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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외갓댁 고모댁 (16)상락군(김묘)배위 여흥군부인 여흥민씨 묘지명, 민사평, 언양군부인, 묘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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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내영환 작성일05-12-09 12:01 조회1,30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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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처민씨묘지명(金昴妻閔氏墓誌銘)

 

여흥군부인 민씨(驪興郡夫人 閔氏) 묘지명

나의 벗 김구용(金九容)씨가 금년(우왕 5, 1379) 윤5월 갑진(甲辰)일 그의 어머니 여흥군부인(驪興郡夫人) 민씨(閔氏)를

조모 김씨의 묘역에 장사하였다. 거리가 서로 십 수보였다. 그리고 아들 참군사(參軍事) 명선(明善)을 보내 묘지명을 부탁하였고,

 나는 의리상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행장을 살펴보니,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도첨의찬성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輸誠秉義協贊功臣 重大匡都僉議贊成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로 시호가 문온(文溫))인 급암(及菴)선생 사평(思平)이 부인의 아버지이다. 광정대부 밀직사사(匡靖大夫

密直司使)로 시호가 문순(文順)인 적(頔)이 부인의 할아버지이다.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시호가 충순(忠順)인 종유(宗儒)는

부인의 증조부이다.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시호가 정렬(貞烈)인 죽헌(竹軒) 김윤(金倫)은 부인의 외조(外祖)이다.

내외의 문벌이 혁혁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존경하였다. 부인은 그러한 집안에서 태어나보고 듣는 것이 익숙하였다.

마땅히 할 일에는 한결같이 어머니의 규범을 근본으로 삼았다.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겼다. 아침저녁으로 문안 인사드리는

일을 병이 들었어도 놓치지 않았다. 친척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홍건)적을 피하여 남쪽으로 옮길 때 어머니를 모시고 떠났는데, 어머니는 편안하기가 마치 집안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 뒤에 여흥(驪興 : 경기도 여주)에 살면서 10여 년 동안을 더욱 부지런히 섬겼다. 어머니가 이미 돌아가니

부인의 아들과 사위가 매양 서울로 돌아올 것을 청하였으나, 부인이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어머니 무덤을 여기다 모셔두고

 내가 가버리면 성묘를 못할 것인데, 내 어찌 차마 떠날고.”하였다.
5월 계사(癸巳)일 병으로 별세하셨다. 나이 56세였다. 구용(九容)이 또 말하기를, “우리 아버지가 맑은 덕을 남이 알까 두려워하시며

어두운데서 기르시기를 좋아하시더니, 이제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어찌 할꼬.”하였다. 색(穡 : 묘지명 찬자 이색)이 말하기를,

“어질도다. 김(구용)의 어머니여, 문온공(민사평)이 비록 아들이 없으나, 이러한 딸이 있어서 구용씨를 낳았고, 외조카(宅相)이

사마천의 사전(史傳)을 완성했으니, 가히 어질다 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아들이 3인이다. 장남 구용(九容)은 전중정대부 삼사좌윤 진현관직제학 지제교 충춘추관편수관(前中正大夫 三司左尹 進賢館直提學

知製敎 充春秋館編修官)이다. 다음 제안(齊顔)은 중의대부 중서병부낭중 겸 첨서 하남강북등처 행추밀원사 봉선대부 전교부령 지제교

겸 춘추관편수관(中議大夫 中書兵部郎中 兼 僉署 河南江北等處 行樞密院事 奉善大夫 典校副令 知製敎 兼 春秋館編修官)이다.

그 다음은 구덕(九德)으로 전좌우위 보승산원(前左右衛 保勝散員)이다. 딸이 9인이다.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사안(金士安),

전개성윤(前開城尹) 이창로(李彰路), 전종부령(前宗簿令) 최유경(崔有慶), 전낭장(前郎將) 허호(許顥), 전부령(前副令) 허의(許誼),

겸박사(兼博士) 이존사(李存斯),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첨(金瞻)에게 각각 출가했다. 나머지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명(銘)에 이르기를,
물건이 뿌리로 돌아갔으니 그 삶은 무궁하도다.
여흥민씨를 그 가운데 장사하니, 강물은 흘러흘러 어찌 쉴 때가 있으리요.
그와 함께 길지어다. 영가(永嘉)의 풍(風)이요.

