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적 문필가 허난설헌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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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2-04-10 21:41 조회1,609회 댓글0건본문
개혁적 문필가 허난설헌 01
오늘 아침 조선일보에 [다시 읽는 여인열전] (5) 개혁적 문필가 허난설헌이 소개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조선일보 기사와 허난설헌 생가인 강릉 이광노가옥 관련 내용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 조선일보 홈페이지
[다시 읽는 여인열전] (5) 개혁적 문필가 허난설헌 (2002.04.09)
▲사진설명 : 그림 고영훈
허난설헌(1563∼1589)에게는 세 가지 한이 있었다.
첫째, 이 넓은 세상에서 왜 하필이면 조선에 태어났을까?
둘째, 왜 하필 여자로 태어나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서러움을 지니게 되었을까?
셋째, 수많은 남자 중에서 왜 김성립(金誠立)의 아내가 되었을까?
이 세 가지 한은 “왜 조선에서 여자로 태어났을까”란 말로 압축할 수 있다. 동인(東人) 영수 허엽(許曄:1517∼1580)의 셋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8세에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樑文)을 지어 신동으로 불릴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하지만 ‘삼종지도의 나라’ 조선에서 여성의 재능은 불필요한 혹일 따름이었다.
그녀는 오빠 허봉(許封)의 주선으로 삼당시인(三唐詩人) 이달(李達)에게 글을 배웠다. 여성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던 당시에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한 유년시절은 결혼과 동시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조혼 풍습에 따른 14세의 결혼은 불행한 미래에의 초대장이었다.
남편 김성립(金誠立)은 집을 떠나 과거공부에 전념했는데, 그런 시절의 일화가 전한다. 함께 과거공부를 하던 친구가 “성립이 기생집에서 놀고 있다”는 말을 지어내자, 여종이 이를 난설헌에게 말했다.
그녀는 도리어 술과 안주를 마련해 “낭군께선 이렇게 다른 마음 없으신데/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간질을 시키는가”라는 시와 함께 보냈다.
‘상촌집’(象村集) 작자 신흠은 이를 보고 “허씨는 시에도 능하고, 기질도 호방함을 알게 되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조선여성에게 호방한 기질은 불행의 씨앗일 뿐이었다. 그녀는 시를 통해 부부관계를 한 차원 높게 승화시키려 했으나 이 또한 비난의 대상이 됐다.
‘강남에서 독서하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寄其夫江含讀書)란 시에서 “규방에서 기다리는 마음 아프기만 한데/풀이 푸르러도 강남 가신 님은 오시질 않네”라고 노래하고, 시 ‘연꽃을 따며’(采蓮曲)에선 “물 건너 님을 만나 연꽃 따 던지고/행여 누가 봤을까 한나절 얼굴 붉혔네”라고 남편에 대한 수줍은 애정을 노래했다.
하지만 훗날 이수광이 ‘지봉유설’에서 “이 두 작품은 그 뜻이 음탕한 데 가까우므로 시집에 싣지 않았다”고 평했다. 사부곡(思夫曲)까지 음탕으로 몰아부치는 조선에서 여성의 모든 적극성은 비난받았다. 게다가 과거에 거듭 낙방한 김성립은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허난설헌은 이런 왜곡된 현실과 맞서기 위해 시를 무기로 선택했다. 난설헌은 “누가 술 취해 말 위에 탔는가/흰 모자 거꾸로 쓰고 비껴 탄 그 꼴”이라는 ‘색주가의 방탕한 사람에 대한 노래’(大堤曲)’로 남편을 풍자했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을 위해 존재하는 부차적 존재가 된 것이 문제의 근원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생의 운명이란 엷고 두터움 있는데/남을 즐겁게 하려니 이 내 몸이 적막하네”라고 읊은 시 ‘한정(恨情)’은 그런 인식의 표현이다.
