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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댁, 고모댁(10) 양간공(김승택)배위 낙랑군부인 경주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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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1-18 14:25 조회1,700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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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서공(김선)의 둘째 아드님이신 양간공(金承澤)께서는 계림부원군 충선공 金琿(의 따님(낙랑군부인)에게 장가드셨다.

김혼은 文莊公 김태서(金台瑞)의 손자이며 추밀원부사 김경손((金慶孫)의 아들이다.

낙랑군부인(김혼의 따님)의 어머니는 侍中을 지낸 翼戴公 언양김씨 金佺의 따님이다.

 

김전의 아버지는 김취려이며 부인은 최유청의 증손녀이며 최선의 손녀, 최종재의 따님이다.

김전의 아들은 김변이며,딸은 경주김씨 金琿에게 시집갔다.

 

김변은 許珙의 딸과 혼인하여 金倫을 낳았고 김륜은 대유학자 문헌공 최충의 후손인 봉익대보 문한학사 최서의 딸과

혼인하여 딸을 낳으니 이분이 바로 문온공 급암 민사평의 배위이시다. 

민사평의 어머니(영가군부인)는 김흔(상락공 습봉-충렬공의 아들)따님이며 아버지는 민적이다.

 

민적은 영가군부인 김씨가 딸 하나를 낳고 돌아가시자 후취로 원주원씨 원구의 따님을 맞이하여 민변을 낳았으니

민변의 아들이 민제- 민제의 딸이태종 이방원의 부인인 원경왕후이다.


민사평과 언양군부인(김륜의 따님) 사이에서 외동딸을 낳아 상락군 김묘(양간공 김승택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니

김묘의 아들이 문온공 파조 척약재 金九容, 내서사인공 金齊顔, 안정공 파조 金九德이며 딸은 9명이나 된다.

 

이렇게 당시에는 경주김씨, 언양김씨, 철원최씨, 여흥민씨등  우리집안과는 이러저리 혼맥이 얽혀있다

 

김혼(金琿)
1239(고종 26)∼1311(충선왕 3).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경주. 아버지는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경손(慶孫)이다.
1256년(고종 43) 석릉직(碩陵直:희종의 능지기)이 되어 내시에 적을 두었으며, 감찰사를 거쳐 충렬왕 때 경순왕후(敬順王后)의 종제라 하여 총애를 받아 대장군이 되었다.
1280년(충렬왕 6) 친교가 있던 상장군 김문비(金文庇)가 죽고 마침 자기 처도 죽자 김문비의 처와 간통하여 감찰사와 중방의 탄핵을 받고 외딴 섬으로 귀양갔다.
그뒤 풀려나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와 첨의참리(僉議參理)를 지내고, 1297년 시랑찬성사판판도사사(侍郎贊成事判版圖司事), 다음해 첨의중찬(僉議中贊) 등을 역임하였다.
1302년 첨의시랑 찬성사(僉議侍郎贊成事)로 임명되고, 다음해 시랑찬성사 판군부사사(侍郎贊成事判軍簿司事), 1305년 우중찬(右中贊)을 거쳐, 1310년(충선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임명되었다. 충렬왕이 원나라에 가자, 왕을 대신하여서 행성일을 맡아보았다.
그뒤 낙랑군(樂浪君)에 봉해지고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다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성품이 너그럽고 예에 익숙하여 원나라에서 연회를 할 때 단정히 홀(笏)을 잡고 앉아서 행주(行酒)하는 사람이 이르면 일어나 읍하고 마시니, 세조가 기뼈하여 말하기를 “이가 진실로 고려의 재상이다.”라고 하였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왕을 청하여 남산 서재에서 향연하였고, 숙비(淑妃)를 잘 섬긴 결과 만년의 봉작이 부원군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김경손(金慶孫)
?∼1251(고종 38). 고려의 장군. 본관은 경주. 초명은 운래(雲來). 평장사(平章事) 태서(台瑞)의 아들이며, 계림부원군 혼(渾)의 아버지이다.
성품이 장엄, 정중하고 온화, 관대하며,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담략(膽略)이 있어 거실에 있을 때도 항상 조삼(皁衫)을 입고 손님을 대하듯 했다 한다. 음관(蔭官)으로 출발하여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다.
1231년 정주(靜州: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 분견장군(分遣將軍)이 되었는데, 그때 몽고군이 정주에 침입하자 힘써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구주(龜州:지금의 평안북도 龜城)에 가서 박서(朴犀)와 합세하여 성을 굳게 지켜 적을 물리쳤다.
1233년 대장군(大將軍)·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다.
1237년 전라도지휘사(全羅道指揮使)가 되어 담양·해양(海陽: 경상남도 泗川郡) 등지를 휩쓸던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형제를 나주에서 무찔러 평정하였다. 이 공으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승진하였는데, 마침 어떤 사람이 그를 최우(崔瑀)에게 무고하였으나 거짓으로 밝혀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전직되었다.
1249년 최항(崔沆)은 그가 인망을 얻고 있는 것을 시기하여 백령도에 귀양보냈다.
1251년 최항이 계모 대씨(大氏)를 죽이고 대씨의 전부(前夫)의 아들 오승적(吳承績)을 죽였는데, 김경손이 오승적의 인척이 된다 하여 사람을 배소에 보내어 바닷속에 던져 죽였다.

 

 

 

 

김태서(金台瑞)
?∼1257(고종 44). 고려 고종 때의 문신. 본관은 경주. 항몽전(抗蒙戰)에서 큰 전공을 세웠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경손(金慶孫)의 아버지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1232년(고종 19) 한림학사가 되고,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에 이르렀다.
재물을 좋아하여 남의 전답을 탈취하여 원성이 높았으나, 아들 약선(若先)이 당시의 권신 최우(崔瑀)의 사위였기 때문에 탄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최항(崔沆)이 집권하면서 1251년 오승적(吳承績)사건에 연루되어 가산을 적몰(籍沒)당하였다.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댓글목록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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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잘 보았습니다. 언제 당시의 혼맥을 도표로 그려 보아야 겠습니다.

김윤식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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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대부님, 연재 감사합니다.
하남 대부님 말씀처럼 혼맥을 그려 보면 훨씬 이해하기 쉽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