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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회곡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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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2-02 00:17 조회1,30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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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800년 중반,

죽주박씨 설단

안동김씨 최초의 족보인 안동김씨성보(1580년 경진보) 천(天)편을 살펴보면 충렬공(방경) 배위(配位)이신 냉평국대부인(冷平國大夫人) 죽주박씨 할머니 묘소(墓所)는 안동 예안현 지례촌 속칭 능동(安東 禮安縣 知禮村 俗稱 陵洞)이라 기록되어 있음.

1800년대 중반 풍산읍 회곡리에 설단하면서, 후손 통정대부 부호군 英洛(영락)이 냉평국대부인 죽주박씨 설단 고유문(冷平國大夫人竹州朴氏設壇告由文)을 지음.

*삼소재 김영락 (초명 종락, 1796-1875, 80세) 사후 수직 통정대부



■ 냉평국대부인 죽주박씨 설단 고유문(冷平國大夫人竹州朴氏設壇告由文)

생각건대 우리 先祖(선조) 忠烈(충렬)府君(부군)께옵서는

세상드문 英材(영재)로서 開國(개국)하신 元勳(원훈)일세.

資質(자질)은 智勇(지용)있고 氣槪(기개)는 山川(산천)을 움직였네.

後孫(후손)에게 蔭德(음덕)내려 代代(대대)로 높아졌네.

수많은 後孫(후손)들은 八方(팔방)으로 펴졌는데

오직 그의 현부인(賢夫人)은 竹山(죽산)에서 名門(명문)일세.

冷平(냉평)으로 받은 誥命(고명) 夫人(부인)의 尊稱(존칭)이니

거룩하신 그 淑德(숙덕)은 君子(군자)의 配匹(배필)이요

밝고 맑은 그 威儀(위의)를 이어받아 터전되니 가장 미뤄 감동되네.

幽宅(유택)은 詳考(상고)할 길 없어 花林(화림)모두 변했는데

累百年(누백년)간 恨歎(한탄)하여

★謙(겸), ★梅(매) 두어른과 ★荷潭(하담), ★訥菴(눌암)할아버님은

혹은 封標(봉표)修築(수축)하고 혹은 祭享(제향)드렸으나

어떤사람 作亂(작란)으로 바로 碑石(비석) 잃게되니

子孫(자손)들의 痛嘆(통탄)함이 어찌 極(극)에 있을 손가.

이제 檜谷(회곡) 돌아보니 우리 先祖(선조) 胎址(태지)일세.

착하신 夫人(부인)께서 이에서 늙으시니

田園(전원)에 물러나와 그 家庭(가정)을 즐기심에

需浦(수포)에서 供饋(공궤)받고 洛臺(낙대)에서 遊宴(유연)하니

江山(강산)도 생각나고 草木(초목)도 香氣(향기)나네.

世態(세태)많이 변하여서 그것마저 없어지고

平泉花石(평천화석) 그것만이 보배로 지켜왔네.

京鄕人事(경향인사)計劃(계획)으로 兩湖(양호)에다 通文(통문)해서

그의 터에 設壇(설단)해서 追慕(추모)하게 되었도다.

碑(비)에는 史蹟(사적)쓰고 壇(단)에는 祭祀(제사)모셔

百代(백대) 길이 氣通(기통)하고 八方(팔방)소리 같이하니

壽岑(수잠)은 가까옵고 花山(화산)서로 바라보니

하물며 陵洞(능동)산을 한 脈(맥)에서 갈라진곳,

儒林(유림)의 計劃(계획)으로 占(점)을 쳐서 詳考(상고)하여

아름다운 三尺碑石(삼척비석) 輝煌(휘황)하게 세우는데

이에 吉辰(길신) 擇(택)하오니 삼월 淸明(청명)시절이라.

봄비 처음 적셔주고 밤이슬은 방울지니

百代(백대)千年(천년) 길이 두고 제사드릴 땅이로다.

祭酒(제주)와 丹香(단향)으로 後孫(후손)들이 모여드니

洛東江(낙동강)물 흘러가고 騫芝山(건지산)은 푸르도다.

焚香(분향)煙氣(연기) 서리는데 先靈(선령)께서 降臨(강림)하사

行禮(행례)함이 嚴肅(엄숙)하니 福(복)을 많이 받을거요,

복많이 받음으로 尊靈(존령)또한 昭明(소명)하리.

