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댁, 고모댁(12)도첨의공(김흔)의 사위 조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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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1-24 15:39 조회1,621회 댓글1건본문
도첨의공(김흔)의 둘째 사위 趙璉은 평양조씨로서 아버지는 貞肅公 趙仁規이다.
조인규는 몽고어를 잘하는 관계로 충렬왕이 세자시절 원나라에 있을때 수행하여 충렬왕과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로 인해 딸(조련의 누이)이 충선왕비가 되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조련은 아들은 삼형제(조기민,조윤준, 조덕유)를 두었는데 趙德裕의 아들은 조선개국공신인 趙浚이다.
조준의 아들은 趙大臨이며 태종의 딸인 경정공주와 혼인하였다
조대림의 딸이 안정공金九德의 손자인 金仲淹(안정공김구덕-김오문-김중엄)에게 시집왔다.
김중엄+조대림딸 에서 쌍계재 金紐가 태어났다.
조련(趙璉)
?∼1322(충숙왕 2).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온중(溫仲). 자의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를 지낸 인규(仁規)의 아들이며, 조선의 개국공신인 준(浚)의 할아버지이다.
음서(蔭敍)로 진출하여 1308년(충선왕 즉위년)에 평리(評理)가 되고, 이어 동지밀직사사·지밀직사사 등을 거쳐 1311년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오르고, 여러 번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충숙왕 때 찬성사가 되어 최고위의 재상반열에 서서 중요한 일을 맡았다.
또한, 원나라로부터 중의대부 고려왕부단사관(中議大夫高麗王府斷事官)의 직임을 받았는데, 이는 조인규가 지녔던 것을 물려받은 셈이며, 따라서 고려에서의 정치적 지위를 굳히는 데 큰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심왕 고(瀋王暠)가 고려 왕위를 넘보는 일로 원나라에 불려가서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는 사태가 발생하였을 때, 충숙왕이 원나라의 명령에 의하여 정동행성(征東行省)의 권성사(權省事)가 되어 왕의 직무를 대행한 바 있다.
충숙왕과 심왕의 싸움이 결말을 보기 전인 1322년(충숙왕 9)에 죽었지만, 동생 연수(延壽)와 함께 심왕의 편을 들어 절개를 잃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조인규(趙仁規)
1237(고종 24)∼1308(충렬왕 34). 고려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거진(去塵). 평양부(平壤府) 상원(祥原)의 미미한 가문의 출생이다.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으면서 몽고어 통역관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이 제고되어, 이에 따라 원종 때 몽고어 통역관 양성요원을 선발하였다. 이 선발에 뽑힌 뒤 주야로 공부하여 훌륭한 몽고어 실력을 갖추고 제교(諸校)에 보임되었다.
1269년(원종 10)에 세자인 심(諶:뒤의 충렬왕)이 원나라에 입조할 때 수행하여 충렬왕과의 친분관계를 두터이 하였으며, 1274년에 세자가 원나라 세조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고 귀국하여 즉위하자 경성궁(敬成宮)에 안거한 공주와 그의 사속인(私屬人)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충렬왕과 공주와의 친분관계를 배경으로 정치적 성장을 기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충렬왕이 즉위하던 때 장군에 오른 뒤 1278년(충렬왕 4)에 대장군으로 궁궐에서 기무를 맡아보는 필도치(必闍赤)에 임명되고, 곧이어 승지가 되어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특히, 탁월한 몽고어 구사력으로 원나라 세조에게 인정되고 신임을 받게 되면서 원나라의 관직인 선무장군(宣撫將軍)·왕경단사관 겸 탈탈화손(王京斷事官兼脫脫禾孫)에 임명되어 정치적 지위를 더욱 높였다.
1287년에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에 임명된 뒤 계속 요직을 역임하면서 수차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1290년에는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동녕부(東寧府)를 되찾는 교섭에 공을 세웠고, 1295년에는 중찬(中贊)이 되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도 지위가 높았지만 1292년에 그의 딸이 세자비로 간택되면서 국구(國舅)가 되어 명실공히 가장 유력한 존재가 되었다.
1298년에 세자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로서 개혁정책을 크게 뒷받침하여주었다.
