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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백범일지 (14)기구한 젊은 때(3) - 강계성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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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1-21 11:47 조회1,82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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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젊은 때(3) - 강계성의 전투

김이언은 제가 창의의 수령이 되어서 초산, 강계, 위원, 벽동 등지의 포수와 강 건너 중국 땅에 사는 동포 중에 사냥총이 있는 사람을 모집하여서 한 3백 명 무장한 군사를 두고 있었다. 창의의 명의로는 국모가 왜적의 손에 죽었으니 국민 전체의 욕이라 참을 수 없다는 것이요, 이 뜻으로 글 잘하는 김규현의 붓으로 격문을 지어서 사방에 산포하였다.

나와 김형진과 두 사람도 참가하기로 하여 나는 초산, 위원 등지에 숨어 다니며 포수를 모으는 일과 강계 성중에 들어가서 화약을 사오는 일을 맡았다. 거사할 시기는 을미년(乙未年) 동짓달 초생 압록강이 얼어붙을 때로 하였다. 군사를 강 얼음 위로 몰아서 강계성을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위원에서 내가 맡은 일을 끝내고, 책원지(策源地)인 삼도구로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을 건너다가 엷은 얼음을 밟아서 두 팔만 얼음 위에 남기고 몸이 온통 강 속에 빠져 버렸다. 나는 솟아오를 길이 없어서 목청껏 사람 살리라고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내 소리를 들은 농민들이 나와서 나를 얼음 구멍에서 꺼내어 인가로 데리고 갔을 때에는 내 의복은 벌써 딱딱한 얼음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마침내 강계성을 습격할 날이 왔다. 우선 고산리(高山鎭)를 쳐 거기 있는 무기를 빼앗아서 무기 없는 군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것이 첫 실책이었다. 나는 고산리를 먼저 치지 말고 곧장 강계성을 엄습하지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고산리를 쳤다는 소문이 들어가면 강계성의 수비가 더욱 엄중할 것이니, 고산리에서 약간의 무기를 더 얻는 것보다는 출기불의(出其不義)로 강계를 덮치는 jt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김규현, 백진사 등 참모도 내 의견에 찬성하였으나, 김이언은 종시 제 고집을 세우고 듣지 아니하였다.

고산리에서 무기를 빼앗은 우리 군사는 이튿날 강계로 진군하여 야반에 독로강(禿魯江) 빙판으로 전군을 몰아 선두가 인풍루(仁風樓)에서 10 리쯤 되는 곳에 다다랐을 때에, 강 남쪽 송림 속에서 화승불이 번쩍번쩍하는 것이 보였다. 그 때에는 모두 화승총이었으므로 군사는 불붙은 화승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송림 속으로부터 강계대 장교 몇이 마주 나와 김이언을 찾아보고 첫말로 묻는 말이 이번에 오는 군사 중에 청병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김이언은 이에 대하여 이번에는 청병은 아니왔다, 그러나 우리가 강계를 점령하였다고 기별하는 대로 오기로 하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정직한 말일는지는 모르거니와 전략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여기에 대하여서도 작전 계획에 김이언은 실수가 있었다. 애초에 나는 우리 중에 몇 사람이 청국 장교로 차리고 선두에 설 것을 주장하였으나, 김이언은 우리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는 이 싸움에 청병의 위력을 가장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 강계성 점령은 당당하게 흰옷을 입은 우리가 할 것이요, 또 강계대의 장교도 이미 내응할 약속이 있으니 염려 없다고 고집하였다.

나는 이에 대하여 강계대의 장교라는 것이 애국심으로 움직이기보다 세력에 쏠릴 것이라 하여 청국 장교로 가장하는 것이 전략상 극히 필요하다고 하였으나, 김이언은 끝까지 듣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랬던 차에 이제 강계대 장교가 머리를 흔들고 돌아가는 것을 보니, 나는 벌써 대세가 틀렸다고 생각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그 장교들이 저의 진지에 돌아갈 때쯤하여 화승불들이 일제히 움직이더니 땅땅 하고 포성이 진동하고 탄알이 빗발같이 이리로 날아왔다. 잔뜩 믿고 마음을 놓고 있던 이편의 천여 명 군마는 얼음판 위에서 대혼란을 일으켜서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달아나기를 시작하고, 벌써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자, 죽는다고 아우성을 하고 우는 자가 여기저기 있었다.

