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회곡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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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작성일05-12-02 00:11 조회1,814회 댓글7건본문
1) 안동시 풍산읍 회곡리
1800년대 중반, 후손 통정대부 부호군 英洛(영락)이 쓴 냉평국대부인 죽주박씨 설단 고유문(冷平國大夫人竹州朴氏設壇告由文)을 보면,
*삼소재 김영락 (초명 종락, 1796-1875, 80세) 사후 수직 통정대부
이제 檜谷(회곡) 돌아보니 우리 先祖(선조) 胎址(태지)일세.
착하신 夫人(부인)께서 이에서 늙으시니
즉, 檜谷(회곡)은 충렬공께서 1212년 태어나 성장하신 곳이고, 16세 1227년부터 오랫동안 관직생활을 하시다가, 72세 1283년 벼슬에서 물러나신후 자주 들리시고, 이곳에 저택(마을 입구 남쪽으로 향한 큰 밭, ?草堂遺墟)을 짓고, 고산정(마을 앞 上孤山 위)을 세우고, 상락대에서 유상하시면서 만년을 주로 이곳에서 보내신 곳입니다.
특히, 84세 1295년 상락군개국공 작위와 식읍 1천호, 식실봉 3백호를 이곳 회곡리 일대로 받으신 것으로 볼수 있습니다.
2) 1295년,
충렬공(김방경) 84세, 상락군개국공 작위와 식읍 1천호 식실봉 300호 받음.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을 봉(封)하시고 식읍(食邑) 1천호에 식실봉(食實封) 삼백호(三白戶)를 받으셨다. (충렬공행장, 1350년, 안진 발)
---이어 첨의령(僉議令)을 더 주었으며 또 상락군 개국공(上洛君 開國公), 식읍(食邑) 천 호를 봉하여 실봉(實封) 3백 호를 먹게 하였다. (고려사)
---"나이가 84세가 되어 --- 세자(=충선왕) 전하께서 ---임금께 아뢰니, 비답(批答)을 내려서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으로 삼았는데, 실로 분수에 맞지 않는다."
지금 새로 책봉된 상락군 개국공 경조 (上洛郡開國公京兆) 김방경(金方慶)저하는---상락군(上洛郡)에 봉하여 공(公)으로 삼으니 이는 후현(後賢)들의 길을 넓힌 것이다.
삼가 고부(古賦)를 지어서 이름하여 『단모부(旦暮賦)』라 하고 멀리서 상락공 궤장(궤杖) 아래에 바칩니다. (동안거사집, 이승휴)
▶충렬공 84세 1295년에 상락군개국공 작위와 식읍 1천호, 식실봉 300호를 받은 곳은?
3) 1312년,
문영공(김순) 55세, 선친의 작위와 식읍을 이어 받음.
---기해년(己亥年)에 공께서 그칠 줄을 아시고 벼슬을 사퇴하셨다. 그 이듬해 8월에 선친께서 세상을 하직하심으로 유원(遺願)에 의하여 고향 선영(先塋)에 장례를 모셨다. 경술년(庚戌年) 겨울에 선친 묘소에 제사를 지내고 임자년(壬子年)에 다시 중대광 상락군(重大匡 上洛君)을 봉하여 선친의 작위(爵位)와 식읍(食邑)을 이어 받았다. (김순 묘지명, 1321, 민지 찬)
▶충렬공의 3남 문영공(김순)이 선친의 식읍을 이어받아 (?)아들 承古가 회곡리에 거주하고, 맏사위 정책의 아들들인 정오, 정포 형제가 외가인 회곡리에 정착한 듯
4) 1342년 10월,
문영공(김순) 외손자 정오, 정포 형제가 회곡리에 들림. 그때 외삼촌 김좌랑(金佐郞) 승고가 복주의 전나무골[檜谷]에 한가로이 살고 있었음.
▶정포의 외삼촌 김좌랑 承古는 문영공(김순)의 네 아들 영돈, 사순, 영휘, 영후 중 누구인지? 김흔 장군의 아들 承固인지? 또는 문영공의 (?)아들 승고가 김흔 장군에 양자로 들어간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동문선 제11권 /오언배율(五言排律)
좌랑 외삼촌에게 드리는 시[서문도 함께 싣다] [贈佐郞舅詩幷序] /정포(鄭?)