 

 

민사평묘지명(閔思平墓誌銘)

 

고려 고 수성병의협찬공신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 증시문온공 민공묘지명 병서(高麗 故 輸誠秉義協贊功臣 重大匡 都僉議贊成事 商議會議都監事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 贈諡文溫公 閔公墓誌銘 幷序)

내(묘지명 찬자 : 李達衷)가 젊어서 대인(大人)선생의 문하에서 노닐 때 (선생님을) 모시고 말씀을 듣는다. (선생은) 사풍(士風)을 논할 때마다 반드시 길게 한숨을 내쉬면서 탄식하시기를, “지금 세상이 옛날만 못하다.” 하셨다. 나는 그 때 홀로 말하기를, “너무도 통하지 않는 말씀이다. 어찌 반드시 그러하랴” 하였다. 그 후에 내가 세상 일을 많이 겪어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러함을 믿게 되었다. 전배(前輩)들의 풍류가 날로 줄어들어 다만 고요할 뿐 뒷 사람이 본받을 곳이 없다. 옛 사람을 아쉬워하는 회포가 솟아오르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겠는가. 내가 급암공(及菴公)과는 인척사이로 두터운 정의가 있어 그가 돌아가매 슬픈 마음이 더욱 심하였다. 부인으로부터 묘지명 청탁이 두 번이나 왔으니, 어찌 감히 누추하다고 하여 사양하리오.
공의 이름은 사평(思平), 자는 탄부(坦夫), 호는 급암(及菴)이며, 충주 여흥(驪興 : 지금의 경기도 여주)인이다. 아버지 적(頔)은 광정대부 밀직사사 진현관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匡靖大夫 密直司使 進賢館大提學 知春秋館事 上護軍)으로 시호가 문순(文順)이다. 어머니 김씨는 선수진국상장군 관고려군만호 중대광 상락군(宣授鎭國上將軍 管高麗軍萬戶 重大匡 上洛君)인 김흔(金忻)의 딸로, 영가군부인(永嘉郡夫人)에 봉해졌다. 할아버지 종유(宗儒)는 중대광 도첨의찬성사 상장군 판총부사(重大匡 都僉議贊成事 上將軍 判摠部事)로 은퇴하였다.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증조(曾祖) 황(滉)은 조산대부 호부시랑(朝散大夫 戶部侍郞)이다. 대개 선대에 덕을 심고 인을 베풀어 심고 가꾼 지가 오래되었다. 9대조인 이름이 칭도(稱道)인 봉어공(奉御公)부터 대대로 큰 신하가 있어 그 공로와 이름이 매우 많아 서로 바라보기에 이르렀으나, 집안에 족보가 있고 나라에 사서(史書)가 있으므로 생략하고 쓰지 않는다.
공은 원정(元貞) 을미년(충렬왕 21, 1295) 12월 무진일에 태어났다. 5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할아버지 충순공(忠順公 : 閔宗儒) 집에서 자랐다. 자질이 뛰어나고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재상(大宰)인 김정렬공(金貞烈公 : 金倫)이 평소에 사람을 알아본다는 이름이 있어, 자기 딸을 공의 처로 삼았다. 정렬공은 빈객을 좋아하여 일시의 명사들이 그를 따라 놀았으므로 보고 느낀 바가 있어 배움이 날로 진보되었다.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에 임명되었다가 무반으로 바꾸어 산원이 되고 별장에 올랐다. 그러나 무반직을 좋아하지 않고 책 읽기를 더욱 힘써 하였다. 연우(延祐) 을묘년(충숙왕 2, 1315)에 우리 동암 문정공(東菴 文定公 : 李瑱)이 예부시를 주관하면서 과거 심사가 매우 엄하여 선발한 인원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다. 그러나 뽑힌 사람은 적절치 못한 사람이 없었는데, 공이 여기에 합격하였다. 이로부터 학문에 힘써 10년의 오랜 세월을 보냈다. 이 때 의릉(毅陵 : 충숙왕)이 오래 원나라에 있다가 태정(泰定) 을축년(충숙왕 12, 1325) 왕위를 회복하였다. 귀국하여 신하들을 신중히 뽑았는데, 공은 예문관(藝文館)과 춘추관(春秋館)의 수찬(修撰)에 임명되었고, 좌우정언(左右正言)과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은비(銀緋)와 금자(金紫) 색의 관복을 하사받았다.
경오년(충숙왕 17, 1330) 영릉(永陵 : 충혜왕)이 즉위하였다. (왕은) 유자(儒者)를 좋아하지 않아, 마음 속에 얻은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오로지 무반들이 하는 것을 본받아 아첨하였다. 공은 그 때 군부정랑 예문응교(軍簿正郞 藝文應敎)의 벼슬로 왕부(王府)에 출입하며 인사를 함께 의논하였으면서 그 분수를 지킴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지순(至順) 임신년(충혜왕 2, 1332) 의릉(毅陵 : 충숙왕)이 복위하여 관리의 출척(黜陟 : 승진과 퇴출)을 밝게 할 때, 공은 위위소윤 지제교(衛尉少尹 知製敎)에 임명되었고, 관계(官階)는 봉선대부(奉善大夫)였다. 