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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9) 충숙공 김승용 배위 원주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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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1-11 15:35 조회2,0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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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숙공(김승용)께서는 원관의 첫째부인 (전리판서곽여필의 따님) 의 따님을 맞이하여 아드님(김후)를 두시었다

원주원씨 할머님이 먼저 돌아가시고 후배 대호군 박영건의 따님과 혼인하셨으나 후손은 없다.

 

장인이신 원관은  초명은 원정이고 증조는좌사간지제고 원승윤, 조부는 추밀원부사 원진, 어버지는 첨의중찬 문순공 원부,

어머니는 파주염씨 명재상 염신약의 손녀요, 예빈시경 염수장의 장녀이시다.

 

원관은 부인 곽씨가 먼저 돌아가시자 후취로 좌승지 김신의 따님을 맞이하여 아들 상호군 원충, 따님 수군만호 박거실,

여흥민씨 민적, 광산김씨 김광철의 세 따님을 두시었다.

 

 박거실은 우리 족보에 의하면 김승용의 아들 김후의 사위로 되어 있으니 원주원씨와 선후를 모르겠다.

박거실의 4째따님은 익제 이제현의 배위이고  민적은 상락공 김흔의 따님과 초혼하여 민사평을 낳고  민사평의 외동따님의

상락군 김묘외 혼인하여 문온공 김구용, 김제안, 안정공 김구덕을 낳았다.   민적의 초취 영가군부인(김흔의 따님)돌아가시자

원관의 따님을 재취하여 민유, 민변, 민환을 낳았다.  민변의 아들이 민제이고 민제의 따님이 태종비인 원경왕후이다.

김광철은 중찬 김태현의 아들이며  김승용의 사위인 김광재의 형제이다.

 

원관은 불교에도 심취하여 항주에 있는 고려혜인사에 대장경을 희사하였다.

이때 항주고려혜인사대장경희사기(杭州高麗慧因寺大藏經喜捨記)와고려국대장이안기(高麗國大藏移安記)

글씨는 문영공(김순)선조께서 쓰셨다.

 

원관(元瓘)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충선왕 때의 재상. 원관(元灌)으로 쓰기도 한다. 본관은 원주(原州). 초명은 정(貞).
아버지는 충렬왕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부(傅)이고, 동생이 충렬왕 때 응방(鷹坊)을 관장하였던 경(卿)이며, 아들은 충숙왕 때

첨의찬성사에 오른 충(忠)이다. 세번 장가들었는데, 장인은 홍녹도(洪祿道)·곽세필(郭世弼)·김신(金信)이다.
1266년(원종 7)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279년(충렬왕 5)에는 독로화(禿魯花)로서 원에 보내졌다.
그뒤 고려에 돌아와 1287년 판비서시사(判祕書寺事)·보문각학사를 역임하였고, 다음해에는 전법판서로 있다가 환관(宦官)과 내료(內僚)들에 의해서 파직되었다.
뒤에 복직되어 재추의 반열에 올랐으며, 1298년 충렬왕이 복위한 직후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판도판서에 임명되었고, 1309년(충선왕 1)에는 밀직사가 되었다. 벼슬이 첨의찬성사에 이르렀다

 

원부(元傅)
?∼1287(충렬왕 13). 고려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삼한공신(三韓功臣) 극유(克猷)의 9대손이며, 아버지는 진(瑨)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사관(直史館)에 보직되고, 1269년(원종 10) 추밀원부사가 되어 이듬해 세자 심(諶)이 원나라에 갈 때 동행하였다.
1273년에는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가 되었다. 충렬왕초에 찬성사·판군부사사(判軍簿司事) 등을 지내고, 1277년(충렬왕 3)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유경(柳璥)·김구(金坵) 등과 함께 《고종실록》 찬수의 명을 받았다.
전추밀부사(前樞密副使) 임목(任睦)이 사고(史藁)를 보니 공지(空紙)이므로 수찬관(修撰官) 주열(朱悅)이 탄핵하려 하자, 그는 유경과 의논하여 저지하고 발설하지 못하게 하였다. 사고가 백지인 것은 그가 직사관으로 있으면서 사고를 제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78년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행차하는 데 종행하였고, 1284년 감수국사(監修國史)로서 《고금록 古今錄》 편찬에 참여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죽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곽여필(郭汝弼)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문신.
원종 때 좌정언(左正言)·비서감·중서사인(中書舍人)·전중감·간의대부를 지내면서 전후 일곱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충렬왕초에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을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1279년(충렬왕 5)에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진사 33인과 명경 2인을 뽑았다. 그해 전란 때문에 생긴 유망민(流亡民)을 불러모으기 위하여 계점사(計點使)가 되어 전라도에 나갔다가 내고(內庫)의 처간(處干:佃戶)을 부역시키지 말라는 왕명을 어긴 죄로 이듬해 파면되었다.

 

민적(閔頔)
1269(원종 10)∼1335(충숙왕 복위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낙전(樂全).
찬성사 종유(宗儒)의 아들이며, 이모부인 재상 김군(金頵)의 집에 양육되었다.
풍채가 수려하였으며, 10세에 절에 나아가 글을 배웠는데 총명하여 글을 배우면 곧 그 뜻을 통하였다고 한다. 충렬왕이 이 소문을 듣고 불러서 국선(國仙)이라 부르게 하였다.
이후 과거에 급제하여 동궁(東宮)의 요속(僚屬)이 되고, 첨의주서(僉議注書), 비서랑(祕書郎)을 거쳐 군부정랑(軍簿正郎)에 이르렀고, 판도정랑(版圖正郎)에 이르러 세자궁문랑(世子宮門郎)을 겸하였다.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비서소윤(祕書小尹)이 되었으나, 이후 충렬왕이 복위하자 면직되어 충선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4년간 머물렀다가 돌아와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었다.
1308년 다시 충선왕이 복위하자 전의부령(典儀副令)이 되고, 이어 선부의랑지제교(選部議郎知製敎)가 되었다가 밀직승지 겸 사헌집의로 승진하였다. 이어 평양윤(平壤尹)이 되었으나 얼마 뒤 파직되고, 4년간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나 녹봉은 전과 같이 받았다.
1313년 충숙왕이 즉위하자 선부전서 보문각제학(選部典書寶文閣提學)을 제수받았고, 다음해 밀직부사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대사헌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온 뒤 여흥군(驪興君)에 봉하여졌다. 충혜왕 때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密直司事進賢館大提學知春秋館事)를 제수받았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김광철(金光轍)1
?∼1349(충정왕 1). 고려의 문신. 본관은 광산. 호는 둔재(鈍齋).
아버지는 중찬(中贊) 태현(台鉉)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1344년(충목왕 즉위년) 6월에 서연(書筵)이 베풀어지자 지신사(知申事)로 시독(侍讀)하였고, 1347년 2월에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자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서 판사가 되어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였다.
그뒤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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