이제부터 永遠(영원)토록 依支(의지)함이 있으리니

祭壇(제단)앞에 세운 碑石(비석) 於千年間(어천년간) 가오리다.

후손 통정대부 부호군 ★英洛(영락) 지음


■ 대종회 연혁

---1976

檜谷洞 竹州朴氏 할머님 齋室 신축공사를 6월 1일에 착수하여 6월30일 한달만에 완공하였다. 건축비는 壹百七拾萬원이 소요 되었는데 이 사업은 종인 28명이 壹百壹拾五萬參仟八百五拾원의 특별 찬조금과 재일 종친 都評議公派 ★日秀氏 외 5명이 四拾五萬八仟八百五拾원을 송금해 주셨고 회장 ★明會氏와 전 부회장 ★相瑄氏가 각각 壹拾萬원 씩을 특별 찬조해주셨으며 그 외 二十餘 종인들이 五萬원에서부터 최하 五仟원에 이르는 성금으로 소원을 이루었다.


---1979

안동시 풍산읍 회곡동 山 154番地 9000여坪을 50萬원에 매입하였다.


---1985

9月15日에는 忠烈公 遺墟碑閣과 沿革碑를 一千二百七十二萬九千원을 들여 건립하였고

7月 16日 檜谷洞 竹州 朴氏 할머님 壇碑를 七十三萬八千九百원을 들여 개수하였으며


---1989

1月 10日 檜谷洞 할머님 齋室 垈地 140坪을 135萬원에 매입하고


---1990

11月 15日 노후된 檜谷洞 竹州 朴氏 할머님 齋室을 四千三百二十四萬六千원을 들여 훌륭하게 개축하였다. ★泰亨會長께서 一百萬원을 특별 찬조하였다.


---1992

四月二十二日 檜谷洞 位土畓 五百十五坪을 一千四百三十二萬四千四百원에 매입하였다.


---1995

檜谷洞 竹州 朴氏 할머님 壇墓庭 확장 공사를 四百萬원을 들여 하였는데 여기에 경비는 회장 ★泰亨氏와 翼元公派 ★泰珍氏가 각각 二百萬원을 협찬하고 회장이 현지에 내려가 직접 감독하여 완공하였다.


---1996

上洛臺를 四十萬원을 들여 복원하였으며,


---1997

안동 上洛臺를 복원할 때 正位置를 잘못 파악하여 입석하였었는데 그 고장 노인들의 고증을 다시 들어 원 위치를 확인하여 바르게 옮겨 세웠다.


---1998

檜谷洞 遺墟碑閣 락카칠을 五十萬원을 들여 하였고

관리사 창문 샤시를 二百二十萬원을 들여 교체 하였으며




10) 현재의 회곡리

1608년 <영가지> : 상락대, 회곡촌 마을 앞에, 檜谷村(회곡촌)의 남쪽 강가의 벼랑

1900년대 <충렬공 유허지>, <상락대비> : 상락대, 회곡동 앞 낙동강 건너편, 옛날 坐臺가 확인되어


이전의 기록에는 상락대가 회곡촌의 남쪽 강가에 있고, 상락대 북쪽 조금 위 상고산에 정자(孤山亭)가 있었다고 했는데, 수십년전의 기록에서부터 낙동강 건너편에 상락대가 있다고 하고, 현재도 낙동강 건너편 단호리에 상락대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 경북마을지 下권

●풍산면 회곡리

1)마을의 자연환경

풍산읍 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남서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남후면단호동, 북쪽으로 수곡동 막곡동을, 동남쪽은 계평동과 접하는 동리로서 낙동강이 북쪽을 흐름을 바꾸는 강 기슭의 구릉지대에 산재하는 촌락으로 형성되는 동리이다.


2)마을의 역사

본래 안동군 서선면 지역으로 전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회곡(檜谷) 또는 회곡촌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청사동, 상계곡동, 증수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회곡동(리)라 하여 풍산면에 편입되었다.


영가지 안동부서의 방리조에

"회곡촌 : 하계곡 서쪽 얼마되지 않은 곳에 있다. 동리의 가운데를 조그마한 시내가 산에서 흘러내려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고산에서 흐르는 시내가 강과 합하는 곳에 충렬공 김방경 장군이 정자를 지은 곳이다. 마을 어구에 남향의 화전이 있어 옛날부터 충렬공의 집터라고 전하여 왔으며 충렬공의 후손이 이 마을에 세거하면서 대대로 벼슬을 하였다. 문극공 설헌 정오, 대사헌 정포가 이 마을이 외가 곳이 되어 우거하였다" 라 실리어 있다.