병자년(충숙왕 복위5, 1336) 봉상대부(奉常大夫)를 더하고 판도총랑(版圖摠郞)의 관직으로 으로써 경상도염철사(慶尙道鹽鐵使)가 되었는데,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겼다. 전교부령 우문관직제학(典校副令 右文館直提學)으로 소환되어 다시 판도총랑(版圖摠郞)이 되고 관직(館職)은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이 되었다. 다시 성균제주(成均祭酒)로 승진하고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옮겼다. 관계(官階)는 중현대부(中顯大夫)에서 중정대부(中正大夫)로, 관직(館職)은 진현관(進賢館)으로 바뀌었다. 전라도안렴사가 되어 은혜를 베풀어 교화하여 다스렸고, 들어와 성균관대사성 충춘추관수찬((成均大司成 充春秋館修撰官)에 임명되었다. 정순대부(正順大夫)를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랐다. 지정(至正) 임오년(충혜왕 복위3, 1342)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 성균시를 관장하여 김인관(金仁琯) 등 93인을 뽑았다.
갑신년(충혜왕 복위5, 1344) 명릉(明陵 : 충목왕)이 즉위하자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임명되고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옮겼다. 을유년(충목왕 1, 1345) 밀직사(密直司)의 밀직제학이 되고 상호군을 겸직하였다. 밀직부사(密直副使)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역임하고, 이듬해 여흥군(驪興君)에 봉해졌다. 해를 넘겨 기축년(충정왕 1, 1349) 총릉(聰陵 : 충정왕)이 원나라에 갔을때 공이 시종하였다. 즉위한 뒤에는 그 공으로 첨의참리 예문관대제학 지춘추관사(僉議參理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에 임명되고, 수성병의협찬공신(輸誠秉義協贊功臣)에 책봉되었다. 찬성사 상의회의도감사(贊成事 商議會議都監事)로 승진하고 물러나, 한가하게 지낸지 8년이었다. 지정(至正) 기해년(공민왕 8, 1359) 65세로, 7월 무신일에 집에서 병으로 별세하였다. 부음이 들리자 임금께서 애도하고 시호를 문온공(文溫公)이라 하였다.
아! 공은 대대로 내려온 관리 집안에서 태어나 사업이 번성했으나, 일찍이 자랑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성품과 자질이 온아하였으며, 친인척을 대함에도 온화하고 화목하였다. 비록 어그러지는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부끄러워 하고 심복하였다. 교유하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졸재 최선생(拙齋 崔先生 : 崔瀣)과 친분이 돈독하였고 그의 문장을 좋아하여 힘을 내어 간행하였다. 믿음을 두터이 하고 선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함에 변덕스럽거나 기이하게 하지 않고 한결같이 의리를 쫓을 뿐이었으며, 소탈하게 시와 술로 스스로 즐겨하는 마음이 넓은 군자였다.
공으로 미루어 보건대 오늘의 사풍(士風)이 반드시 옛만 못하다고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공은 이미 죽었고 만나는 것은 날로 새로운 것들이니, 나 역시 모르는 사이에 한숨을 쉬며 탄식하기를, “지금이 옛만 못하다”고 한다. 이것은 내가 대인선생(大人先生)의 말이 옳다고 믿는 까닭이다.
딸 하나를 두었는데, 세가(世家) 자제인 홍복도감판관(弘福都監判官) 김묘(金昴)에게 시집갔다. 손자가 2인이다. 공이 사랑하여 도에 맞도록 가르쳤다.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제민(齊閔)은 덕령부주부(德寧府注簿)이고, 제안(齊顔)은 직한림원(直翰林院)이다. 손녀가 4명이다. 맏이는 세가자제(世家子弟)인 감문위참군사(監門衛參軍事) 김사안(金士安)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제민 형제가 상례를 주관하며 례를 극진히 하여, 이 달 경신일에 대덕산(大德山) 감응사(感應寺) 남록(南麓)에 장사지냈다.
명(銘)하기를,
공같이 부유하고 공같이 순수함이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인데,
어찌 명이 길지 못하였고 어찌 뒤를 이를 아들이 없었던가, 하늘도 믿기 어렵구나.
아름다운 딸을 두고 아름다운 사위를 맞았으니, 나의 마음을 위안하네.
시는 맛이 있고 문장은 높이 이르름이 있어 나로 하여금 오래 음미하게 하네.
바로 서서 기대지 아니하고 뭇 사람과 어울리되 같이 되지 않았으며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였나니, 생각하면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은데,
아! 끝났구나. 슬프다, 쏜살같이 달리는 세월이여.

