 함께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크도다, 그 마음이여. 만든 대법보장(大法寶藏)을 이 땅(고려를 가리킴)에 두지 않고 저 곳(중국을 가리킴)에 봉안하는 것은 자기와 남,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커다란 공덕을 짓고서 먼저 임금님과 부모님께 바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과 효성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비록 자신의 이익을 뒤로 돌린다고 하여도 복록(福祿)이 어찌 공에게 우선하여 오지 않겠는가. 나머지 공덕이 있어 자손에게도 또한 나머지 경사가 있을 것이다. 나는 일찍이 공과 같이 과거에 합격하여 일찍부터 서로 잘 알고 있는데 공이 직접 글을 써주기를 부탁함에 나는 늙고 병들어서 할 수 없다고 굳게 사양하였다. 하지만 거듭하여 부탁하므로 할 수 없이 보고 알게 된 것을 거칠게 쓰는 바이다.

연우(延祐) 원년(충숙왕 1, 1314 ) 2월 일

공덕주(功德主)는 대광 첨의찬성사 판총부사 치사(大匡 僉議贊成事 判總部事 致仕) 원관(元瓘)이고, 성해자조명종대사(性海慈照明宗大師) 화엄종주(華嚴宗主)로 항주로 고려혜인교사(杭州路 高麗惠因敎寺) 주지인 승려 혜복(慧福)이 비를 세움.

 

 

 

고려국대장이안기(高麗國大藏移安記)

