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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27) 쓰시다(土田讓亮)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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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4-09 19:11 조회1,788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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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선생님께서 국모를 죽인 원수로 알고 치하포에서 죽인 일본인 쓰시다(土田讓亮)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백범일지에는 일본군 육군중위라고 되어 있는데 일본측 자료에는



일반 상인으로 되어 있지만, 아마도 군 첩보기관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여기에 쓰시다에 관한 자료를 올리니 참고하세요.



일본인 쓰시다의 정체



※ 출처 : 도진순, 1997, 「1895~96년 金九의 聯中 義兵 活動과 치하포사건」



(전략) ... 이제 김창수에 의해 살해된 쓰찌다(土田)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이다.



조선정부측 자료로 알 수 있는 것은 주로 사건 당시의 행적뿐이다. 이에 의하면 그는 평안도



龍岡사람인 林學吉(20세)을 동반하고 黃州에서 仁川으로 오던 중, 黃州 十二浦에서 趙應斗의



배 한 척을 고용하여, 조선인 동행 7인과 함께 3월 8일 치하포에 도착하여 이화보의 旅店에 들렀고,



다음날 오전 3시경 김창수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주: [照會 17호: 內部大臣 朴定陽이 外部大臣 李完用에게], 1896. 5. 1,

『內部去來案』제3, 8책; [보고 제2호: 海州府觀察使署理參書官 金孝益이 外部大臣에게], 1896. 6. 18, 『黃海道去來案』제1책; [李化甫 初招].>



『백범일지』에서는 사건 이후 소지품을 조사한 결과 쓰지다를 “육군 중위”라고 언급하고 있다..

<주:『백범일지』98쪽.>



반면 조선 정부측 자료에는 쓰찌다의 신원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된 것이 없고, 일본 공사의



조회를 인용하면서 “長崎縣 平民(商人)”이라 언급한 것이 가장 자세한 정도이다..

<주:[보고 제2호: 海州府觀察使署理參書官 金孝益이 外部大臣에게], 1896. 6. 18.>



아마도 이것은 일본측이 양민이 강도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으려는 의도에서



쓰찌다의 신분을 소상히 공표하지 않은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쓰지다의 신원에 대해서는 역시 일본측 자료에 기대할 수밖에 없는데, 현재로서는 萩原



영사대리가 平原 경부의 첫 번째 수사 결과를 일본 외무성에 보고한 다음의 문건에 가장 자세하다.



土田은 長崎縣 對馬島 下郡인 嚴原(いつはら) 사람으로 當港 貿易商 大久保機一의 雇人으로



상업을 위해 1895년 10월 鎭南浦에 도착한 후, 11월 4일 黃州로 가서 활동하였고, 1896년 3월 7일



진남포로 귀환하는 도중 이같은 일을 당하였다. 그의 유품과 재산은 雇主에 인도하였고, 기타



同人의 사망에 관해서 親族에게 통고할 것을 雇主에게 명령하였다..

<주: [萩原事務代理發信原外務次官宛公信要旨], 1896. 4. 6.>



그런데 이 자료에도 위의 문구 이하가 생략되어 있어 더 이상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다만 외무성 자료를 통해서 치하포사건을 계기로 재조선 일본인들이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고



자체 무장을 시도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치하포사건 직후 1896년 4월 재조선 일본상인들은



商權 확대와, 군사관계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보 수집, 그리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鷄林奬業團을 조직하였다. 鷄林奬業團은 일본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주조선 일본영사관의



지휘는 半官半民의 단체로, 인천에 본부를 두고 평양·부산·원산 등에 支部를 두었으며, 그 아래



[大區 - 小區 - 伍長]의 체제로 되어 있었다..



<주:[鷄林奬業團設立一件], 1896. 4(동경: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문서번호 3.3.2-8);

[在朝鮮鷄林奬業團ニ補助金下賜一件], 1897(동경: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문서번호 3.5.12-3).>



鷄林奬業團은 “暴徒들이 來襲할 우려가 예상된다”면서 경호를 위해 銃器를 구비할 계획으로



평양과 개상에서 모금을 확대하고 일본인 경찰관을 특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주:[在京城加藤一等領事發信小村外務次官宛公信要旨], 1896.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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