그러나 충선왕 비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의 조비(趙妃)에 대한 질투로 일어난 조비무고사건(趙妃誣告事件)으로 왕이 7개월 만에 퇴위되고 충렬왕이 복위하면서 그도 원나라에 끌려가 안서(安西)로 장류(杖流)되었다.
6년 후인 1305년에 방면되어 즉시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에 임명되었다.
1307년 원나라 무종(武宗)옹립의 공으로 충선왕의 정치력이 복권되자, 다시 자의 도첨의사사 평양군(咨議都僉議司事平壤君)에 봉하여지고 선충익대보조공신(宣忠翊戴輔祚功臣)이 되었으며, 그의 아들들이 모두 재상의 지위에 올라 가문을 번성하게 하였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충선왕비조씨(忠宣王妃趙氏)
생몰년 미상. 고려 충선왕의 비. 본관은 평양(平壤). 문하시중을 지낸 인규(仁規)의 딸이다.
1292년(충렬왕 18) 당시 세자인 충선왕과 혼인하여 세자비(世子妃)가 되었으며, 뒤에 원나라의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와 혼인한 충선왕과 함께 귀국하였다.
충선왕과 조비는 금실이 좋았으므로 이를 질투한 한국공주는 충선왕이 조비만 총애한다고 수종하는 사람편에 원나라 황태후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 편지에는 조비가 공주를 저주하여 왕으로 하여금 공주를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고 무고하였다.
이때 “조인규의 아내가 귀신과 무당을 섬기며 저주하여 왕으로 하여금 공주를 사랑하지 않고 조비에게만 사랑을 쏟게 한다.”라는 내용의 익명서가 궁궐문에 붙여져 공주가 조인규와 그 아내 등을 옥에 가두고 이 사실을 원나라에 알렸다.
이해 원나라 사신들이 와서 황제의 명으로 조비는 국문을 받고 아버지와 함께 연경(燕京)으로 압송되었다. 그리하여 충선왕은 폐위되고 충렬왕이 복위되었다.
조준(趙浚)
1.가계와 관력
1346(충목왕 2)∼1405(태종 5).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吘齋) 또는 송당(松堂).
문하시중 인규(仁規)의 증손으로, 판도판서 덕유(德裕)의 아들이다. 아들 대림(大臨)이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함으로써 태종과는 사돈이 된다.
원래 평양조씨는 이름없는 집안이었으나, 인규의 대에 이르러 몽고어를 잘하여 역관(譯官)으로서 출세, 충선왕의 국구(國舅)가 되면서 귀족으로 발돋움하였다.
그는 6형제 중의 5남으로 태어났으나, 형제가 아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어머니가 항상 개탄하였으므로 어려서부터 힘써 공부하였다.
1371년(공민왕 20)책을 끼고 수덕궁(壽德宮)앞을 지나가자, 왕이 보고 기특히 여겨 마배행수(馬陪行首)에 보하였다.
1374년(우왕 즉위년)문과에 급제하고, 1376년 좌우위호군(左右衛護軍)으로서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를 겸하고, 강릉도안렴사(江陵道按廉使)로 뽑혔는데, 정치를 잘하여 이민(吏民)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이어 전법판서(典法判書)를 거쳐, 1382년 병마도통사 최영(崔글)의 천거로 경상도에 내려가 왜구토벌에 소극적이던 도순문사를 징벌하고 병마사를 참하여 기강을 바로잡았다.
1383년 밀직제학(密直提學)을 지낸 뒤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다.
2. 이성계와의 관계 | ||||||
이어 도검찰사(都檢察使)로서 강원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평하여 선위좌명공신(宣威佐命功臣)에 오른 뒤, 권간(權奸)의 발호에 실망하여 우왕 말년까지 4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면서 경사(經史)를 공부하고, 윤소종(尹紹宗)·허금(許錦)·조인옥(趙仁沃)·유원정(柳爰廷)·정지(鄭地)·백군녕(白君寧) 등과 교우를 맺으면서 우왕의 폐위와 왕씨의 부흥을 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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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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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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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도첨의공(휘 흔)의 사위 조련, 그 손자 조준, 조준의 아들 趙大臨, 조대림의 딸이 안정공(휘九德)의 손자 金仲淹(구덕-오문-중엄)에게 시집 온 것, 잘 알았습니다. 조준과 우리가 이렇게 가깝다니----
김중엄+조대림딸 에서 쌍계재 金紐가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