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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13)기구한 젊은 때(2) - 만주의 동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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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1-17 14:36 조회1,5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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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젊은 때(2) - 만주의 동포들

마울산에서 서북으로 노인치(老人峙)라는 영을 넘고 또 넘어 서대령으로 가는 길에서 우리는 백 리에 두어 사람이나 우리 동포를 만났는데, 대부분 금점꾼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더러 백두산 가는 것이 향마적 때문에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하므로 우리는 유감이나마 백두산 참배를 중지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방향을 돌려 만주 구경이나 하리라 하고 통화(通化)로 갔다.

통화는 압록강 연변의 다른 현성과 마찬가지로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서 관사의 성루의 서까래가 아직도 흰 빛을 잃지 아니하였다. 성내에 인가가 모두 5백 호라는데, 그 중에는 우리 나라 사람이 한 집 있었다. 남자는 변발을 하여서 중국 사람의 모양을 하고 현청의 통사로 있다는데, 그의 처자들은 우리 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서 10리쯤 가서 심 생원이라는 동포가 산다 하기로 일부러 찾아갔더니, 정신없이 아편만 먹는 사람이었다.

만주로 돌아다니는 중에 가장 미운 것은 호통사였다. 몇 마디 한어(漢語)를 배워 가지고는 불쌍한 동포의 등을 긁고 피를 빨아먹는 것이었다. 우리 동포들은 갑오년 난리를 피하여 생소한 이 땅에 건너와서 중국 사람이 살 수가 없어서 내버린 험한 산골을 택하여 화전을 일구어서 조나 강냉이를 지어 근근히 연명하고 있었다. 호통사라는 놈들은 중국 사람들에게 붙어서 무리한 핑계를 만들어 가지고 혹은 동포의 전곡을 빼앗고, 혹은 부녀의 정조를 유린하는 것이었다.

한 곳에를 가노라니 어떤 중국인의 집에 한복을 한 처녀가 있기에 이웃 사람에게 물어본 즉, 그 역시 호통사의 농간으로 그 부모의 빚 값으로 중국인의 집에 끌려온 것이라고 하였다. 관전(寬甸), 임강(臨江), 환인(桓仁) 어디를 가도 호통사의 폐해는 마찬가지였다.

어디서나 토지는 비옥하여서 한 사람이 지으면 열 사람이 먹을 만하다. 오직 귀한 것은 소금이어서 이것은 의주로부터 배로 물을 거슬러 올라와서 사람의 등으로 져 나르는 것이라 한다. 동네들의 인심은 참으로 순후하여 본국 사람이 오면 '앞대나그네'가 왔다 하여 혈속과 같이 반가와하고, 집집이 다투어서 맛있는 것을 대접하려고 애를 쓰고 남녀노소가 모여와서 본국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졸랐다.

그들의 대개는 일청 전쟁에 피난간 이들이지마는 간혹 본국서 죄를 짓고 도망해 온 사람도 있었다. 그 중에는 민요에 장두가 되었던 호걸도 있고, 공금을 흠포한 관속도 있었다.

집안(輯安)의 광개토대왕비는 아직 몰랐던 때라 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어니와, 관전의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본 것이 기뻤다. '삼국충신임경업지비(三國忠臣林慶業之碑)'라고 비면에 새겨 있는데, 이 지방 중국 사람들은 병이 나면 이 비각에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있다고 한다.

이 지방으로 방랑하는 동안에 김이언(金利彦)이란 사람이 청국의 도움을 받아서 일본에 반항할 의병을 꾸미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이언은 벽동 사람으로서 기운이 있고 글도 잘하여 심양 자사(瀋陽刺史)에게서 말 한 필과 '삼국지' 한 벌을 상급으로 받았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에게도 대접을 받는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을 찾아보기로 작정하고, 먼저 그 인물이 참으로 지사인가 협잡꾼이나 아닌가를 염탐하기 위하여 김형진을 먼저 떠나보내고 나는 다른 길로 수소문을 하면서 뒤따라가기로 하였다.