지정(至正) 2년(=1342년) 가을에, 내(=정포)가 형님 사겸(思謙, =정오)과 함께 남쪽으로 귀양왔다가 10월에 일이 있어 복주(福州)에 모여 닷새 동안을 머물렀다. 그때 외삼촌 김좌랑(金佐郞)이 복주의 전나무골[檜谷]에 한가로이 사는데, 어느 날 사겸 형과 나를 청하여 놀고 유목사(柳牧使)와 양통판(梁通判)이 자리를 같이하여 주안(酒案) 사이의 담소(談笑)의 즐거움이 평시(平時)와 같아 하루 종일을 놀고 갔었다. 그 다음해 여름에 이르러 교지(敎旨)가 내려 나를 복주에, 사겸형을 청주읍(淸州邑)에 안치(安置)하게 하였는데, 막상 이르러 본즉 유목사와 양통판이 다 사직하여 갔고 외삼촌 또한 계시지 않아, 황량(荒凉)한 여사(旅舍)에 함께 즐길 사람이 없어 강산 천 리에 생각만 아득히 되풀이하였다. 한 달 남짓 있노라니 외삼촌이 서울서 돌아와 내가 유락(流落)해 있음을 불쌍히 여겨, 나를 위로할 길을 생각하여 날마다 즐거운 놀이를 벌여 산에 오르고 물에 놀면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니, 마음이 헌칠, 정신이 흐뭇하여 영욕(榮辱)을 다 잊어 버리고 숫제 자신이 한인(閒人) ㆍ 은사(隱士)나 된 듯, 귀양살이의 신세임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아아, 인생의 모였다 헤어짐이 모두 수(數)가 있으니, 이제 내가 이곳에 귀양와 있음에 유(柳)와 양(梁)은 다 가고 홀로 외삼촌만이 계심은 어찌 하늘이 우리 두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예서 상종(相從)하게 함이 아니랴. 감탄이 그지없어서 이 시를 짓는다.
천리 밖에 이 몸이 귀양을 와서 / 千里身仍竄
금년에 신수가 더 야릇해라 / 今年數更奇
떠도는 신세 어디다 의탁할 것인가 / 飄零何所托
몸과 그림자만이 붙어 다닐 뿐 / 形影只相持
유학을 닦았으나 어디다 쓰리 / 儒術將安用
빈 말은 마침내 베풀 길 없네 / 空言竟莫施
세상의 웃음 살 줄 내 알았거니 / 自知爲世笑
남의 충고 듣기도 안 좋아하네 / 又不喜人規
곧은 도는 삼출주D-001을 만난다더니 / 直道連三黜
여생에 백 가지 어려움을 만났네 / 餘生遇百罹
친한 벗은 멀리서 서신도 없고 / 親朋無遠信
타관에 아는 사람 적네 / 羈旅少相知
반가울사, 내 외숙 한 분이 있어 / 好事逢吾舅
청담은 곧 나의 스승 / 淸談郞我師
성미가 피차에 서로 맞으니 / 風襟自有契
내왕도 저절로 무시로 하네 / 來往亦無期
좌상에 술병은 늘 가득하고 / 座上樽常滿
등 앞에 자리를 다시 옮겨서 / 燈前席更移
기쁨을 찾으니 마음이 흐뭇하고 / 覓歡心袞袞
체모를 생략하니 즐거움이 그지없어 / 省事樂熙熙
초목에도 화기가 뜨고 / 草木浮和氣
계산도 고운 모습 나타내는데 / 溪山有令姿
먼 마을을 나란히 말타고 가며 / 聯?村巷遠
나직한 수정에 잔 들고 앉아 / 把酒水亭卑
어초하는 늙은이와 짝을 짓기도 / 却伴漁樵老
사냥하는 젊은일 좇아가기도 / 閑追射獵兒
느낀 회포에 노래 부르고 / 感懷歌正冽
보이는 물색에 눈물 흐르네 / 覽物淚空垂
옛일을 생각하니 산간주D-002 같아서 / 憶昔同山簡
한창 겨울 습지에서 취했었네 / 方冬醉習池
파연곡 부르며 잔치 끝난 뒤 / 笙歌淸?後
등불을 들고 돌아올 그때 / 燈火夜歸時
모였다 헤어짐이 꿈과도 같아 / 聚散還疑夢
슬픔과 기쁨은 시에나 싣네 / 悲歡只有詩
가엾은 내 신세 위로되는 건 / 蹉?猶可慰
늙어도 정정한 이 몸 / ??未全衰
[주 D-001] 곧은 도는 삼출 : 춘추 때 유하혜(柳下惠)가 곧기 때문에 세 번이나 벼슬에서 쫓겨 났으나, 버리고 가지 않으므로, 사람이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곧은 도(道)로써 사람을 섬기면 어디 간들 세 번 쫓겨나지 않으리오. 굽은 도(道)로써 사람을 섬기어 하필 부모의 나라를 버릴 것이냐.” 하였다.
[주 D-002] 산간 : 진(晋) 나라 산도(山濤)의 아들.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양양(襄陽)을 진수(鎭守)하면서 나가 놀기를 좋아하여, 흔히 경치 좋은 습가지(習家池)에 가서 술에 취해서는 백접리(白接?)를 거꾸로 쓰고 말을 거꾸로 타고 돌아오는 등 풍류 기화(奇話)를 많이 남겼다.