선수 조열대부 한림학사(宣授 朝列大夫 翰林學士) 겸본국 광정대부 자의도첨의사사사 연영전대학사 동제수사 판문한서사(兼本國 匡靖大夫 咨議都僉議使司 延英殿大學士 同提修史 判文翰署事) 민지(閔漬)지음.
옛날에 감저씨(甘庶氏 : 석가를 가리킴)가 처음 정각(正覺)을 이루고 두루 살펴보니 모든 중생들이 다 같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지만 망상에 집착하여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큰 자비심을 일으켜 부처의 지견(知見)으로 (이러한 사실을) 보이고 (중생들이)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중생들의) 근기가 크게 차이나서 하나의 가르침으로 제도할 수가 없었으므로 넓고 큰 혀를 내어 여러 가지의 가르침을 베풀었다. 49년 동안의 말하지 않은 말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가득 차니 모두 다 병에 맞춘 묘약이 아님이 없었다. 이로서 경전[經]과 계율[律]이 있게 되고, 현교(顯敎)와 밀교(密敎)가 있어, 나누면 다섯 가지 가르침이 되고 합하면 하나의 가르침이 되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심에 미쳐서 여러 성인들이 이어서 출현하여 (경전의) 깊은 뜻을 드러내고 글로 지어 논서[論]들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삼장(三藏 : 경(經), 율(律), 론(論) 등 불교의 세 가지 종류의 문헌들을 총괄하여 이르는 말)이 한(漢)나라 명제(明帝) 이후로 동쪽 중국에 전해졌으니 여러 가지 전기(傳記)들과 합하여 무려 6천여 축(軸 : 두루마리)이며 이것이 이른 바 대장경(大藏經)이다. 용궁(龍宮)에 소장되어 있는 것에 비한다면 수미산 중의 티끌 하나와 같고 큰 바다의 한 방울 물에 불과할 뿐이다. 불교의 전승에서는 바닷 속 용궁(龍宮)에 수 많은 경전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 세상에 전하는 불경은 그 중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가르침이 모두 갖추어져 있고 바람이 모두 이루어지며, 모든 인간세계 및 하늘세계의 부귀와 크고 작은 열반 등이 모두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삼계(三界 :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총칭하는 것으로 모든 존재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포괄한다)의 커다란 보물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이것보다 큰 것은 없을 것이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오로지 불법의 힘에 의지하여 나라를 열고 대통을 세웠으며 역대의 왕들도 모두 전대의 모범을 열심히 본받아서 오늘의 훌륭함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대장경을 베껴서 만든 것으로는 금으로 쓴[금자(金字)] 대장경, 은으로 쓴[은자(銀字)] 대장경, 먹으로 쓴[묵자(墨字)] 대장경 등이 있으며, 인쇄하여 만든 것으로는 요나라[요본(遼本)] 대장경, 송나라[송본(宋本)] 대장경, 우리나라[향본(鄕本)] 대장경 등이 있다. 우리나라 대장경은 현재 유행하는 판으로서 내외의 이름난 절에는 없는 곳이 없다.
남악(南嶽)의 철산(鐵山)화상은 해동의 산수가 뛰어남을 충분히 들으시고 한번 둘러보려고 생각하시었으며, 우리나라의 승려와 속인들이 그 높은 풍모를 우러러 보려고 생각한 것도 여러 해 되었다. 지난 번 대덕(大德 : 원(元)나라 성종(成宗)의 연호, 1297~1307년까지 사용) 8년 갑진년(충렬왕 30, 1304) 가을에 여러 공들의 요청을 받아서 배를 타고 오시니 온 나라사람들이 모두 마치 부처님을 보는 듯 존숭하였다. 스님이 머무시는 곳에는 수레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각기 자신의 근기에 따라서 모두 큰 은혜를 입었다. 만일 옛 부처님이 임시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이 아니라면 누가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스님이 돌아다니며 교화하시던 중에 강화도 보문사(普門社)에 이르셔서 대장경 3질을 보고 그 유래를 물어보니 두 질은 옛날의 임금과 신하가 안치한 것이고 한 질은 현재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군부판서 상호군(奉翊大夫 知密直司事 軍簿判書 上護軍)인 허평(許評)과 서원군부인(瑞原郡夫人)인 염(廉)씨 요인(了因)이 바친 것이었다. 스님이 크게 탄식하면서 “옛날의 뜻은 빼앗을 수 없지만 지금의 뜻은 혹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비유컨대 100 척(尺) 깊이의 우물을 팠는데 굳게 닫아 두고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지 않는다면 우물에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또 여의주를 얻었는데 깊이 감추어 두고서 이용하지 않는다면 구슬에 무슨 덕이 있겠는가. 지금 이 대장경은 비록 때로 펼쳐보기는 하지만 널리 읽히지 못하는 듯하니 닫힌 우물이나 감추어둔 구슬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저 (중국) 강서(江西) 지방의 의춘현(宜春縣) 대앙산(大仰山)의 개산조(開山祖 : 산문(山門)을 처음 개창한 조사)는 작은 석가모니라고 하는데, 옛날에 인도 승려가 와서 조사에게 예를 갖추고서 ‘내가 동쪽에 와서 문수보살에게 예를 갖추려 하였는데 도리어 작은 석가모니를 보게되었다’ 고 말한 것에서 그러한 이름을 얻게 되었다. 조사께서 일찍이 예언하시기를 ‘이 산에서 1기(紀 : 12년)를 주석하는 사람은 곧 내가 다시 온 것이다’ 고 하였는데 설암(雪嵓) 흠공(欽公)께서 1기(紀) 이상 주석하였으니 과연 그 지혜로운 예언에 부합되었다. 내가 일찍이 나의 일로 찾아 뵈었을 때 가르침을 보여주셨고 또 ‘모인 구름을 들어내니 봉우리 위에 달이 있고(拈起集雲峰上月), 사람 앞에 던져 놓으니 백가지 꽃의 공이다(人前抛作百花毬)’ 라는 게송을 제시해 주셨다. 지금은 비록 고인이 되셨지만 살아 계신 것처럼 생각난다. 지금 주석하고 있는 사람도 또한 흠공의 제자로서 땅이 신령하고 경치가 뛰어나며 대대로 훌륭한 사람이 없지 않다. 다만 절이 화재[회록(回祿) : 불의 신으로 화재를 의미한다]를 당하여 법보(法寶 : 불경을 가리킴)에 누락된 것이 있다. 만일 이 곳의 것을 하나 덜어서 저 곳의 누락된 것을 보충하여 준다면 어찌 여덜 갈래의 큰 길에서 우물을 열어 놓고, 여의주를 전륜성왕의 손에 두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였다. 허(許)공이 듣고서 큰 가르침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면서 해를 가리키며 장차 돌아가시는 배에 실어 보내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리고는) 이 일을 저 산과 같이 영원토록 전하고자 하여 나에게 글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가 재주가 없고 또 병이 있다고 사양하자 이어서 화상이 글을 부탁하는데 말씀과 뜻이 간절하였다. 나는 스님의 계향(戒香)을 하루동안 쐰 적이 있으므로 할 수 없이 병을 참으며 붓을 쥐고 겨우 그 일을 드러낸다. 아아! 보문사는 큰 허공 속의 작은 티끌 한 점일 뿐인데 여기에 소장된 법보(法寶)는 대천세계 만큼의 경전들이다. 지혜의 눈으로 밝게 보아 티끌을 깨뜨리고 경전을 꺼내지 않았다면 허(許)공의 아홉 길이나 되는 공덕이 저 산의 한 보물의 빠짐을 메울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저 대앙산은 석가께서 다시 오신 땅이라고 일컬어지며 또한 중국의 신령스러운 산이다. 우리 스님은 설암 스님의 적통 제자로서 또한 석가여래의 큰아들이다. 그 말로 말미암아 이 경전을 그 땅으로 옮기게 되니 영취산에서의 모임이 오늘에 다시 이루어 진 것이다. 그 이익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진실로 이와 같으니 허(許)공이 얻을 뛰어난 공덕을 어찌 또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비록 보고들은 사람들도 또한 기뻐할 것이다.
대덕(大德) 10년 병오년(충렬왕 32, 1306) 9월 일 적음.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판비서시사 문한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判秘書寺事 文翰學士) 김순(金恂)이 씀
봉익대부 밀직사부사 국학대사성 숭문관학사(奉翊大夫 密直司副使 國學大司成 崇文館學士) 윤보(尹珤)가 전액(篆額)을 씀
고려국 금강산 성불난야 호송대장경 백실사문(高麗國 金剛山 成佛蘭若 護送大藏經 白室沙門) 석(釋) 일목(一牧)이 돌을 세움
선수 강서도 원주로 의춘현 대앙산 당대주지(宣授 江潟 袁州路 宜春縣 大仰山 當代住持) 전법허곡대선사(傳法虛谷大禪師) 희릉(希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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