고려 명신 충렬공 김방경 장군이 노시던 곳으로 경관지로 알려진 낙동강의 절벽에 상락대가 마을 앞에 있다. 마을 앞의 소는 낙연이며, 그 앞에 단호리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다. 상락대의 동편의 바위는 마암이라 가파른 절벽이 대의 경관을 더욱 높인다.


3)성씨별 가구분포

총 가구수 101가구, 안동권씨 14가구, 안동김씨 30가구,


●남후면 단호리(丹湖里)

2) 마을의 역사 : 영가지의 방리조에 실리기를 " <전략> 상락대는 안동부에서 25리가 되는 檜谷村(회곡촌)의 남쪽 강가의 벼랑이다. 상락군 ★김방경이 일찍이 遊賞(유상)했던 곳임으로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다. 동쪽에 馬巖(마암)이 있어 깍아 세운 듯 천길이나 되는 바위절벽이고, 마암의 서쪽은 돌로된 臺가 둘러있어 기이한 경치가 형용하기 어려울만치 아름답고, 아래쪽의 맑은 호수는 배를 띠울 만하고, 위쪽에는 수십인이 앉을만하다. 돌 사이에 菲菜(비채, 부추의 한가지)가 많이 살아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상락군이 심은 것이라 한다." 라 적고 있다.



■ 전해오는 이야기 (안동 김봉수 증언, 2003. 3)

회곡동으로 가는 버스안에서 상락대를 지날 때쯤 안동유사 봉수님께서 상락대에 관련해 전해오는 전설 하나를 들려주십니다. 충렬공 할아버님을 너무나 사모하던 한 낭자가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 낭자의 유언에 따라 상락대 인근에 장사 지냈고 그 자리에는 지금까지도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원래 상락대에는 상락대비가 존재했으나 동네사람들이 일이 잘 안되면 그것이 상락대비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비를 강에 버렸다고 합니다. 수년전에 봉수님과 몇분이 상락대비를 찾기위하여 상락대 정상부근을 뒤졌으나 찾지못하고, 동네의 100살이 넘은 어른으로부터 구전되어오는 위치를 전해들어 파보니 상락대비 좌대가 발견되었다고합니다. 그래서 그 좌대를 꺼내어 현재의 상락대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위치가 바로 풀이 나지않는 그 위치였다 합니다.



■ 안동김씨 족보

●충렬공 遺墟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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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편에는 공의 別莊이 있던 上洛臺가 江上절벽에 우뚝 서 있으니 안동군 명소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이곳에 서 있는 上洛臺碑는 수십년 전에 안동군수로 있던 ★金在煥씨와 후손 ★大容, ★範容 제씨가 이곳을 길이길이 보존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上洛臺碑

상락대 정상에는 낙낙장송이 우뚝 서 있고 절벽 아래는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충렬공께서 젊으신 시절에 무술을 연마하시고 공께서 거처하시던 별장이 있던 곳을 영구히 기념 보존하기 위하여 수십년 전에 안동군수로 있던 ★재환씨와 후손 ★대용, ★범용 제씨가 기념비를 세웠다.

어느 때인가 이 비가 넘어져 강으로 유실되어 1996년에 다시 세웠다. 상락대는 안동군 명승지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위치 : 안동시 풍산면 회곡동 앞 낙동강 건너편에 있다.


■ 안동김씨 대종회보 제56호 (1997. 4)

●上洛臺 복원사업 완료

지난해 40만원을 예산에 반영하여 상락대를 복원한 바 복원한 그 자리가 옛 상락대 자리가 아님이 그 마을 노인들의 증언으로 밝혀져 원 위치를 확인한 바 현 장소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옛날 坐臺가 확인되어 今春 3월 9일 원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 대종회 연혁

---1996 上洛臺를 四十萬원을 들여 복원하였으며,

---1997 안동 上洛臺를 복원할 때 正位置를 잘못 파악하여 입석하였었는데 그 고장 노인들의 고증을 다시 들어 원 위치를 확인하여 바르게 옮겨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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