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백범일지(15)기구한 젊은 때(4) - 혼담이 나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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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1-25 16:06 조회1,537회 댓글1건본문
기구한 젊은 때(4) - 혼담이 나오다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고 선생께서 나 같은 것을 그처럼 촉망하셔서 사랑하시는 손녀를 허하심에 대하여 큰 책임을 감당키 어렵게 생각하였다. 더구나 선생께서,
"나도 맏아들 부처가 다 죽었으니, 앞으로는 창수에게 의탁하려오"
하셨다는 것과, 또,
"내가 청계동에 와서 청년을 많이 대하여 보았으나 창수만한 남아는 없었소"
하셨다는 말씀을 듣자올 때에는 더욱 몸둘 곳이 없었다. 그 규수로 보더라도 그 얼굴이나 마음이나 가정 교훈을 받은 점으로나 나는 만족하였다.
이 약혼에 대하여 부모님이 기뻐하심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외아들을 장가들인다는 것만도 기쁜 일이어든, 하물며 이름 높은 학자요, 양반의 집과 혼인을 하게 된 것을 더욱 영광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비록 없는 살림이라도 혼인 준비에 두 집이 다 바빴다.
아직 성례(成禮) 전이지마는 고 선생 댁에서는 나를 사위로 보는 모양이어서 혹시 선생 댁에서 저녁을 먹게 되면 그 처녀가 상을 들고 나오고 6,7세 되는 그의 어린 동생은 나를 아재라고까지 부르며 반가와하였다. 이를테면 내 장인 장모인 원명 부처의 장례도 내가 조력하여서 지냈다.
나는 선생께 이번 여행에서 본 바를 보고하였다. 두만강, 압록강 건너편의 땅이 비옥하고 또 지세도 요해로 되어 족히 동포를 이식하고 양병도 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곳 인심이 순후한 것이며, 또 서옥생의 아들과 결의 형제가 되었다는 등을 낱낱이 아뢰었다.
때는 마침 김홍집(金弘集) 일파가 일본의 후원으로 우리 나라 정권을 잡아서 신장정(新章程)이라는 법령을 발하여 급진적으로 모든 제도를 개혁하던 무렵으로서, 그 새 법의 하나로 나오 것이 단발령(斷髮令)이었다. 대군주 폐하라고 부르는 상감께서 먼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으시고는 관리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깎이자는 것이었다.
이 단발령이 팔도에 내렸으나 백성들이 응종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서울을 비롯하여 감영, 병영 같은 관아가 있는 큰 도회지에서는 목목에 군사가 지켜 서서 행인을 막 붙들고 상투를 잘랐다. 이것을 늑삭(勒削, 억지로 깎는 것)이라고 하여 늑삭을 당한 사람은 큰 일이나 난 것처럼 통곡을 하였다. 이 단발령은 크게 민원(民怨)을 일으켜서 어떤 선비는 도끼를 메고,
'이 목은 자를지언정 이 머리는 깎지 못하리이다'
하는 뜻으로 상소를 올렸다. '차라리 지하에 목 없는 귀신이 될지언정, 살아서 머리 깎은 사람은 아니 되리라(寧爲地下無頭鬼 不作人間斷髮人)'는 글귀가 마치 격서 모양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파하여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처럼 단발을 싫어하고 반대하는 이유가 다만 유교의 '내 온 몸을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감히 이를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 효의 시작(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孝之始也)'에서 나온 것이 아니요, 이것은 일본이 시키는 것이라는 반감에서 온 것이었다.
군대와 경찰관은 이미 단발이 끝나고 문관도 공리에 이르기까지 실시하는 중이었다.
나는 고 선생께 안 진사와 상의하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진언하였다. 이를테면 단발 반대의 의병이어니와 단발 반대는 곧 일본 배척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회의는 열렸으나 안 진사의 뜻은 우리와 달랐다. 이길 가망이 없는 일을 일으킨다면 실패할 것밖에 없으니 천주교나 믿고 있다가 시기를 보아서 일어나자는 것이 안 진사의 의사였다. 그는 머리를 깎이게 되면 깎아도 좋다고까지 말하였다.
안 진사의 말에 고 선생은 두 말을 아니 하시고,
"진사, 오늘부터 자네와 끊네"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나갔다. 끊는다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 예로부터 선비가 절교를 선언하는 말이다.
이 광경을 보고 나도 안 진사에 대하여 섭섭한 마음이 났다. 안 진사 같은 인격으로서 되었거나 못되었거나 제 자라에서 일어난 동학은 목숨을 내어놓고 토벌까지 하면서 서양 오랑캐의 천주학을 한다는 것부터도 괴이한 일이어니와 그는 그렇다 하고라도 목을 잘릴지언정 머리를 깎지 못하려거든, 단발할 생각까지 가졌다는 것은 대의에 어그러지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안 진사의 태도에 실망한 고 선생과 나는 얼른 혼인이나 하고는 청계동을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나는 금주 서옥생의 아들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천만염외에 불행한 일이 또 하나 생겼다. 어느 날 아침 일찍이 고 선생이 나를 찾아오셔서 대단히 낙심한 얼굴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어제 내가 사랑에 앉았노라니 웬 김가라는 자가 찾아와서 당신이 고 아무요 하기로 그렇다 한즉 그자가 내 앞에다가 칼을 내어 놓으며 하는 말이, 들으니 당신이 손녀를 김창수에게 허혼을 하였다 하니 그러면 첩으로 준다면 모르되 정실로는 아니 되리다. 김창수는 벌써 내 딸과 약혼한 지가 오래오.
그러기로 나는, 김창수가 정혼한 데가 없는 줄 알고 내 손녀를 허한 것이지 만일 약혼한 데가 있다면야 그러할 리가 있는가. 내가 김창수를 만나서 해결할 터이니 돌아가라고 해서 돌려보내기는 했으나 내 집안에서는 모두 큰 소동이 났네."
나는 이 말을 듣고 모든 일이 재미없이 된 줄을 알았다. 그래서 선생께 뚝 잘라 이렇게 여쭈었다.
"제가 선생님을 사모하옵기는 높으신 가르침을 받잡고자 함이옵지 손서가 되는 것이 본의는 아니오니 혼인하고 못하는 것에 무슨 큰 상관이 있사오리까. 저는 혼인은 단념하고 사제의 의리로만 평생에 선생님을 받들겠습니다."
내 말을 들으시고 고 선생은 눈물을 흘리시고, 장래에 몸과 마음을 의탁할 사람을 찾으려고 많은 심력을 허비하여서 나를 얻어 손서(孫壻)를 삼으려다가 이 괴변이 났다는 것을 자탄하시고 끝으로,
"그러면 혼인 일사는 갱무거론(更無擧論)일세. 그런데 지금 관리의 단발이 끝나고는 백성들에게도 단발을 실시할 모양이니 시급히 피신하여 단발화 - 머리 깎이는 화란 -를 면하게. 나는 단발화가 미치면 죽기로 작정했네"
하셨다.
나는 마음을 지어먹고 고 선생의 손녀와 혼인을 아니하여도 좋다고 장담은 하였으나 내심으로는 여간 섭섭하지 아니하였다. 나는 그 처녀를 깊이 사랑하고 정이 들었던 것이다.
댓글목록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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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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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고씨처녀와의 혼인담을 인간적이고 솔직하게 진술하여 더욱 아름답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