 

 

민사평처김씨묘지명(閔思平妻金氏墓誌銘)

 

언양군부인(彦陽郡夫人) 김씨(金氏) 묘지명병서(墓誌銘幷序)

부인의 성은 김씨(金氏)이며, 언양군(彦陽郡) 사람이다. 고조(高祖) 취려(就礪)는 태사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증조 전(佺)은 태부문하시랑(太傅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익대(翊戴)이다. 조부 변(賆)은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로 시호는 문신(文愼)이다. 부친 윤(倫)은 수성수의협찬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언양부원군(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 彦陽府院君)으로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모친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최씨(崔氏)는 대유(大儒)인 중서령(中書令) 문헌공(文獻公) 충(冲)의 13세손인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서(瑞)의 딸이다.
부인은 나이 13세에 민씨(閔氏 : 閔思平)에게 시집을 와서 부인의 직분을 다하였다. 엄한 성품으로 자제를 반드시 예법에 맞게 가르쳐, 종족(宗族)들이 지금도 칭송하고 있다. 딸 하나를 낳아,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김묘(金昴)에게 시집을 보냈다. 김묘는 신라왕인 부(傅 : 경순왕 김부)의 18세손이다.
김묘의 아들은 제민(齊閔) 제안(齊顔) 구덕(九德)이다. 딸은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사안(金士安), 전개성윤(前開城尹) 이창로(李彰路), 전종부령(前宗簿令) 최유경(崔有慶), 전낭장(前郎將) 허호(許顥), 전전객부령(前典客副令) 허의(許誼), 낭장 겸 박사(郎將 兼 博士) 이존사(李存斯), 문하주서(門下注書) 김섬(金贍)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그 아래는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제민은 이름을 구용(九容)으로 고쳤다. 그가 흥위위녹사(興衛衛錄事)인 아들 명선(明善)에게 행장(行狀)을 들려 보내 묘지명을 지어 달라고 나에게 청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외조부인 급암공(及菴公 : 민사평)은 성품이 진솔하여 사람 사이에 간격을 두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시와 술로 유유자적 하였을 뿐, 집안의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으며 모두 부인(夫人)이 하는 대로 맡겨 두었습니다. 부인은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외조부의 마음을 즐겁게 해 드리면서도 혹시 부족한 점이 있지 않을까 날마다 걱정하였습니다. 부인이 외손녀들을 가르칠 때면 으레 ‘남편을 받드는 예법은 처음부터 늙을 때까지 오직 한결같이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옷과 음식을 마련할 때에도 반드시 정결하게 하면서 때에 맞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사람들이 ‘민공(閔公)이 자유분방하게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이 가정을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언양백(彦陽伯) 경직(敬直)이 부인보다 손위의 오빠이긴 하였지만, 그 역시 부인을 어렵게 여긴 나머지 감히 조금이라도 거만하게 대하지 못하였으며, 첨서 밀직(簽書密直) 희조(希祖)와 여러 아우들도 모두 모친을 대하듯 부인을 섬겼다.
기해년(1359, 공민왕 8) 급암공이 별세하고, 신축년(1361, 공민왕 10) 삼년상을 마쳤을 때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였다. 영남(嶺南)으로 피난하였다가 여흥(驪興)으로 돌아와서 살게 되었다. 부인이 스스로 한탄하기를 “우리 손자 제안(齊顔)이 제 목숨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서울에 다시 가겠는가.” 하였다. 강렬한 기질이 부친의 풍도를 닮은 데가 있었다고 한다. 갑인년(1374, 우왕즉위) 9월 19일 병으로 별세하였다. 향년 73세였다. 그해 12월 15일에 군(郡)의 남쪽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에 장사지냈다. 급암공을 장사 지낼 때 내가 시를 지어서 만사(挽詞)를 도운 바가 있어, 부인의 묘지명을 어찌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여강의 서쪽 발산의 양지 급암공의 부인인 김씨가 잠들었네.
위열공의 그 기상을 정렬공이 떨쳤나니
규문 역시 숙연하여 문채와 절도가 있었어라.
아! 그대 자손들이여.
이 마음 잘 간직하고 부도(婦道)에 어긋나지 않게 구원(九原)에 계신 분의 영혼을 위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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