나는 일이 다 틀렸음을 알고, 또 김이언으로 보면 이번에 여기서 패하고는 다시 회복 못할 것으로 보고, 김형진과 함께 슬며시 떨어져서 몸을 피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군사들이 달아나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도리어 강계성에 가까운 쪽으로 피하였다. 인풍루 바로 밑인 동네로 갔더니 어느 집에도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그 중에 큼직한 집으로 갔다.

밖에서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안에 들어가도 사람은 없는데 빈 집에 큰 젯상이 놓이고 그 위에는 갖은 음식이 벌어져 있고, 상 밑에는 술병이 있었다. 우리는 우선 술과 안주를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아버지 대상제를 지내다가 총소리에 놀라서 식구들과 손님들이 모두 산으로 피난하였던 것이라 한다.

우리는 이튿날 강계를 떠나 되넘이 고개를 넘어 수일 만에 신천으로 돌아왔다. 청계동으로 가는 길에 나는 호열자(虎列刺)로 하여서 고 선생의 맏아들 원명의 부처가 구몰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나는 집에도 가기 전에 먼저 고 선생 댁을 찾았더니, 선생은 도리어 태연자약하셨다. 나는 어색하여 말문이 막혔다. 내가 부모님 계신 집으로 가려고 하직을 할 때에 고 선생은 뜻 모를 말씀을 하셨다.

"곧 성례를 하게 하자"

하시는 것이었다. 집에 와서 부모님의 말씀을 듣잡고 비로소 내가 없는 동안에 고 선생의 손녀, 즉 원명의 딸과 나와 약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부모님은 번을 갈아서 약혼이 되던 경로를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

하루는 고 선생이 집에 찾아오셔서 아버지를 보시고, 요새에는 아들도 없고 고적할 터이니 선생의 사랑에 오셔서 담화나 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날 아버지께서 고 선생 댁 사랑에를 가셨더니, 고 선생은 아버지께 내가 어려서 자라던 일을 물으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어려서 공부를 열심으로 하던 일, 해주에 과거보러 갔다가 비관하고 돌아오던 일, 상서(相書)를 보고는 제 상이 좋지 못하다고 낙심하던 일, 상이 좋지 못하니 마음이나 좋은 사람이 된다고 동학에 들어가 도를 닦던 일, 이웃 동네에 사는 강씨와 이씨들은 조상의 뼈를 파는 양반이지만 저는 마음을 닦고 몸으로 행하여 산 양반이 되겠다던 일들이었다.

어머님은 내가 어렸을 때에 강령에서 살 적에 칼을 가지고 그 집 식구들을 모두 찔러 죽인다고 신풍 이 생원 집에 갔다가 칼만 빼앗기고 매만 맞고 돌아왔다는 것, 돈 스무 냥을 허리에 두르고 떡을 사먹으러 가다가 아버지께 되게 매를 맞은 것, 푸른 물감 붉은 물감을 꺼내다가 온통 개천에 풀어놓은 것을 어머니가 단단히 때려주셨다는 것 같은 것이었다.

이랬더니 하루는 고 선생이 아버지께 나와 고 선생의 장손녀와 혼인하면 어떠냐고 말을 내시고, 아버지께서는 문벌로 보거나 덕행으로 보거나, 또 내 외모로 보거나 어찌 감히 선생의 가문을 욕되게 하랴 하여 사양하셨다. 그런즉 고 선생은 아버지를 보시고 내가 못생긴 것을 한탄 말라 하시고, 창수는 범의 상이니 장차 범의 냄새를 피우고 범의 소리를 내어서 천하를 놀라게 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리하여서 내 약혼이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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