그녀가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시어머니에게 미움 받은 그녀가 의지할 곳은 두 아이뿐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에게 비극이 잇달았다.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더니/올해는 사랑하는 아들 잃었네/슬프고 슬프구나 광릉(廣陵:아이들 묻힌 곳) 땅이여/두 무덤 마주보고 서 있구나”(자식을 애곡함·哭子)라는 시는 불행이 거듭되는 운명에 대한 통곡이었다.
그녀는 시로써 조선의 사대부를 조롱하고 모순된 사회에 저항했다. 또한 여성에 대한 억압과 빈자에 대한 불평등을 동일시하는 강한 개혁지향성을 드러냈다.
“양반댁의 세도가 불길처럼 성하던 날/고루(高樓)에선 노래 소리 울렸지만/가난한 백성들은 헐벗고 굶주려/주린 배를 안고 오두막에 쓰러졌네”(느낌을 노래함·感遇)란 시는 가난한 백성들의 질곡에 대한 분노였다.
“밤새도록 쉬지 않고 베를 짜는데/뉘집 아씨 시집갈 때 옷감 되려나/손으로 싹둑싹둑 가위질하면/추운 밤 열 손가락 곱아오는데/남 위해 시집갈 옷 짜고 있건만/자기는 해마다 홀로 산다네.”
시 ‘가난한 여인을 읊음’(貧女吟)’은 노동자가 노동의 결과물에서 소외된다는 마르크스의 소외론이 나오기 300여년 전에 시인의 직관으로 간파한 완벽한 소외론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시를 통한 현실 변혁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녀의 분노는 시로 쓰여지는 것 이상의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현실을 넘어 피안의 세계로 다가간다. 도교의 세계였다. 장시 ‘신선이 노니는 노래’(遊仙詞)나 ‘꿈에서 광상산에서 시를 지으며 노닌 이야기’ 등이 그런 글들이다.
그녀가 남긴 시들이 허균에 의해 ‘난설헌집’(蘭雪軒集)으로 간행되고,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에 의해 중국에서 출간되면서 “이 넓은 세상에서 왜 하필이면 조선에 태어났을까”란 첫 번째 한은 풀렸다.
훗날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규중 부인으로서 시를 읊는 것은 애초부터 아름다운 일은 아니지만, 외국(조선)의 한 여자로서 꽃다운 이름이 중국에까지 전파되었으니 가히 영예스럽다고 이르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사대(事大)의 나라 조선의 남성들은 명나라를 통해 역수입된 그녀의 명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1711년에는 분다이야(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시집이 간행됐다. 그녀가 남긴 시들은 여성 차별의 왕국, 조선의 영역을 넘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모순으로 가득찬 사회에 대한 그녀의 승리이기도 했다.
※다음편은 고구려와 백제를 개국한 ‘창업전문가’ 소서노 입니다.
[다시 읽는 여인열전] 허난설헌-허균 남매 (2002.04.09)
▲사진설명 : 허난설헌과 허균이 태어난 집.강릉시 초당동에 있다./강릉시청 제공
허난설헌이 조선 여인으로서 호를 남긴, 이례적 인물이 된 데에는 동생 허균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난설헌이 요절하자 허균은 친정에 흩어져있던 누이의 시와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를 모아 ‘난설헌집’를 펴냈다.
