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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에도 삼태사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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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작성일02-04-11 20:48 조회2,4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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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가 파평윤씨(4)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에는 파평윤씨의 시조 윤신달 태사의 묘와 재실인 봉강재가 있다.



또한 기계유씨 시조인 兪 三 宰 태사 묘도 기계면 미현리에 있고



辛 夢 森 태사묘는 화봉리에 있어 기계면에 삼태사 묘가 있다고 한다.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의 재실



봉강재



파평윤씨 시조인 태사공 윤신달(893∼973)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해 1752년에 창건한



재사로서 28세 손인 윤광소가 안동부사로 재임시 헌금 50량과 목재 15칸분을 헌납하여



창건한 후 26세손 윤동도가 경상감사로 재직시(1762년) 수축하고 1763년 경상감사 윤광안과



안동부사 윤성대에 의해 위토를 늘리고 재사를 중수하였음.



봉강재는 조선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존한 건축물로 평면구성에서 독특한 점이 있으며



치목수법이 우수하며, ㄱ자형 팔작지붕에 접처마로 정면 6칸, 측면 4칸의 구조로 되어 있다.



태사공은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가 남달리 뛰어났고 장성하여서는 고려 왕건의 막료가



되어 고려국의 건국 및 국기 다지는 일에 많은 공을 세웠다.공은 918년 신숭겸 등과 함께



왕건을 도와 궁예를 추방하고 고려 창건에 공을 세웠고, 후백제의 견훤을 복속 시킬 때 및



신라 경순왕 귀순 시킬 때에 공이 컸으며, 나아가서 견훤의 아들 신검을 토멸하여 후삼국을



통합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워 삼국통일후 건국 공로로 벽상삼한익찬공신의 서훈과 삼중대광 및



태사의 관직이 내렸다.



그후 944년 (혜종1년)에 혜종이 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공을 신라 유민을 다스리는 경주대도독으로



내보내는 한편 공의 아들 선문을 인질로 하여 개경에서 봉직케 함에 본이 아니게 혈육별리의



고통을 겪게 된다.



30년 재임 기간중 한 번의 반란도 없이 이역땅 경주에서 선정을 베풀다가 973년(광종24년)



81세로 결국 임지에서 일생을 마치니 신라유민들은 공의 유덕을 흠모하여 여기 금닭이 알을



품은 (금계포란지형)형상의 경주 기계현 벌치동(현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구봉산



아래에 예장 하였다.



그러나 이 묘소는 후손이 천리 원거리에 있었기에 실전 직전에 이지방의 토호 이하음이



전래하던 묘비를 동강내어 땅속에 파묻고 투장을 감행 하였다.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



영조 연간에 이르러 경주 종인 참봉 도가 전래하는 야설에 의하여 이를 탐지하고 요로에



알렸더니 당시 영부사 지완과 판부사 지선, 판서 헌주, 승지 봉조, 영장 봉정과, 경주부윤리



등이 힘을 모아 심묘에 전력 하였으나 확증을 잡지 못하다가 영주 13년(1737)에 양래가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7일간에 걸쳐 전 묘역을 샅샅이 파헤쳐 묘비 동강을 발견함으로써



확증을 얻어 비로소 심묘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곧 봉분을 개축하는 석물을 다시 다듬어 세웠다.



그후 1752년 광소가 재실을 창건하고 봉루암이라는 현판을 붙이고 승려를 상주시켜 묘역을



수호케 하다가 수 차례의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구봉산 아래 송림이 울창한 곳에 옛부터 이 마을 사람들이 왕릉이라 칭하기도 한 큰 묘소



동측에 위치한 봉강재는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재실 정면에 봉루암이라는 현판과 재실루



상단에 봉강재. 태사공분암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평면구성은 ㄱ 자형으로 타지방의 일반적인 평면과 약간의 차이가 발견된다.전체적으로



보아 깨끗한 감을 주고 유지관리에 세심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잘 다듬은 화강석 기단 위에 화강석 정평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운 정면 6칸,



측면 4칸의 익공식 3량가 ㄱ자 팔작와가 겹처마로 구성되어 있다.



평면상으로는 통문 5칸의 온돌 강당 전면에 툇마루를 놓고 우측에 중문의 원로인이 거처하는



고문실이 온돌 2문으로 연립하고, 그 전면에 통문 루가 강당 우측 ㄱ자 평면끝에 자리하고 있다.



강당의 좌측단 온돌 1칸은 1977년 보수할 당시 부엌칸을 개수 변경한 것이다.



강당천정은 고미반자로 처리하였고 루는 처마도리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위 판대공을



이용하여 원형종도를 받는 3량을 채택하고 있다.기둥은 모두 원주를 쓰고 도리도 모두



굴도리를 사용하였으며 주요 구조부재의 치목은 주로 도끼나 자귀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재사 전면 좌우측에 동서재는 195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구조적으로 별다른 특색이 없고



각주에 납도리를 사용한 홑처마 박공와가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봉계리의 앞들판의 이름이 관평인데 이에 대한 지명유래는 다음과 같다.



⊙관평(管坪)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관평



남북으로 길게 뻗친 봉계숲의 서편에 위치하며, 파평윤씨 시조 윤신달 태사의 묘와



재실(齋室) 및 봉강재·파평윤씨시조윤신달비가 있다. 고려말 경주부윤(府尹)으로 있던



태사의 후손이 이곳에 관청을 설치하고 분실된 태사의 묘 를 찾았다 하여 관평(官坪)이라 불렀으며,



한편 물대기 좋은 들이라하여 관평(灌坪)이라고도 한다.







▣ 김항용 -

▣ 김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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