雪谷先生集 /詩 (정포)
永嘉。同諸公過金佐郞 承古 舅山莊。
鞍馬悤悤閱數州。夕陽携手更登樓。謫來未厭湖山好。事去空驚歲月?。半壁殘燈孤館夜。傍?疏樹故園秋。欲知別後相思意。天際長江??流。
설곡집(雪谷集)
서지사항 :
정포(鄭?) 著. 2권(37판). 목판본(木板本). 한국문집총간 3집.
저자소개 :
정포(1309∼1345)의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 본관은 청주(淸州). 최해(崔瀣)의 문인.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름.
문집구성 :
저본은 子 추(樞, *공권)가 수집·편차하여 초간한 뒤, 후손 구(逑)가 1609년 저자와 자손(子孫)의 시문을 모아 합편·간행한「서원세고(西原世稿)」중에서 발췌한 것임.
● 정포(鄭포)
1309(충선왕 1)∼1345(충목왕 1). 고려 말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중부(仲孚), 호는 설곡(雪谷).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해(#해15)의 손자로, 판선공(判繕工) 책(責)의 아들이며, 최문도(崔文度)의 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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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풀리자 다시 출세의 의지를 가지고 원나라에 건너갔으며, 원나라 승상인 별가불화(別哥不花, 別哥普化)가 그를 한번 보고 매우 호감을 가지게 되어 원나라 임금에게 추천하였으나, 그뒤 얼마 안 되어 37세의 나이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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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鄭오)
?∼1359(공민왕 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겸(思謙). 호는 설헌(雪軒).
찬성사 해(#해15)의 손자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책($책01)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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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청 홈페이지>
청주정씨
정책이 궁궐도감으로, 참소를 입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는 왕(충숙 왕)을 도운 공으로 청하군에 봉해지고 판도판서를 역임했는데, 이는 김방경의 아들인 상락군 김순의 사위로, 안동에 입향한 설헌 정오, 설곡 정보은 바로 이의 아들이다. 설헌은 문과급제로 공민왕의 사부, 첨의평리를 지내고, 그 아우 설곡은 진사, 문과로 충혜왕때 우간의대부를 지냈다.
'영가지'에 의하면 청주정씨가 안동에 살기는 공민왕때 첨의평리를 지내고 서원군에 봉해진 정오와 우간의대부를 지낸 그 아우 정포 형제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영가지' 방리편 회곡촌조에 '마을 어귀에 남향으로 된 큰 밭이 있으니, 예로부터 전하기를 충렬공이 여기서 살았는데, 설헌과 설곡형제도 외가로 하여, 와서 살다'라고 했음을 보아, 설헌 형제가 이곳 회곡에 입향하게 되기는 그 외가의 반연이었음을 알수 있다.
5) 1392년 12월,
익원공(김사형) 52세, 상락백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 300호를 받음.
---같은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의 작위와 식읍 1천호 및 식실봉(食實封)300호를 받았다.
▶익원공 52세, 1392년에 상락백 작위와 식읍 1천호, 식실봉 300호를 받은 곳은?
댓글목록
김주회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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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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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충렬공유허비옛좌대찾기행사 참고자료 겸해서
안동 회곡리 역사를 연대순으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내용은 기존에 모두 소개된 것입니다.
김항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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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항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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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감사합니다.
이번 행사에 좋은 자료로 활용하겠습니다.
김영윤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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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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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올려주신 회곡 관련 자료에 감사드리며 물리적인 거리를 뛰어넘어마치 이번 행사를 주회씨와 함께한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서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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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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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
잘 지네고 계시죠.
늘 한결같으신 마음 보여주심에 감사드리고
자주 인사 여쭙지 못하는 저의 게으름으로 죄송한 마음입니다.
즐거운 추억 많이 만드십시요.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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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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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안동 회곡은 우리 선김의 발상지~!!
600년 원고향을 찾아드는 귀향객들을 회곡의 산천은 반겨 줄것입니다.
연어가 회귀 하듯.. 모레의 탐방이 기다려집니다. 주회대부님이 주신 자료를 공부하면서......
김발용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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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발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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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역시 안동김씨 백과사전입니다. 같이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우리는 아우님과 함께 갑니다.
김정중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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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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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대구에서 저와 동행 하실분-광남종친(보명-재화,대구종친회 부회장, 전 상주시교육장))
안동 회곡에 나오셔서 안내하실 분-광득(植행)종친-전 회곡단소 감역,이번 행사 포크레인 교섭,
사촌에서 안내 하실 분-창회,희국 종친, 의성군청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