하루는 압록강을 앞으로 한 백 리나 격한 노중(路中)에서 궁둥이에 관인을 찍은 말을 타고 오는 젊은 청국 장교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머리에 쓴 마라기 - 청국 군인의 모자 - 에는 옥로(玉鷺)가 빛나고 붉은 솔이 너풀거렸다. 나는 중국말을 모르므로 내가 여행하는 취지를 적은 글을 만들어서 품에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 장교에게 내어 보였다. 그는 내가 주는 글을 읽더니 다 읽기도 전에 소리를 내어서 울었다. 내가 놀라서 그가 우는 까닭을 물으니 그는 내 글 중에,

'왜적과 더불어 평생을 같이 할 수 없음을 통탄한다
(痛彼倭敵與我不共戴天之讐)'

라는 구절을 가리키며 다시 나를 붙들고 울었다. 나는 필담을 하려고 필통을 꺼내었더니, 그가 먼저 붓을 들어서 왜(倭)가 어찌하여 그대의 원수냐고 도리어 내게 묻는다. 나는 일본이 임진으로부터 세세에 원수일 뿐만 아니라, 지난달에 왜가 우리 국모(國母)를 불살라 죽였다고 쓰고, 다음에 그대야말로 무슨 연유로 내 글을 보고 이대도록 통곡하는가 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을 듣건대, 그는 작년 평양 싸움에 전망한 청국 장수, 서옥생(徐玉生)의 아들로서 강계 관찰사에게 그 부친의 시체를 찾아주기를 청하였던 바 찾았다 하기로 와 본즉 그것은 아버지의 시체가 아니므로 허행(虛行)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나는 평양 보통문 밖에 '서옥생전사지지(徐玉生戰死之地)'라는 목패를 보았다는 말을 하였다. 그의 집은 금주(錦州)요, 집에는 1천 5백 명 군사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아버지 옥생이 그 중에서 천 명을 데리고 출정하여서 전멸하였고, 지금 집에는 5백 명이 남아 있으며, 재산은 넉넉하고 자기의 나이는 서른 살이요, 아내는 몇 살이며, 아들이 몇, 딸이 몇이라고 자세히 가르쳐 준 뒤에 내 나이를 물어, 내가 그보다 연하인 것을 알고는 그는 나를 아우라고 부를 터이니 그를 형이라고 부르라 하여 피차에 형제의 의를 맺기를 청하고 우리 서로 같은 원수를 가졌으니 함께 살면서 시기를 기다리자 하여 나더러 그와 같이 금주로 가기를 청하고, 내가 대답도 할 사이 없이 내 등에 진 짐을 벗겨 말에게 달아매고 나를 붙들어 말 안장에 올려놓고 자기는 걸어서 뒤를 따랐다.

나는 얼마를 가며 곰곰이 생각하였다. 기회는 썩 좋은 기회였다. 내가 원래 이 길을 떠난 것이 중국의 인사들과 교의를 맺자는 것이었는데, 이제 서씨와 같은 명가와 인연을 맺는 것은 고소원(固所願)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김형진에게 알릴 길이 없는 것이었다. 만일 김형진과만 같이 있었던들 나는 이때에 서를 따라 갔을 것이다.

나는 근 1년이나 집을 떠나 있어 부모님 안부도 모르고 또 서울 형편도 못 들었으니, 이 길로 본국에 돌아가 근친도 하고, 나라 일이 되어가는 양도 알아본 뒤에 금주로 형을 따라 갈 것을 말하고 결연하게 그와 서로 작별하였다.

나는 참빗장수의 행세로 이 집, 저 집에서 김이언의 일을 물어가며 서와 작별한 지 5,6일 만에 김이언의 근거지 삼도구(三道溝)에 다다랐다.

김이언은 당년 50여 세에 심양에서 5백 근 되는 대포를 앉아서 두 손으로 들었다 놓았다 할만큼 기운이 있는 사람이다. 내가 보기에 용기가 부족한 것 같고, 또 자신이 과하여 남의 의사를 용납하는 도량이 없는 것 같았다. 도리의 그의 동지인, 초산에서 이방을 지냈다는 김규현(金奎鉉)이란 사람이 의리도 있고 책략도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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