이 때 여러 사람의 발문을 받았는데, 유성룡은 “이상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라는 감탄을 남겼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도 발문을 받았는데 그녀의 시에 감탄한 주지번은 “‘유선사’ 등 여러 작품은 중국 시의 전성기였던 당나라 시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라는 극찬과 함께 이를 중국에서 출간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조선인 역관 허순과 중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한 소녀는 이 시집을 보고 ‘난설헌을 사모한다’는 뜻의 경란(景蘭)으로 이름을 바꾸고 “내가 바로 난설헌이 다시 태어난 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심취했다.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고 나중에는 천주교 기도문을 가져올 정도로 정형화된 사고를 거부했던 허균이기에 ‘난설헌집’을 남기고 ‘홍길동전’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특출한 성격때문에 광해군 10년(1618)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말았다. 박제된 삶을 거부한 남매의 비극이자, 조선의 비극이었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 문화재청 홈페이지
연번 종목 명칭 소재지 관리자
1 시도기념물 90 (경기) 허난설헌묘(許蘭雪軒墓) 경기 광주시 안동김씨서운관정공파종중
2 중요민속자료 217 안동김씨묘출토의복(安東金氏墓出土衣服) <본문정보> 충북 청주시 흥덕구 충북대학교박물관
3 중요민속자료 217-1 명주겹누비직령포(명주겹누비직령포) <본문정보> 충북 청주시 흥덕구
4 시도유형문화재 124 (강원) 난설헌시집목판초간본(蘭雪軒詩集木板初刊本) <본문정보> 강원 강릉시 강릉시립박물관
5 문화재자료 59 (강원) 강릉이광노가옥(江陵李光魯家屋) <본문정보> 강원 강릉시 이광노
▣ 허난설헌 생가
종 목 문화재자료 59호
명 칭 강릉이광노가옥 (江陵李光魯家屋)
분 류 고가
수 량 1동
지정일 1985.01.17
소재지 강원 강릉시 초당동 475-3
소유자 이광노
관리자 이광노
조선 선조 때 문신인 허엽(1517∼1580)이 살던 집으로 지은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이곳은 허엽의 딸이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었던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곳으로 전한다.
행랑채의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마당을 거치면 ㅁ자형의 본채가 있다. 본채는 사랑채와 안채로 구분하고 그 사이에는 광을 배치하였다. 안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부엌과 방, 마루로 되어 있는데 건물 앞·뒤로도 칸을 구분한 겹집 형태이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는 솟을대문과 협문을 두고 공간을 구획하여 독립성을 확보하였다. 후원과 사랑마당은 한국 전통의 정원 형태를 엿볼 수 있는 곳으로 갖가지 화초와 나무들로 잘 정돈되어 있다.
문화재명 강릉이광노가옥(江陵李光魯家屋)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며,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맞배지붕의 솟을 대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3칸의 광이 있고, 좌측으로는 행랑방과 마구간이 있는 대문간채를 지나면 잘 다듬어진 정원과 함께 사랑채가 나타난다. 팔작기와지붕으로 전면에 툇마루가 있고, 대청 2칸을 우측에 두고 있다.
사랑채의 좌측 끝은 상 노인방으로 안채 출입문간에서도 출입이 가능하게 하였고, 협문과 공간을 구분하는 담을 전면에 가지고 있다.
사랑 대청은 창호로 둘러싸여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정으로 하고 상부의 판대공과 대들보는 툇간만큼 전면으로 돌출되면서 노출 되어 있어 구조적인 미를 풍기고 있다.
안채는 팔작기와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집으로 되어 있다. 부엌, 방 마루로 되어 있으며 부엌의 출입구는 사각으로 연결되어 미닫이문을 내고 있으나 근래에 수리를 한 듯하다.
안채 방은 두짝 세살문과 용자창호의 이중문으로 구성되고, 마루는 네짝 분합문으로 짜여 있다. 집 주위에 담이 둘러싸여 있으며, 사랑채의 출입은 솟을대문을 통하여 남자들이 주로하며,측면의 협문은 여자들이 안채에 출입할 때 사용하였다.
이때의 시선 차단을 위하여 출입 통로를 따라 담을 쌓았으며 이러한 것은 공간의 분할을 가져와 전체적으로 폐쇄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으나, 후원과 정면의 마당을 넓게 자리잡아 정원을 아주 잘 꾸미고 있어 차라리 개방감을 주면서 한국의 아름다운 정원 풍경을 볼 수 있다.
▣ 김항용 -
▣ 김영환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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